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

[스크랩] 부드러움으로 이룬 소박한 멋(운곡 김동연 선생의 작품세계)

함백산방 2010. 12. 28. 19:32


                     부드러움으로 이룬 소박한 멋


  노자 28장 반박(反朴)편에는 소박한 도에 관한 말이 있다. “남성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성적인 겸허와 유약함을 지키면 천하의 물을 모아 흐르게 하는 골짜기와 같이 될 수가 있다.” 노자는 여기에서 강하고 날카로운 것 보다는 유약해보이거나 둥근 것, 무딘 것이 오히려 더 오래가고 안 꺽인다는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 즉 아래를 향해있는 계곡은 결과적으로 모든 물을 끌어서 흐르게 하는 존재가 되고, 어린아이와 같이 소박해져서 높은 자리를 영원토록 보존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위에서 노자가 말한 것처럼 운곡(雲谷) 김동연(金東淵) 선생의 작품세계는 한 마디로 ‘부드러움으로 이룬 소박한 아름다움의 세계’라고 말하고 싶다. 한글과 예서의 부드러운 원필속에 굳건한 중봉필의가 담겨있는 선생의 작품에는 아래로 향한 계곡처럼 자신을 낮추고 겸양해 온 인생관과 근본을 중시해 온 예술관이 하나로 어울려 있다.

 

  운곡선생은 현재 청주예총회장으로서 청주예술인들의 꿈과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도 하루도 붓을 놓은적이 없는 노력형의 작가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동안 선생이 걸어온 붓길을 따라 가면서 작품과 작가의 삶속에 나타난 부드러움의 연원에 대해 서 추적해 보고자 한다.


청주에서 현대적인 서예교육의 씨앗을 뿌리면서


 운곡 선생은 1948년 충남 연기군 서면 청나리에서 춘부장이신 김학래(현재 93세)씨와 자당이신 황복남씨의 4남매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처음 글씨를 시작한 시점은 서면에 소재한 쌍류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할 때였다. 그 당시 담임선생님이었던  안춘희 선생님은 군내에서 필명을 날리시던 분이었는데 집에서 외숙의 글씨재주를 어께너머로 배운 어린솜씨를 보고 “일주일만 쓰면 나를 ?i아 오겠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린 학동의 필재를 눈여겨 본 담임선생님의 말 한 마디는 붓을 쥔 소년의 손에 더욱 힘을 실어준 계기가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소년명필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글씨에 관심이 많았던 선생은 조치원중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미술선생의 눈에 띄어 환경정리를 도맡아 했고, 학교에서 수여하는 상장쓰기도 당연히 그의 몫이 되었다.

 

 그러나 조치원상고에 진학하면서 예술과 무관한 학과수업이 적성에 맞지 않아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고민을 간파한 사람은 국어선생이셨다. 그는 어린 제자가 예술방면에 탁월한 기능을 가졌고, 앞으로 서예가로서의 가능성을 알았는지 항상 ‘김선비’라고 부르면서 격려해 주었다. 그러면서 청주에서 유명하였던 서예가 금기풍선생을 소개해 주었다. 선생은 단숨에 금기풍선생을 찾아뵙고 궁금한 것들을 묻게 되면서 평생동안 서예가의 길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다지게 된다.

 

 68년 청주대학교 행정과에 입학하면서 서예에 대한 열정은 더욱 구체화된다. 대학생 신분으로 청주에서 최초로 71년 해동연서회라는 사설강습회를 결성하고 회원들을 지도하게 된다. 또한 청주대학교 서도연구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을 맡으면서 학교내에 서예연구열기를 움트게 하였다. 이를 통해 전윤성, 연민호, 송인도씨 등이 배출되었다. 서예가의 길을 가고자 하는 열망은 군대시절에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6월에 바로 군에 입대하였는데 보안사 인사과에서 3년 동안 근무하면서 상훈작성을 전담하였다. 제대를 하면서 공채를 통해 청주대학교 교무과에 입사해서 낮에는 학교에서 일하고 밤에는 서실에서 원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70년대 후반부터 선생의 필명이 지역사회에 각인되기 시작하자 대학교로부터 출강의뢰가 들어와 여러 학교에 출강하기 시작한다. 78년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과에 서예강사로 출강을 시작한 이래로, 80년 목원대 국문과, 83년 대전대 국문과, 89년 공군사관학교 등에 출강하였고, 현재도 서원대학교와 청주대학교에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선생은 71년 처음 청주에서 서실을 시작한 뒤 군에서 제대한 후 서실을 확대하여 76년 사회단체로 만들었고, 77년 본격적으로 서예학원을 설립하여 지도하게 된다. 그러면서 80년대 이후 전업으로 서예만 지도하고 연구하기 시작하면서도 주경야독하여 89년 청주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한다.  76년경 1회 충북도전이 출범하자 운영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기초를 놓았다.  금년에 충북도전이 30회가 되어가니 선생이 청주에서 서예연구와 지도를 한 것도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장구한 세월이다. 따라서 현대 충북서예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본 증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선생은 현대 청주서예의 씨앗을 뿌리는데 일조하였다.



안진경과 조전비를 통해 작품의 기틀을 확립


 이제 선생이 이룩한 부드러움으로 빚어낸 소박한 작품 양식을 한 계단씩 살펴보기로 한다. 처음 입문할 때 마을 서당에서 유기준이라는 훈장님의 글씨본으로 공부하면서 선생의 서예역정은 시작된다. 법첩이 귀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정주상선생의 글씨본을 구하여 부지런히 임서하였다. 한글은 이철경선생의 글씨본으로 공부하다 중학교 때 일중선생의 글씨본을 많이 임서하였다. 고등학교 때는 금기풍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법첩을 임서하라는 권유로 예서 조전비를 임서하였다.

 

 그러다 68년 대학 1학년 방학 때 서울의 동방연서회 특강을 1개월 수강하였는데 이 강좌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당나라 이전의 글씨를 많이 임서하는 것이 자신의 글씨를 형성하는데 좋다는 가르침으로 인해 이 때부터 고전자료를 구해 부지런히 임서하기 시작하였다. 

 

 한문서예에서 안진경은 선생의 글씨를 만들어 준 골격에 해당한다. 안진경의 <안근례비>를 통해 해서의 기본을 익히고 <삼고>를 통해 행서의 여유를 터득하였다.

 

 한글서예에서는 일중 김충현선생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일중선생의 궁체는 선생의  한글글씨를 형성하는 뼈대가 되었다. 한글고체에서는 여초선생의 원필과 일중선생의 글씨에 뿌리를 두고 광개토대왕비와 접목한 선생 특유의 양식을 만들었다.

 

 행초서는 안진경과 손과정의 서보에서 기본을 다졌고, 예서는 한대 팔분을 통해 득력하였다. 특히 조전비는 애정과 관심이 많은 법첩이다. 그것은 부드러움과 중봉필의가 내함되어 있어 자칫 여성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움 보다 유함이 있고, 무엇보다 느긋한 여유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75년부터 국전에 출품하기 시작하면서 5번의 입선과 84, 85년 미술대전 특선을 하면서 초대작가로 등단한다. 75년 한문 예서로 첫입선을 한 작품 <임조전비>(그림 1)는 조전비 전문을 임서한 작품이다. 84년 미술대전에서 특선한 작품 <백마강가(白馬江歌)>(그림 2)는 일중선생의 필의를 살린 한글궁체 흘림으로 한글작가로 이름을 올린 역작이다. 85년부터 기외묵림회 그룹전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96년에 발표한 <추일범주(秋日泛舟)>(그림 3)는 안진경의 해서 필의가 남아있는 작품이다. 96년 한중일전에 발표한 작품 <애련설>(그림 4)은 한글과 한문을 섞어서 쓴 혼서체로 선생의 개성이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러한 서풍의 변화는 97년 한중교류전에 발표한 <송강선생 시조>(그림 5)에서 분명히 보여진다. 한글고체와 한문을 병서한 작품으로 두가지 서체를 이렇게 잘 어울리게 구사하기는 쉽지 않은데 주객을 살린 이런류의 작품들을 많이 발표하고 있다. 98년 청주제주전에서 발표한 작품 <곡즉전>(그림 6)에서는 한글서체를 한문 행서처럼 강약과 태세 및 흐름을 살려내고 있다. 이런 한글서풍은 선생의 개성이 담긴 것으로 보여진다. 98년 발표한 해서작품 <퇴계선생 시>(그림 7)는 부드러움의 미학이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2003년 발표한 <두시>(그림 8)는 확연한 개성이 담긴 작품이다. 삐침고 파임획에서는 예서의 골격이 남아있고 전체적으로는 원필의 유려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2004년 기외묵림초대전에 발표한 작품(그림 9)에서는 작가의 특장인 한문 예서와 한글 흘림을 조화시켜 독창적인 양식을 선 보이고 있다. 같은해 발표한 <홍강리시>(그림 10)는 한글고체의 독창적인 개성이 담긴 작품이다. 같은해 발표해 중국 길림성에 세워진 금석물은(그림 11) 조전비를 바탕으로 한 선생 특유의 양식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2001년 발표된 <편지>(그림 12)는 선생의 한글양식을 대변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작품은 산동성 화보지에 크게 소개된 바도 있는데 판본고체와 낙관한 흘림체에서 한글의 독자적인 세계를 열어보이고 있다.

    

 총체적으로 보면, 선생의 작품은 한글이든 한문이든 방필의 모가 나서 외형적인 힘을 강조하는 양식보다 속으로 힘이 가득하나 밖으로는 부드러워 보이는 원필의 부드러운 양식이 지배적이다. 이는 자연스럽고 인위적인 꾸밈을 싫어하는 선생의 성정과도 일치하고 있다. 이것은 작품의 양식에서도 2000년 이후에 두드러지고 있다. 한문과 한글을 자유자재로 섞어서 구사하거나 한글은 고체와 흘림에서, 한문은 예서를 바탕으로 분명히 개성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에 와서는 곱기보다 무뚝뚝하고 둔탁한 옛사람의 글씨가 더 깊은 매력을 준다고 한다. 그리하여 갑골문과 금문의 장점을 취합하고 한글에서는 편지글 형식의 자유분방한 글씨들을 즐겨 임서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앞으로 전개될 선생의 작품양식도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다.


뭉게구름이 수놓는 하늘처럼 소박한 세계를 꿈꾸며


 선생의 호는 운곡(雲谷)이다. 이 호는 68년 대학 학년 때 청서동인회를 결성했을 당시 대전에서 첫 전시를 하면서 스스로 자호한 것이다. 시골에서 여름날 하늘을 바라보면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각양각색의 하늘 모양을 만들어 내는데 그 하늘의 아름다운 모양과 같은 예술적 삶과 작품을 만들겠노라는 소박한 꿈으로 자호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선생이 자호한 것처럼 자연이 좋아서 자연을 벗삼고 자연스러운 작품을 제작한다는 의지로 일관해 온 작가의 삶이 부드러움을 거쳐 소박한 자연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현재까지 선생이 휘호한 금석물과 현판류는 150점이 넘는다. 한 점 한 점 정성을 모아 휘호한 역작으로 이러한 작품들을 모아 곧 출간할 예정이다. 이렇게 다작을 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충북대표로 나갈 정도로 국궁을 한 체력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선생의 현재의 꿈은 “무심천에서 우암산으로 솟는 무지개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청주 예술인들이 화합하여 시민들에게 무지개와 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다는 예총회장으로서의 꿈일 것이다. 서예가로서 견지해 온 좌우명은 “죽는날까지 부지런히 붓을 들고 자신의 생각을 쌓아나가면  반드시 하나의 작은 산을 이룰 수 있다”는 화두이다. “서예는 끝없이 자신을 다듬는 길이며 시대가 달라져도 유행이 바뀌어도 항상 그 자리에 있을 뿐”이라는 선생의 말이 청주를 벗어나도 귓속에 남아서 조용히 메아리친다.



삼도헌 동창아래에서 정태수

 

 



서실에서 작업에 몰두하는 운곡 김동연 선생


 

그림 7 <퇴계선생시>


 



그림 10 <홍강리시>

 

 

그림 11 <금석물 비원비>작품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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