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재

목판화가 이철수

함백산방 2011. 3. 2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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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맞이하듯 책을 만나는 공간

저에게 서재는 영혼의 사랑방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사랑방이라고 하는 것이, 대개 바깥주인이 외부 손님들을 맞고 이야기 나누는 자리잖아요. 익숙한 손님들이 거듭 찾아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낯선 손님이 찾아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손님이 마음에 안 들어서 내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손님이 너무 좋아서 오래 계시라고 권할 때도 있고 하는 것처럼, 많은 책들이 저한테 손님처럼 왔다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 시절 도피처가 되어준 책

어린 시절부터 책을 아주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좀 내성적이었고. 그리고 개인적으로 아버지께서 사업이 파산하는 바람에 갑자기 경제적으로 곤궁한 삶을 살게 되기도 한 기억이 있는데, 아마 그러면서 받았던 여러 가지 상처들 때문에 책이라는 공간으로 도망을 친 것이 아닌가 할 만큼 책에 많이 빠져있었어요. 끝없이 책을 보는 사람이었죠. 어릴 때부터 그 이후 청년기까지……. 아마도 지금까지일 텐데. 어려서 책을 보는 것이 설사 도피행위라고 하더라도 의미 있는 일이었고, 또 그 속에서 얻은 것이 워낙 많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책을 늘 곁에 두고 사는 사람이 되었죠. 마음속으로 ‘글 쓰는 사람이 되는 것도 괜찮겠다’라는 생각은 조금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먼저 자리를 잡게 되어서, 글을 쓰는 사람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글을 읽는 사람으로 살아오게 됐죠.

판화와 책은 운명적으로 가까운 사이

저는 데뷔를 한 이후로 – 데뷔전 한지 올해가 30년 째인데 – 계속해서 대중들한테 관심이 많았어요. 대중에 관한 관심이 커서, 특히 출판을 통해서 좀 더 대중들에게 가까이 가겠다고 생각한지 오래였어요. 처음 데뷔전을 한 것도 <응달에 피는 꽃>이라고 판화집 형태의 책자로 묶여 나오고, 이후로 꾸준히 그런 판화집도 출판을 하기도 했고요. 달력이라든지, 엽서라든지, 책 표지라든지, 정기간행물 표지, 혹은 정기간행물 안의 연재하는 칼럼, 이런 형태로 계속해서 판화를 출판물에 실어서 평범한 사람들 곁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어요. 특히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세상에 하려고 할 때, 무력한 한 개인이 대중들하고 접점을 넓히려고 하면 결국은 다량의 복제가 가능한 그런 형태가 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는 인쇄라고 하는 것이 저한테 준 영향이 굉장히 컸어요. 본질적으로 보면 판화라고 하는 것도 인쇄에 가까워요, 복제의 한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그리고 과거에, 현재와 같은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목판 자체가 엄연히 인쇄술이었거든요. 그게 기능이 좀 수공적이라고 하는 것을 제외하면, 요즘 인쇄 출판의 역할을 판화가 해왔던 거니까 운명적으로 굉장히 가깝다고 할 수도 있는 거죠.

아날로그적인 수공의 느낌을 좋아해

나는 사실은 특별하게 새로운 매체에 관한 호기심이나 이런 것은 없는 편이에요. 특히 사이버 공간이 가지는 정밀하기는 하지만 허상이고 가짜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그 트릭에 나까지 뛰어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 생각을 사실은 많이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적인 세계에 좀 지속적으로 있고 싶다는 생각도 있어요. 특히 손 뜨개질 같은 것처럼 수공의 느낌, 손으로 하는 조용한 노동이 주는 따뜻함이라든지, 뭔가 친밀감 같은 것이 있는 그런 세계에 저는 관심이 많아서 제가 아마 아주 많은 복제 수단들이 있고 판화의 형태들이 있을 텐데도 목판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아마 그런 것일 것 같아요.

데뷔 30주년을 맞아 개인전 계획 중

올해는 제가 데뷔한지 30년 되는 해가 됐어요. 그래서 묵은 그림들과 함께 근년의 작품들을 보여주는 작은 전시를 하나 해볼까 계획을 하고 있어요. 제가 한 6년째 전시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모처럼 전시 외출을 한번 해볼까 그런 정도를 생각하고 있고. 일상적으로야 늘 봄이 되면 논밭에 뭔가를 심고 하는 일을 시작하게 될 거고, 때 놓치지 않아야 하니까 다른 일 바빠도 제때 제때 논밭 관리 해주려고 쫓아다니기도 할거고요. 누가 올지 모르겠지만, 드나드는 손님들하고도 또 가끔은 보게 될 거고……. 뭐 그런 것 이상은 없어요.

내 인생의 책

  • 역사가의 시간
    강만길 | 창작과비평사
    이 책은 강만길 선생님이 쓰신 책이에요. 개인적으로는 이 분이 오래 전에 쓰신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라고 하는 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온 역사서를 봤어요. 5.16 군사 쿠데타 때문에 (아버님) 사업이 파산을 하셔서 우리 가족을 온통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몰아 넣었던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제가 아버지에 관해서 굉장히 큰 미움이나 노여움 같은 것을 가지고 청소년기를 지냈거든요. 청년시절에 강만길 선생님의 그 책의 어느 한 대목을 보고 우리 아버지가 애정이 모자라시거나, 혹은 능력이 없어서 나나 우리 가족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어서,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전적으로 놓여나게 된 아주 특별한 계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당신의 역사가로서의 삶을 회고하는 이렇게 방대한 책을 내신 것을 계기로 다시 한번 만나 뵙고 싶었던 계기가 된 책인데, 우리 역사 속에서, 혹은 우리의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는 역사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역사는 왜 알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게 어떻게 한 개인을 구원할 수도 있는지 여기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역사가의 시간
  •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조세희 | 이성과힘
    이게 조세희 선생님 <난쏘공> 200쇄 기념으로 한정판으로 찍어냈던 소설이에요. 보통 서점에서 보시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하고는 조금 다르죠? 이 <난쏘공>은 누구라도 잘 알고 계신 것일 텐데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난쏘공’으로 줄여 부른 아주 재미있는 책인데, 이게 70년대 중 후반 한 2여년간에 집중적으로 쓰여진 단편들을 모아놓은 소설집이거든요. 난쟁이가 등장하는데, 이 난쟁이가 상상력으로도, 현실의 조건으로도 성장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영원히 난쟁이로 살아가게 되는 그런 존재인데, 지금 우리시대가 겪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우리의 정신적인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여러 가지, 혹은 경제적인 불평등에서부터 사상의 자유에 이르기까지 이 난쟁이가 겪었던 어려움들이 우리시대에 여전히 변화된 형태로 재생산되고 있어요. 그 점 때문에 이 소설은 젊은 사람들도 충분 히 한번 다시 읽어 볼만한 현재진행형의 이야기책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 이행의 시대
    이매뉴얼 월러스틴 | 백승욱 | 창작과비평사
    이 책은 화가가 소개하기에 적당해 보이지 않는 책일지도 모르겠어요. 월러스틴이라고 하는 학자가 쓰신 책인데, 1945년에서 2025년까지 라는 연대가 표시되어 있잖아요. <이행의 시대 - 세계 체제의 궤적>이라고 하는 책인데, 세계체제라고 하는 건 말하자면 거대한 자본이 국경을 불문하고 넘나들면서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저항할 수 없는 힘을 쓴다고 하는 것이고, 그 세계체제 속에 있는 한, 돈의 지배, 혹은 금융의 지배 속에 있는 한 평범한 우리 모든 사람들의 삶은 절대로 스스로 서서 스스로의 생각으로 스스로 살아가는 일이 아닐 수 있다고 하는 통찰을 가지게 하는 책이에요. 이 책 속에는 대개 거대한 자본의 각축에 관한 이야기들이 제일 많이 담겨있고, 또 이걸 통해서 보면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체제는 세계 체제 속에서 참 사소한 존재라는 생각도 새삼스럽게 하게 하지만, 이 속에서 얻은 지식대로라면 우리는 움치고 뛸 수도 없이 굴종적으로 돈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 밖에 남지 않는다고 절망하게 될 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더라도 그게 절망의 끝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세계체제라고 하는 것이 이런 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는 것이 우리가 겪는 여러 가지 경제적인 어려움이라든지,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 때문에 월러스틴을 비롯한 이런 류의 거대한 체제에 관한 책은 두루 한번쯤 읽어 보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걸 추천하게 된 거고요.
    이행의 시대
  • 산색
    운서 주굉 | 연관 | 호미(홍현숙)
    이건 <죽창수필>이라고 하는 책인데, 상당히 두꺼워 보이죠. 이건 운서 주굉이라고 하는 중국의 승려가 쓴 책인데, 부인을 둬도 되는 그런 승가의 승려세요. 제가 굳이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선 이야기> 같은 것만 해도 생활적인 느낌을 발견하는 데는 좀 한계가 있는데 반해서 운서 주굉이라고 하는 중국승려가 쓰신 이 책은 부인하고 같이 가정을 꾸리고 살았던 승려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는데요. 탁월한 카운슬러처럼 삶의 실감이 있고, 현실에 동떨어지지 않은 이야기로 마음 이야기를 참 잘 풀어가시는 분이어서 제가 이 책을 보면서 얻은 감동도 많았고, 얻어 배운 지혜도 참 많았어요. 그래서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데, 이 책은 전체를 다 번역한 경우고 - 이 책은 아마 지금 절판되어 있지 싶어요 - 이 책을 원래 옮겨서 펴내셨던 연관스님이 근년에 특히 불교적인 요소가 너무 강한 것들을 많이 걸러내고 생활적인 실감이 있는 수필들을 중심으로 새로 편역을 해내신 책이거든요. 그래서 제목도 <산색>이라는 제목으로 바꾸셨어요. 참 가볍게 읽을만한 책인데, 읽고 나면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책으로, 가볍게 가방에 넣고 다니시면서 보기에도 적당한 책이에요. 거듭 당부하지만 이런 류의 책에서 종교색을 찾아내시기 보다는 스스로 알아서 종교색을 지워가면서 읽는 것도 좋은 독서법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산색
  •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장일순 | 시골생활
    혹시 장일순 선생님이라는 분 아시나요? 이제는 이 분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세요. 세상을 떠나신 지 십여 년 되었는데, 이분은 걸어 다니는 동학이라고 하는 별명을 들으실 만큼 동학사상에도 아주 깊이 조예가 있으셨고, 노자에 관한 이해도 아주 깊으시기도 하고, 천주교의 배냇신자이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시기도 하셨어요. 그러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지혜서에 두루 이해가 깊으셨던 어른이셨는데 요즘은 생명사상의 원류 정도로 새삼스럽게 사람들에게 소개가 되고 있기도 한 분이에요. 이 책은 그 분이 남기신 많지 않은 육성들 중에서 발췌해 놓은 이야기들이에요. 이 속에 선생님이 직접 그리신 ‘의인란’이라고 하는 사람의 얼굴을 한 난초 그림들을 비롯해서 이 분의 서예작품들도 소개되어 있는 그런 책입니다. 특히 책 제목에서도 시사하는 것처럼, 내 속에 네가 있고, 네 속에 내가 있고, 우주 만물 어느 하나도 형제 아닌 것이 없다고 하는 생각을 우리들에게 참 쉬운 말로, 또 당신의 존재와 삶으로 잘 보여주셨던 거룩하기도 하셨던 분이거든요. 그래서 우리시대에, 특히 이념의 시대가 끝났다고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 소외된 사람들, 또 나 자신에 관해서 내가 잘 알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혼돈스러워 하면서 사는 많은 젊은 사람들에게 이 할아버지가 해주시는 이야기. 절대로 낡아빠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오늘 우리에게 내 안에 있어야 할 진정한 내 스스로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책일 거예요.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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