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

[스크랩] 가슴속에 대나무를 키우는 문인화가/청오 채희규님의 작품세계

함백산방 2010. 12. 28. 19:30
 

날마다 마음속에 대나무를 키우는 문인화가


  40년 가까이 교육일선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묵향의 은은함에 이끌려 문인화를 그려온 청오 채희규선생은 자신만의 뚜렷한 문인화관을 가지고 있다. “문인화는 물상(物象)의 모습[華]과 본성[實]을 함께 파악해야지 화려한 겉모습을 그리는 그림이 아닙니다. 문인화는 바로 겉모습이 아닌 사물의 내면을 관조한 뒤 그것을 획으로 표현하는 그림입니다. 따라서 ‘한 획은 모든 획의 근본이 되며, 온갖 형상을 그리는 근원이 된다’ 는 석도의 말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선생은 서예적인 필획과 오랜 수련을 거쳐야 비로소 사의적인 문인화를 그릴 수 있는데 용필법과 용묵법은 문인화 수련의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단단하게 다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40년 화업 가운데 대부분을 서예적인 옹골찬 필력의 연마에 투자하였고, 국외의 최신 화풍연구에도 눈과 귀를 열어두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석도의 ‘일획론’은 그의 작품제작에 많은 자양분을 제공하였다. 우리는 현재 한국문인화협회 부이사장이자 미협 문인화분과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선생의 문인화세계를 살펴보기 위해 7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오선생은 1933년 4월 29일 경북 문경시 산양면 현리에서 채상식씨와 이신촌씨의 사이에서 2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고향에서 마치고 외가에 기거하면서 중학교를  수료한 뒤 1950년 대구사범 본과에 입학을 하였고, 1954년 3월에 본과 3학년을 졸업했다. 그 해 3월부터 모교인 문경소재 삼북초등학교에서 7년동안 교편을 잡은 이래로 점촌초등학교에서 12년, 대구산격초등학교에서 3년, 대봉초등학교에서 3년, 다사초등학교에서 3년, 서제초등학교에서 4년 동안 근무하였으니 모두 36년간 교사로 봉직하였다. 특히 대봉초등학교에 근무하던 70년대 중반에 일요연묵회를 조직하여 학부형과 교사들에게 문인화를 지도하기 시작하면서 교학상장의 긴 예술장정이 시작된다.


고신첩을 쓰던 입문기

 선생이 처음 붓을 잡은 때는 담임선생님의 칭찬과 자극으로 환경정리를 도맡았던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집안에서는 대대로 지필묵을 가까이 하는 가풍이 있어서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글쓰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익히고 있었다. 그렇게 움튼 서예에 대한 열망은 1973년 교사로서 대구시로 전입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붓을 잡은 배경이 되었다.  송재 도리석선생의 문하에서 3년 동안 안진경의 <쌍학명>부터 <고신첩>, <안근례비>, <삼고>에 이르기까지 여러법첩들을 익혀나가기 시작하였다. 학교에서 퇴근한 뒤 밤 11시가 넘을때 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붓질을 하였다. 심지어 장티프스에 걸렸던 때도 쉬지 않고 수련하였다. 서예적인 필획에 대한 자신감이 붙자 하고 싶었던 문인화를 시작하였다.


문인화로 예술의 좌표를 바꾸면서

 1975년부터 천석 박근술선생의 문하에서 체계적인 문인화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당시 천석선생의 나이가 제자인 선생보다 적었던 관계로 별방에서 지도를 받았는데 난초만 3년 동안 치는 연습을 거듭 하였다. 오후 6시부터 11시까지 날마다 화선지 3절지 200매를 소화한 뒤 귀가하였다. 이러한 연마는 일요일을 제외한 6일 동안 계속되었다. 필방주인의 회고에 의하면 서실에 아예 수백장의 화선지를 미리 가져다 놓을 정도였다니 얼마나 부지런히 먹을 갈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다 천석선생이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대구와 서울을 왕래하면서 대나무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수련의 강도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이 시기에 동강, 학남, 일중선생 등을 역방하고 모르는 것들을 질문하게 되었다. 이런 노력덕분에 1980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하였고, 1995년 공모전을 마감하면서 특선1번과 입선 9번의 입상실적을 쌓았다. 그 사이에 틈틈이 그려둔 작품들을 모아 1990년 3월 태백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대구선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95년 2월에 동아쇼핑 동아미술관에서 세 번째 개인전을, 같은해 5월에 구미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네 번째 개인전을 하였다.

 

 그의 문인화는 화풍상 국내에서는 천석선생과 죽농선생의 화풍을 모태로 하였고, 국외에서는 정섭과 석도 및 포화의 영향을 받았다. 판교의 정치함과 석도의 함축미, 팔대산인의 여백미를 습득하였다고 보여진다. 특히 대나무 그림에 관심과 필력을 집중해 왔다. 평소에 획을 긋는 기분으로 댓잎을 치고, 그린다는 생각보다 댓잎을 통해 기운생동함을 우선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그림은 기운생동이 중시되고, 기초가 없는 맹목적인 추상에 가까운 그림보다 사실적 재현능력을 바탕으로 한 사의화가 본령을 이루고 있다. 또한 여백과 함축이 중시되는 화면에 농묵보다 은은한 담채를 사용하는 경향이 짙다. 입문하면서부터 기본적인 데생능력을 기르기 위해 수백권의 크로키노트와 묵필소묘노트를 소비하기도 하였다. “이런 노력덕분에 오늘 이정도라도 하고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는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니 ‘예술가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다’는 말을 되새기게 된다.


 대나무에서 득력한 필세

 지금까지 제작해 온 작품양식을 일별해 보면, 역시 대나무 작품이 가장 많다. 1979년 제작한 묵죽(그림 1)은 잎 사이가 성글고 어색한 감이 없지 않지만 획질은 굳세다. 1986년 공모전에 한창 출품하던 시기의 풍죽(그림 2)은 농담과 소소밀밀(疎疎密密)이 표현되어 있다. 1988년 8폭의 병풍으로 제작된 묵매도(그림 3)는 그 동안 수련한 사군자의 세련미와 운필효과가 고스란히 드러난 작품이다. 90년을 넘어서면서 대나무 그림에서는 풍요로움이 나타난다. 1991년의 풍죽(그림 4)에서는 이전과는 다르게 많은 잎들을 중첩시켜서 주(主)와 객(客)을 분명히 하고 한결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1992년 2회 개인전에서 선보인 묵난(그림 5)은 천석선생의 그림 위에 선생의 개성이 첨가된 느낌이다. 같은 전시에서 보인 채색된 국화(그림 6)도 능숙함이 엿보인다. 1995년 3회 개인전에서 발표된 매화(그림 7)는 가지와 줄기에서 역시 개성이 드러난다. 같은해 4회 개인전에서 발표한 국화(그림 8)는 선생의 작업에서 하나의 패턴화를 이루고 있다. 선생의 양식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90년대 후반부터는 사군자 위주의 작품경향에서 다양한 화목들로 확산되고 있다. 1999년 발표된 연꽃(그림 9)에서는 사군자에서 익힌 활달한 필력이 바탕이 되어 일필휘지로 그려내면서도 연꽃의 고아한 분위기는 살려내고 있다. 2000년을 넘어서면서부터 선생의 문인화는 독창적인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2000년에 발표한 등나무(그림 10)는 서예적인 필력과 문인화의 골간을 이루는 여백미가 살아있는 작품이다. 2003년의 수련(그림 11)은 사의성이 강조된 작품으로 꿈꾸는 듯한 수련의 자태를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다시 2004년에 발표된 풍죽(그림 12)을 보면 원숙함과 여유로움이 물씬 드러나는 독특한 분위기가 드러난다. 바로 선생의 개성이 담긴 대나무 그림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선생의 작품은 초기 사군자를 위주로 발표하면서도 유독 대나무 그림에 심취했고, 천석선생의 작풍에서 서서히 독자적인 화풍을 일궈나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여러 화목으로 표현영역을 넓혀왔고, 최근에는 사군자화도 새로운 분위기와 힘찬 붓질로 여유와 함축과 여백이 있는 개성적인 자신의 화풍을 선보이고 있다. 


털끝과 세상

 선생의 좌우명은 수신위본(修身爲本)이다. 가족과 주변을 교화해 나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수양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가훈은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매사진선(每事盡善)이라는 구절 위에 선생자신이 몇 마디를 더 넣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마음은 평안하고 신체는 건강하고 뜻은 굳건하게 해서 매사에 최선을 다하라” 즉 모든 일에 자신이 가진 역량을 다할 때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또한 교육자로서 반편생을 보내면서 ‘예술을 즐기면 늙어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배우고 익힌 것은 반드시 후학들에게 안내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 시서화를 아울러야 전통적인 문인화에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글씨와 그림 외에 시문을 읽는 일에도 촌음을 아끼지 않는다. 교육자로서의 철학과 선비의 풍모가 담긴 개성적인 문인화 작품은 바로 자신에게 철저하고 남에게 관대한 삶의 도(道)에서 비롯된 것이다.  

 

 필자는 선생과 인터뷰를 하면서 문득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털끝과 세상’이란 글귀가 생각났다. 가을이 되면 짐승들에게 새 털이 나온다. 가을털이란 이 때 여린털을 말한다. 태산은 중국의 산동성에 있는 유명한 산을 말한다. 90년대 초에 그 산에 올라가본적이 있지만 이산이 그렇게 유명한 것은 높이 때문이 아니다. 도(道)는 절대로 커서 그 밖이 없고(至大無外), 절대로 작아서 그 안이 없다(至小無內). 이를 각각 대일(大一), 대소(大小)라고 말한다. 도는 가장 큰 것 보다 더 크고, 가장 작은 것 보다 더 작다는 뜻이다. 이런 명제로 보면, 세상에서 아무리 큰 것도 이렇게 무한히 큰 도에 비하면 무한히 작고, 세상에서 아무리 작은 것도 이렇게 무한히 작은 도에 비하면 무한히 크다. 따라서 털끝이 세상보다 클수도 있고, 태산이 털끝보다 작을 수 있다. 무한히 작은 도에서 본 털끝은 무한히 크고, 무한히 큰 도에서 본 태산은 무한히 작기 때문이다. 사물을 관조하고 거기에 작가의 내면을 의탁해서 일체가 되었을 때 무한히 작은 것도 가장 크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오랜 명상을 한 뒤 일순간에 붓을 들어 휘호한다는 선생의 모습 또한 바로 허심의 도적(道的) 경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2005년 가을경에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2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일 대형전시를 준비하고 있는 선생은 한 세대 가깝게 생각해온 작품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마음속에 키워왔던 대나무들을 그대로 화면위에 옮기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4-5년 뒤에는 어느 사찰에 지금까지 공들여 만든 작품과 자료를 기증하여 개인미술관을 개관할 예정이다. 오늘도 가슴속에 대나무를 키우고 있는 선생의 순수한 뜻이 후진들에게 전해질 그 날을 고대한다.


2004년 늦가을에 삼도헌에서 정태수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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