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재

시인 고은

함백산방 2011. 7. 7.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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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 나무처럼 뿌리내리고 있는 곳

서재는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도 표현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꿈꾸는 곳입니다. 잠자는 곳은 아니지만, 나는 이 방에서 아주 많은 꿈을 꿔 오고 있습니다. 이 방에 있는 책들은 아주 오래된 책도 있고, 최근에 나온 책도 있는데요, 나는 이 수많은 책 속에 묻혀서 살고 있습니다. 지하실에는 주로 전집류들을 모아둔 서고가 있는데요 필요할 때는 지하실에 가서 찾아와서 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이 방안에 있는 여러 영역에 걸쳐있는 지적인 성과들과 늘 만나고 있지요. 도서관의 분류법 같은 건 여기에 적용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분류할 줄도 모르고요. 그저 내 마음대로, 풀이 어디에서 태어나는 것처럼, 나무가 어디에서 뿌리내리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 둘 쌓여서 자기 세계를 이루고 있지요.

나를 끊임없이 자라게 하는 책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 같은 사람은 도서관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자라지 않았습니까? 또 프랑스의 사르트르 같은 사람은 외갓집의 육중한 서재의 모든 책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었지요. 그런데 나는 그들과는 정 반대의 환경에서, 마을에 책이 몇 권밖에 떠돌지 않는 그런 곳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나면서 폐허에서는 당연히 책 같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고, 책이 곱게 간직되어 있는 곳이 어디 하나 없었지요. 그런데다가 또 산 생활 – 고은 시인은 한 때 불교에 귀의한 적이 있다 - 에서 언어와 문자를 부정하는 시간이 있으니까 전혀 책과 가까이 하지 못했고, 또 중기에도 책의 의미를 부정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을 밤 중에 태워버린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책만이 내 종교이고, 책 속에 들어있는 세계만이 나를 건져주고, 또 내가 꿈꾸게 하고 나를 끊임없이 자라나게 하는 존재입니다.

학생, 끊임없이 배우는 생명

인간은 타고난 것의 중요성과 함께 타고나지 않은 것의 중요성을 개척해야 합니다. 그게 공부지요. 학생이라는 말을 나는 아주 좋아합니다. 무언가를 배우는 생명이라는 말이지요. 독서나 공부는 학부 4학년, 중학교 3학년, 고교 3학년, 혹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6년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평생 숨이 넘어갈 때까지가 공부의 기간이라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늘 내가 타고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부를 하지요. 어떤 책이든지 거기에는 고귀한 가치가 반드시 금강석처럼 빛나고 있어요. 책을 닫아두면 그 속에 있는 언어는 시체일 뿐입니다. 책을 열어서 나에게 왔을 때 비로소 이 세계가 살아나지요. 책처럼 매혹적인 것은 없어요. 책을 펴면 살아나고, 애기처럼 태어나서 생명이 자라나지요. 책은 나에게 어떤 생명이 왕성하게 지속되는 숲 속이고, 그 속에 내가 있어요.

시와 나는 지독히 사랑하는 사이

시는 어떤 의미에서는 문학 그 이상의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가 편법으로 분류할 때 시는 문학의 한 장르라고 얘기하는데요. 시는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문학 이전, 이후, 또 문학 이외의 어떤 것이지요. 그래서 시라고 하는 것은 한 장르의 골짜기에 처박아 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뭐라고 이름 지을 수 없는 그 어떤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시학과 시론에서 시를 정의하고 있습니다만, 나는 그 수많은 정의들을 믿지 않고 나 역시도 시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으면 모른다는 대답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시 뿐 아니라, 소설, 평론집 등 여러 장르게 걸쳐서 장르에 구애 없이 글을 썼습니다만, 지금은 대체로 시로 귀결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내 시의 행방이 이제까지 가지 않은 길을 가야 된다는 사명에 불타고 있어요. 여전히 나는 시를 사랑하고, 또 시가 나를 지독하게 사랑해주고 그래서 우리는 헤어질 수가 없는 그런 상태입니다.

나에게 가장 행복한 이름은 '시인'

한국에 현존하는 시인이 몇만 명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만 명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십만 명이라고도 하죠. 헤아리는 원칙, 시각에 의해서 경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수많은 시인 중에 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런 시인 중의 한 명으로서 한국적 정서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민족시인이라는 말도 오래 전부터 들었고, 국민시인이나 국가시인, 혹은 세계의 시인이라는 말도 들었는데요. 나에게 가장 행복한 이름은 그냥 시인입니다.

"책은 자기가 스스로 만나야 합니다."

모든 작가를 좋아해요. 나는 어떤 것을 권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것도 권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직접 자기의 운명을 만나야 해요. 누가 시켜서, 가라고 해서 가는 허수아비가 아니고, 자기가 (스스로) 가서 어떤 책과 만나야 해요. 어떤 사람과 만나라고 해서 만나면, 그건 시키니까 따라서 만나는 것 뿐이잖아요. 자기가 만나야지요.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 이 책이다, 저 책이다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좋은 책이 아주 많은데 어떻게 몇 권만 집어서 말을 하겠어요. 그러면 내 눈을 가리고 어떤 책을 집으라고 하는 것 밖에는 안 되는 것이죠. 이렇게 수많은 동서고금의 책이, 또 없어져버린 책이, 그리고 앞으로 나와야 할 책의 원소인 산천이 있고, 바람이 있고, 비가 있고, 구름이 있는데 이런 데서 어떻게 몇 권을 고르란 말이에요. 그건 모독이죠. 내 눈을 가리고 내 손을 어딘가에 갖다 대면 저는 그 책이 좋은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래의 ‘내 인생의 책’은 고은 시인께서 인터뷰 중 기억에 남는 도서로 언급하신 책들이며, 특정 책을 추천하는 것은 원치 않으셔서 관련한 일화가 있는 도서들을 소개합니다. 또한 '추천책'에 있는 도서 리스트는 고은 시인께서 그동안 읽으신 도서들, 기억에 남는 작가들로 언급해 주신 책들을 모아서 소개해 드리는 것이며 추천책으로 지정해서 읽기를 권하신 책은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내 인생의 책

  • 백범일지
    김구 | 도진순 | 돌베개
    우리 장모님께서 몇 년 전에 95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일전에 장모님께서 말씀하시길 옛날에 장인하고 두 분이 사실 때 이따금 장인께서 책을 읽어주셨대요. 그 때 <백범일지>를 읽어주면 들으면서 엉엉 울곤 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나 역시 눈물이 말라버릴 때면 가끔씩 그 책을 보고 엉엉 울곤 합니다. 이 책은 눈물의 책이죠. 너무나 참되고, 정직하고, 너무나 조국과 자기의 삶의 터전에 대해서 뜨겁게 얘기한 책이죠. 그러나 이 책이 양서니까 이걸 읽어라 하고 권한다기 보다는 그런 기억이 있다는 것을 하나 말하고 싶습니다.
    백범일지
  • 부활 1(세계문학전집 8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박형규 | 민음사
    나는 앞으로 시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하거나, 옛날 시들을 많이 읽는 등 시인이 되기 위한 체계적인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시인이 되었죠. 그래서 실제로 톨스토이의 <부활> 같은 소설도 70년대 후반에 감옥에 가 있을 때 처음 읽었어요. 그 전에는 그런 책이 있다고 알고만 있었지 읽지는 않았었고... 또 보들레르의 시가 어떻다는 얘기는 듣고 알고 있었는데 시인이 되고 난 후에야 그의 책을 실제로 읽고 아 이런 사람이 있구나 하고 만나기 시작했지요.

    [책소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만년에 완성한 역작으로 <전쟁과 평화>, <안나 까레리나>와 더불어 톨스토이 3대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한 귀족과 창녀가 정신적으로 부활하는 과정을 통해, 당대 러시아의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비판을 가하면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근본으로 하는 톨스토이의 사상을 담고 있다.
    부활 1(세계문학전집 89)
  • 악의 꽃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 윤영애 | 문학과지성사
    [책소개] 서구 현대시의 시조 보들레르가 남긴 단 한 권의 시집이다. 문학 활동이 지속되었던 근 이십오 년 내내 그는 이 한 권의 시비에 집착하며, 그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 시집 속에 그의 삶의 경험의 정수를 쏟아놓았고, 이 시집으로 후에 ‘현대시의 시조’로 불리게 된다. 낭만주의 정신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낭만주의의 결점을 뛰어넘은, 이후 오게 될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현대시에 길을 터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보들레르의 삶의 역사와 겹쳐있는 책으로, 기이하고 대담한 주제, 놀랍도록 파격적인 감수성과 독창성을 느낄 수 있다.
    악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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