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

[스크랩] 서예는 화선지 위에 수놓은 정신의 결정체(창석 김창동님의 서예세계)

함백산방 2010. 12. 28. 19:31
 

작가세계/16 창석 김창동


서예는 화선지 위에 수놓은 정신의 결정체


 “한번 세상에 나오면 만년을 살아야 한다. 만년 동안 이름을 날리려면 돌과 같이 묵직한 무게를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창석(菖石) 김창동(金昌東)선생의 호를 지어준 그의 아버지(顧堂 金奎泰)께서 ‘창석’이란 호를 내리면서 남긴 말이다. 그의 아버지는 전통서당을 운영하면서 많은 문도를 길러낼 정도로 박식하셨고 자식교육에 철저하였다.

 

 창석선생은 1947년 전남구례에서 고당선생의 7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문장명필이었던 부친이 운영하던 서당에서 5살부터 사자소학과 서예를 가학으로 시작하였다. 어릴적부터 한문과 서예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고당선생은 신교육보다 서당교육을 받게 하였다. 18세에 이르자 가학을 이어받기 위해 한문서예를 배우게 되었다. 고당선생은 효자와 충신의 글을 써야한다고 말하면서 안진경의 글씨를 열심히 익히도록 지도하였다. 안진경의 <쌍학명>이란 법첩을 모서리가 닳도록 임서하였고, 한문은 소학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고당선생의 무릎앞에서 시작한 이 방면의 공부는 오늘날 선생의 서예세계를 형성하는 든든한 주춧돌이 되었고, 훗날 서예가의 길을 걷게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가학으로 한문과 서예를 공부하던 어느날, 고당선생은 선생을 불러 이제 군(郡)에서 도(道)로 나아가 공부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하면서 부모곁을 떠나 광주의 송곡 안규동선생의 문하에 입문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송곡선생의 문하에서 상무로 근무하면서 비로소 행초서를 익혀나가기 시작하였다. 왕희지척독전집 등 여러 권의 법첩을 밤낮없이 임서하였다. 4년동안 부지런히 공부한 결과 어느 정도 법첩속 명가들의 글씨와 흡사하게 임서해 낼 수 있었다.

 

군에서 수도에 이르기 까지의 학서과정

 

 고당선생은 다시 선생을 불러 도(道)에서 수도(首都)로 자식을 보냈다. 서울로 가라는 부친의 가르침을 따라 서울의 일중선생 문하에서 24살부터 본격적인 작가수련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때 초정 권창륜씨 등과 동문수학하였다. 서울에서 당시 왕성하게 활동하던 소전선생, 검여선생,  백아선생 등을 만나뵙게 되었고, 월당 홍진표선생에게서 한문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 때에도 법첩은 선생의 손을 떠나지 않았는데 주로 안진경의 해서는 안진경의 <안근례비>, 행서는 안진경의 <삼고>, 초서는 손과정의 <서보>, 예서는 <예기비>와 <사신비> 등을 익혔다.

 

 일중선생은 “내가 스승이 아니라 법첩이 자네의 스승이다”라고 말하면서 황산곡, 미불, 유석암, 등 다양한 중국명가들의 글씨까지 배워나가도록 눈을 열어 주었다. 이렇게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6-7년을 보내고 나자 조금씩 서예를 통해 예술적 안목이 축적되어 갔다.

 

 70년대 후반경 교학상장(敎學相長)이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길임을 깨닫고 조계사옆에서 정예서예원을 개원하였다. 선생의 실력이 알려지자 여러곳에서 서예강사를 맡아달라는 요청에 의해 출강을 하였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이 시기에 출강보다 오히려 더 열심히 고전에 매달려였어야 했었고 한문공부도 더 깊이 못한것에 대해 아쉬움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공모전에 출품하여 국전 10번의 입선과 미술대전 두 번의 특선으로 초대작가가 되었다. 그 뒤 역촌동 예일여고 앞에서 13년, 서초동에서 10년의 지도경험을 바탕으로 인사동에서 2년전부터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다. 


안진경과 한예(漢隷)속에서 얻은 둥글고 자연스런 필세

 

 선생이 좋아하는 글씨는 해서에서 안진경의 근례비, 행서에서 안진경의 쟁좌위, 예서에서 사신비 등의 한예, 초서에서 장욱의 글씨이다. 학서과정을 통해 익힌 일중선생의 예서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서풍을 만들기 위해 요즘도 대만역사박물관을 방문하거나 북경의 현판들을 둘러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글씨에 대해 “자연을 보고 느끼는 것이 좋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자주 등산을 한다. 선생은 바로 기이함보다는 미묘하고 은근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일찍이 손과정이 <서보>에서 “기이함을 숭상하는 선비는 결체(結體)와 필세(筆勢)의 다양함을 좋아하고, 미묘함을 궁구하고 연구하는 사람은 운필의 변화추이의 오묘하고 깊은 비밀을 얻는다”라고 말하였듯이 자연을 통해 구도자의 자세로 서예의 오묘한 비밀을 깨닫고자 한 노력의 일단인 것이다.

 

 따라서 선생의 이러한 내면세계가 녹아있는 작품의 양식적 특징은 천연스런 분위기와 자연스러운 운필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즉 법에서 떠나 붓에 마음을 맡겨 서사하되 날카로운 직선보다 부드러운 곡선을 선호하는 편이다. 특히 최근에 심취하고 있는 초서를 통해 손과정이 말한 “문득 힘들여 쓰다 마음내키는 대로 써서 치달린다”는 의경의 전달에 주력하고 있다.

 

 시기별로 작품을 일별해 보면,  70년대 학서기와 국전시대를 거쳐 개인전을 개최한다. 80년대 초 발표한 <격물치지>(그림 1)는 아직 일중선생의 서풍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81년 미술대전에 발표한 예서대련(그림 2)과 83년 발표한 예서대련(그림 3)에서도 뚜렷한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초기 발표한 예서자형은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히 반영한 흔적이 있지만 공모전을 마친 뒤부터 분명 변화의 싹이 드러난다. 88년 발표한 행초작품 <퇴계선생시>(그림 4)에서는 왕희지를 기본으로 하면서 약간의 변화를 모색한 흔적이 보인다.

 

 90년대에 이르면 예서작품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일어난다. <태극도설>(그림 5)에서는 광개토대왕비를 근간으로 한 역작을 선보이고 있다. 96년 배세토전에 발표한 <고백행>(그림 6)은 자형이 안정되고 필세가 원필이면서 안온한 느낌을 자아낸다. 97년 발표한 행초작품 <방장산가>(그림 7)는 부드러우면서 유려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98년 발표한 <선고시>(그림 8)는 여유있는 점획으로 넉넉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낙관을 할 때 여승(汝承)이라고 한 것은 부친의 뜻을 잇는다는 선생의 효심을 담겨 있다. 작품의 소제도 대부분 부친이 직접 지은 시구이다. 이렇듯이 효심으로 부모를 현양시키려는 마음이 작품 곳곳에 가득하다. 

 

2000년대 이후에 행초를 집중적으로 발표하지만 예서도 선생의 조형시각이 반영된 작품이 나타난다. 2000년 <고인구>(그림 9)에서는 지금까지의 고운 예서와는 달리 표정이 없는 듯 하면서도 개성이 드러나는 예서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같은해 발표한 <선고시>(그림 10)에서는 딱딱한 붓맛을 더 강조하고 있다. 2004년 발표한 초서작품은(그림 11) 지금까지 오체를 두루 익힌 서예역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할까. 물흐는 듯 하면서도 대소강약이 살아있는 농익은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의 서예는 예서와 행초를 바탕으로 골과 운을 엮어왔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훈을 잊지않기 위해 거의 대부분의 작품을 부친의 시로 발표하였다. 보기 드문 유가로서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마지막이다”는 경구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연을 통해 서예를 생각하고 서예속에 자연을 옮겨놓으려는 노장적 사고도 은근히 반영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서예밖에서도 서예를 생각하며

 

 선생의 취미는 수석과 문방사우 수집, 그리고 바둑이다. 한국기원에 출강하면서 프로기사를 지도한 탓인지 선생의 바둑실력은 서예계에서 인정한다. 아마 6단인 바둑실력으로 반상을 응시하듯 화선지 위에 장법을 구상한다고 한다.

 

 제자들에게도 항상 굳세고 둥글고 건강한 글씨는 한문을 많이 읽고, 글속에 담긴 내용과 정신까지 닮아야한다고 강조한다. 서예를 등산에 비교하면, 등산을 할 때 처음 기본적인 장비가 필요하듯 익숙해지면 스스로 올라가야 된다고 말한다. 입문과정에서 성실히 법첩을 익힌 뒤 법첩을 떠나 자신만의 글씨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서노(書奴)가 되어서는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자연을 통해 글씨를 배우되 글씨는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품은 뜻을 붓으로 내려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선생은 제자들에게 서외구서(글씨 밖에서 글씨를 구함)하라는 차원에서  말타고 연극보기도 적극적으로 권한다.


 또한 재료에 관한 연구를 위해 전문수집가를 능가할 정도로 많은 양의 벼루와 붓을 수집하고 있다. 지금껏 500점 이상의 벼루를 모았고, 2000점 이상의 붓을 수장하고 있다. 언젠가 고향인 구례에 서예박물관을 짓고 그 동안 수집한 재료와 고당선생이 남긴 묵적 1000여점을 전시할 예정이다. 작년말 고당선생의 유묵집 1500부을 찍어 전국의 대학과 공공도서관에 1000부를  기증하였다. 현재 고당선생의 손때가 묻은 서당과 영정각, 문집초고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서당옆에 고당선생 문예관을 추진중이다. 원래 고당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9000권의 책 가운데 유실된 것을 제외하고 현재 남아있는 2000여권의 책도 서예관을 지으면 그 곳에 보관될 계획이다.

 

 앞으로 선생은 이 책 저책에서 욕심만 부리는 공부를 지양하고 좀 더 세밀하게 법첩과 자연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작품을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짐한다. 게다가 한시를 많이 읽음으로써 글감의 폭도 넓히고 싶다고 한다. 주일무적, 일이관지(하나로써 모든 것을 꿰뚫는다) 등의 좌우명으로 오직 서예속에 묻혀 지낸 지 어언 30년이 넘는 세월. 지난 10년 동안 전국각지에서 선친의 작품을 모아 책으로 발간하는 효심을 보여준 선생은 곧 우리에게 정성이 담긴 작품을 보여줄 것이다.  

 

 창석서실을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한 선생의 말씀이 귀속에 남아있다.  “노인의 말을 존경해야 합니다. 노인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경험을 배워야 하고, 선배는 후배들을 정말 도와야 합니다. 후배들이 학문을 겸비한 서예가의 길을 가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후배들은 이론과 실기를 병행해서 국제사회에 우리의 전통예술인 서예를 활성화시켜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평생 동안 해 온 서예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선생은 “글씨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바르게 가져야 정신의 세계가 집중되고, 정신이 모아져야 손의 표현이 가능해 집니다. 정신의 세계가 형상화 된 예술이 바로 서예라고 생각합니다...”

 

글씨는 곧 ‘그 사람의 정신’이라는 창석선생의 말이 아직까지 가슴에 쟁쟁하게 남아있다.


삼도헌 동창아래서 서설을 바라보며 정태수(본 카페지기)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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