(지식인의 서재 ‘영화배우 정진영’씨 편은, 책을 구입해서 서재를 별도로 마련하기 보다는 공공도서관을 선호하신다는 정진영씨의 뜻에 따라
실제 서재처럼 자주 이용하신다는 수내1동 작은도서관을 배경으로 촬영했습니다.)
독서하는 장소 외에, 생각하는 장소로서의 서재
저에게 서재는 고시 보지 않는 자의 고시원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고시원의 원래 용도는 고시 보는 분들의 공부방인데, 단기로 짧게 살고 싶은 분들이 살기도 하잖아요. 고시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고시원은 사실은 애초의 용도와는 다른 것이 되어 있는 거죠. 안정적인 공간에서 살림을 할 여건이 아직 안됐을 때 살기도 하고…… 따라서 고시원이라는 원래의 용도에는 맞지 않지만, 그 분들에게는 절실한 그런 공간이 되는 셈이죠. 제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에게 서재라는 게, 제가 배우일을 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공간은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생각을 하고, 휴식을 하고, 여러 가지 꿈을 꾸는 장소가 필요했고, 그게 저에겐 서재인 셈이죠. 그래서 저는 저의 서재를 ‘고시 보지 않는 사람의 고시원’이라고 정의 내리고 싶습니다.
동네 도서관은 책과 함께 자유롭게 꿈꾸는 공간
여기는 제가 사는 집 부근의 동사무소에서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이고, 여기서 2km 정도 가면 이 지역에서 하는 큰 도서관도 있어요. 요즘 주로 그 쪽에서 책을 빌려봐요, 사 보지는 않고. 책이라는 게 소장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내가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구나 저처럼 학계에서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는 집에 책을 많이 두는 것도 좋지만, 책이 많이 있는 곳에서 자유롭게 꿈꾸는 것 또한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가까운 곳들에 있는 작은 도서관들을 네티즌들이 (서재처럼) 많이 이용하십사 하는 의미에서 이 곳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했습니다.
생각을 위한 데이터와 자료를 제공해주는 책
책이란 생각을 위한 데이터라고 생각해요. 물론 책을 보면서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있지만, 생각을 하게 만드는, 생각할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책들을 보는 편인데 나이를 먹으면서 요즘은 역사책이나, 에세이 쪽을 좋아하고요. 그런 책들을 많이 빌려봐요. 사실 그래서 도서관을 많이 이용하게 되는데…… 도서관에는 그런 책들이 굉장히 많잖아요. 그렇게 짧게 짧게라도 볼 수 있고, 그 중에서 이 책은 옆에 두고 보고 싶다 싶은 책을 따로 구매를 해서 보기도 하고 그렇게 되죠. 그래서 저는 책을 10권 보는 것보다 한 권을 보면서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을 하고, 그것이 제 개인적인 독서법 입니다.
제가 문학을 전공했지만, 사실 대학시절부터 연극반 생활을 하면서 그 쪽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요. 글, 창작을 하겠다는 생각은 많이 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제가 문학과에 적을 두면서 주변의 친구들이나 선생님들로부터 받은 문학적 영향이 제가 지금 일을 하고 있는 배우 생활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결국에 대학시절의 예술에 대한 고민, 문학에 대한 고민이라는 것이 다른 쪽 예술에도 고스란히 적용이 된 것 같아요.
삶의 경험을 늘리기 위해 변화를 추구
따로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는 않아요. 기본적으로 배우로서 할 수 있는 연기에 대한 준비는 계속 할 것이고, 한 편으로는 이제 40대 후반이니까 옛날에 안 해본 일을 해보고 싶어요. 그게 저의 삶을 제가 늘리는 일인 것 같고, 그 속에서 평생, 새로운 것을 만나며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고요. 그것이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일과 사람들, 그리고 경험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도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유로운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런 기회가 많은 편인데요. 직장 다니는 분들도 아주 작은 것에서 새로운 변화를 갖는 게 가능합니다. 출근할 때 맨날 타던 버스노선 말고, 다른 버스도 타보고, 그러면서 또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고. 중요한 것은 계속 스스로 변화하려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요. 물론 여행도 그런 방법 중의 하나이긴 한데, 일상 생활 속에서도 변화를 도모할 방법도 무수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의 책 선정의 변"
내 인생의 책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준비해 달라고 해서 굉장히 당혹스러웠습니다. 제가 그렇게 엄청나게 책을 읽은 사람도 아니고…… 그래서 10대 때 나에게 의미가 있었던 책, 20대 때, 30대 때, 40대 때. 이렇게 4권 정도를 골랐습니다. 이건 그 책의 객관적인 가치나 그런 것이 아니라, 철저히 개인적인 이유예요. 그 책을 만나고 읽은 다음에 가슴이 뛰었고, 그 시기에 저의 삶을 규정할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뽑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책을 쓴 저자와 술을 마시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들게 했던 그런 책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내 인생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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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여, 침을 뱉어라
- 김수영 | 민음사
- (도서협조 - 남서울대학 중앙도서관)
이게 10대 때의 책인데, 커버가 지금 없는데요.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김수영 시인의 산문집이에요. 김수영 시인은 우리 문학사의 아주 탁월한 시인이고, 치열한 현실참여의 삶을 살았고, 엄청난 생각을 하신 분이고, 비운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분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그의 일종의 시론인데 예술론으로도 치환이 될 것 같아요. 이 책에서 진정성과 온 몸으로 시를 써야 한다는 얘기를 하셨는데요. 시는 가슴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온 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는 글귀라든지, 이 안에 있는 많은 생각의 편린들이 저의 10대 때 저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등학생 때니까 당연히 그 때 이 분의 사고를 다 이해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만약에 예술 쪽의 일을 한다면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자극을 주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한동안 김수영 시인의 시를 마치 제가 쓴 시인 냥 좋아하고 친구들에게 이런 시가 있다고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10대 때에 제가 술을 마시고 싶었던 시인의 책이죠.
위 도서는 절판도서로, 현재는 <김수영 전집 2 '산문'>에서 해당 도서의 산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6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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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 | 돌베개
- (도서협조 - 경원대학교 중앙도서관)
두 번째 책은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입니다. 요즘은 <전태일 평전>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 됐는데요. 원래는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쓰신 책인데, 그 때는 이게 비합법적인 책이어서 저자도 안 밝혔어요. 워낙 이런 책 내고 그러면 잡혀가고 그럴 때여서, 저자이름도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 있는 책이죠. 제가 살았던 20대는 80년대라는 시간이었는데, 사회적으로 격변기였고, 제 또래 친구들도 심각하게 사회문제를 고민했던 시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무수한 사회과학 이론서보다 고 전태일 선생의 삶을 한 권 읽는 것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 뿐 아니라 우리 또래들의 애독서이기도 한데, 20대 때에는 아마 이 책이 저에게 던져준 감성으로 20대를 살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위 도서는 절판 도서로, 현재는 <전태일 평전>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01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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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 심리학 입문
- 캘빈 S. 홀 | | 범우사
- 이런 책을 (내 인생의 책으로) 소개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 책은 <융 심리학 입문>입니다. 융이 쓴 본격적인 책도 아니고, 입문서죠. 30대에 제게 의미가 있었던 책인데요. 30대 들어서 사회적 변화, 또 제 삶의 변화 그런 것들 속에서 여러 가지로 좀 혼란스러웠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런지는 설명할 수 없는데 혼란스러웠던 것이 이 책을 보면서 치유가 됐어요. 이 책은 결국에는 융의 이론, 사상을 쉽게 풀어놓은 책인데요.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치유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 융의 이론 중에 직관에 대한 이야기와 끊임없이 자기 안의 누군가가 자기자신과 대화를 하고자 한다는 내용들이 제 안에 있는 내면을 계속 바라보게 하는 작용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20대 때 저희들이 살았던 삶은 굉장히 뜨거웠는데, 그 뜨거움을 제 스스로 안에서 식힌 다음에 가졌던 혼란들을 제가 좀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거죠. 저의 내면과 대화하는 시기가 30대였다면, 그 30대 내내 이 책의 본 내용과는 무관하게 저의 내면을 스스로 인정하고 이 책에서 받은 생각의 단초가 저에게 의미가 있었던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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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 마음산책
- 제 40대의 책은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이라는 산문집입니다. 이 책은 김연수 작가의 문학청년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사적인 기록이에요. 물론 아름다운 김 작가의 문장과 함께. 저는 문학청년은 아니었지만, 20대, 10대 후반에 꿈꿨던 아름다움이라든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어요. 사십이라는 나이는 객관적으로 평범한 인간의 수명의 반을 넘어간 나이인데, 앞으로도 새로운 일을 계속 만나겠지만, 예전 저의 가공되지 않은 원형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견주어보면서 40대를 살게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게 단순히 후일담이나 회고담이라기 보다는 중년을 열심히 살도록 해주는, 과거의 나로부터의, 모종의 지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저의 40대의 인생의 책이 된 것이죠. 소개한 모든 책들이 철저히 제 사적인 체험과 사적인 경험에 기반해서 뽑아온 책이거든요. 실제 내용과는 무관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