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

[스크랩] 이 모든것은 꿈이다(포헌 황석봉님의 서예세계)

함백산방 2010. 12. 28. 19:30
 

작가의 세계12 / 포헌 황석봉


이 모든 것은 꿈이다


 평면적인 서예작품에 입체적인 양감을 도입하고, 문방사우의 고정화된 재료와 문자라는 표현의 제약을 벗어나 늘 자유롭게 무엇이든 표현하려는 작가, 그가 바로 포헌(浦軒) 황석봉(黃晳捧)선생이다. 선생은 캔버스에 아크릴을 사용한다든지 붓대신 나이프를 사용하여 재료와 문자의 제약에 갇혀 드러내놓고 싶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선명하게 드러내지 못한 전통서예에서 한걸음 앞서서 자신의 조형을 파격적인 방법으로 발표하는 현대서예의 선구자이다. 문자가 지닌 점획의 표현과 용필의 효과에서 오는 임의성을 중요시하는 일반적인 서예의 심미범주에서 일탈된 선생의 표현기법은 분명 한국현대서단에서 전통을 묵수적으로 추종하는 작가와는 다르다. 그리하여 선생을 지칭하는 이름도 여럿이다. 현대서예가, 조형서예가, 기아티스트... 필자는 이러한 선생의 작품세계를 살펴보고자 작업실을 찾았다.

 

 늦더위가 마지막 심술을 부리는 팔월 말에 광명역에서 내려 택시로 30여분 남짓 달려가자 안양 인덕원역 옆에 자리하고 있는 선생의 작업실이 나타났다. 마침 전국의 문하생들의 모임인 묵기(墨氣)회 회원들이 모여 가든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선생의 소박한 모습대로 가정집을 방방마다 개조하여 작업실로 사용하고, 마당엔 오죽을 심어 놓았는데 ‘황석봉아뜨리에’라는 대문위의 현판으로 여기가 작업실임을 알게된다. 늦여름 햇살이 스며드는 아뜨리에 정원의 평상에 앉아서 선생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작품에 대한 생각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정:서예입문은 언제쯤 하셨습니까?

황: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골수염을 앓았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학교에 다니기가 어려워지자 서당선생님을 초빙하여 집에서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년간 사서삼경을 읽고 글씨를 배웠는데 이것이 서예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상급학교는 서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누님댁에 기거하면서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중등학교를 그렇게 보내고 성균관대 도서관학과에서 서지학을 전공하면서 어릴적에 만졌던 먹에 대한 깊은 향수가 살아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70년 대학생 신분으로 학남 정환섭 선생님의 문하에 정식으로 입문하였습니다. 20대 초반에 입문한 이후 재학시절에 장서각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는데 장서각에 소장된 이왕가의 장서 30만권을 읽고 연대와  저자를 밝히는 목록을 작성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고문헌과 가까워지고 자연스럽게 먹의 정서가 살아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정:대학을 마친 뒤 직장생활을 하시면서 서예를 병행할 수 있었습니까?

황:대학 졸업후 정식공무원으로 특채(5급 갑)되어 2-3년간 사서로 근무하였습니다. 그 당시 사서직은 사무관까지 연도만 충족되면 승진이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뺏겨 저녁시간에도 글을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을 그만두고 기아산업 인사과에 입사하여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직장에서도 마음대로 서예에 전념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5-6년의 직장생활은 그래서 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 시점이 결혼 후 2개월 뒤이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흔쾌히 내뜻을 수용해 주었습니다.


정:서예를 전업으로 하게된 과정을 말씀해 주시지요?

황:대학시절부터 국전에 응모하기 시작해서 6번 입선과 2번의 낙선을 하였고, 2번은 직장관계로 출품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둘 생각을 하였고 1980년 결혼 후 신촌로타리에 서실을 열게되었습니다. 그러나 경험부족과 공부부족으로 6개월 뒤 압구정으로 이전을 하였습니다. 압구정에서 3년 동안 서실을 하면서 그럭저럭 운영을 해 왔으나 수십명의 원생들을 돌보다 보니 자신의 공부가 소홀해짐을 느꼈습니다. 마침 1984년 동경문화원초대전도 있고해서 서실을 그만두고 작품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작품제작에 전념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전업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정:선생님의 작품양식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죠. 80년대 초기에 갈골문이나 상형성이 있는 금문류의 작품은 생소한 듯 합니다.

황:그렇습니다. 국전시절의 작품패턴은 몇 가지로 한정되어 있었는데 저는 청년시절 공부하면서 국전에 출품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미술대전이 시작되면서부터 규격화된 작품을 출품하기 싫었습니다. 낙선을 각오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 본 것입니다. 82년 미술대전에 <월색한강(月色寒岡)>(그림1)을 출품하였는데 날카로운 갑골의 특징과 비균제적인 조형의지를 담으려고 애썼습니다. 82, 83, 84년에 연3회 특선을 하면서 초대작가 자격은 갖추었지만 나이가 35세가 되지 않은 관계로 규정상 초대작가등단은 미루어졌습니다. 아무튼 국전시기는 기초공부에 충실을 기했다면, 미술대전을 마친 이후부터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 이 시기는 스승의 전서법과 예서법을 바탕으로,  오창석과 제백석의 전각기법을 서예작품에 응용한 점, 새로운 표현을 해 보고자하는 의지를 가지고 작품에 임했습니다. 학서기를 거친 뒤 첫 번째 변신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초대작가로 등단한 이후의 작품에서는 어떤 생각으로 작품창작을 하였습니까? 

황:80년대 작품활동은 84년 동경문화원 초대전과, 85년 워싱턴에서 전시겸 워커샵을 하였고, 87년 그룹활동, 88년 파리에서 개인전을 하였습니다. 84년 동경전에 앞서 경인미술관에서 전시를 하였는데 고문자인 갑골문으로 국내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하였습니다. 이 전시에서는 50여 점 가운데 전, 예, 행초작품이 있었으나 전각작품이 출품작의 3할을 차지하였습니다. 제백석의 상쾌한 단도법을 이용하면서 조형상 변화를 모색해 보았고, 획속에 둔탁함과 여유를 살리려고 하였습니다. 84년 동경전에 출품했던 <영평석문(永平石門)>(그림2)에서는 가늘지만 질기고 곡선미가 살아있는 획질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88년 파리전에 출품하였던 작품 <영락(永樂)>(그림3)에서는 검은색과 붉은색을 한 화면에 함께 넣어보았고, 획의 소밀과 태세(굵고 가늘기), 먹의 농담(濃淡), 윤갈, 획의 질삽을 살려보려고 하였습니다. 88년의 <일겸사익(一謙四益)>(그림4)이 공간과 먹과 획의 변화에 관심이 있었다면, 작품 <평화(平和)>(그림5)에서는 저색지(楮色紙)에 문자의 표정을 전각기법으로 조형성있게 표현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이 때부터 재료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89년의 작품 <수신제가(修身齊家)>(그림6)에서는 냉금지 위에 붉은색과 검은색을 혼용하여 수신과 제가를 표현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고전의 바탕 위에 저의 시각을 가미한 80년대 말까지는 저의 두 번째 변신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88년 파리전 이후부터 본격적인 현대서예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정:90년대 이후 거의 독창적이면서 파격적인 이른바 현대서예작품이 발표되는데 이런 작품이 발표된 배경과 의도는 무엇입니까?

황:88년 파리한국문화원 초대전에서 본격적인 현대서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하면서 90년 서화의 동행전이 열렸는데 저와 김구해, 민홍규, 백현수 등이 작품을 발표하였고, 91년 이런 움직임이 결집되어 한국현대조형서예협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초대 이사장을 맡아서 우리서단에 현대서예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문자가 지닌 이미지와 그림의 추상성을 연결시키기도 하고, 재료상 다양한 실험을 하기도 하였고, 평면에서 입체로 문자이미지를 극대화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묵수적인 전통의 답습이 아닌 창조적인 수용을 통해 현대성을 살려나가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90년의 작품 <우(雨)>(그림7)가 초기의 문자이미지와 비온 뒤의 느낌을 살린 작품이라면, 91년의 작품 <질주(疾走)>(그림8)는 골판지 위에 역동적인 굵은 필획으로 힘차게 달려가는 이미지를 살리고자한 작품입니다. 저는 이 때부터 문자를 읽는서예에서 이미지를 보는서예로 탈바꿈해 나간것이고, 작가의 내면세계를 문자로 한정짓지 않고 옮겨보고자 실험한 것입니다. 92년 국제현대서예전에 출품되었던 작품 <자연으로의 초탈>(그림9)은 은사(銀絲) 위에 붓을 들고 거침없이 저의 심중을 표현해 보았습니다. 현대서예는 바로 언어의 형상화, 작품속에 담긴 메시지를 감상자가 찾는 즐거움, 그리하여 생동하는 무한한 생명력을 표현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대가 요구하는 서예가의 신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운동들이 작은 결실을 맺기 시작하여 92년에 열린 ‘서울국제현대서예전’에는 8개국에서 77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의 작품에서도 개성이 드러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 현대서예를 주창하시면서 긴 세월동안 작품발표를 하셨는데 최근의 작품은 어떤 화두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까?

황:제가 처음부터 현대서예를 표방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존의 서예에서 표현을 달리하고자 하는 작가본연의 마음에서 이런 방법들을 모색한 것입니다. 즉 전통서예의 고답적인 표현방법에서 벗어나고자 해서 출발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문자의 조형성을 살리면서 갑골이나 금문이 지닌 상형성을 강조하였고, 그 문자들이 지닌 작의성이 없는 순수한 멋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나 할까요. 거기에 획의 변화와 운필의 묘, 먹의 농담, 색을 가미하였고, 재료를 다앙화하면서 표현영역을 확장하였지요. 어떤 측면에서 보면, 공모전에서 구양순과 안진경이 해서의 주류를 이루고, 왕희지의 행서가 도배를 하던 시절에 금문과 갑골문을 도입하고, 문자에 조형성을 찾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현대서예회원전을 열면서 “이백은 죽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더 이상 중국의 고전인 이태백의 시나 두보의 시를 아무 생각없이 동어반복으로 무작정 복사하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97년에는 일본 전역을 돌면서 16번이나 전시를 하였는데 상당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오히려 국내에서 보다 국외에서 더 많은 관심과 격려가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도가적 무위를 통해 사유의 결과를 작품으로 옮겨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선(禪)을 생활화하면서 작품과 나 자신이 별개가 아닌 하나라는 의식을 가져봅니다. 이제 저는 작업에서 더 이상 글씨와 그림,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재료와 형식에서도 한 곳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작업을 해왔습니다. 조형이라는 것은 모두 자연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인데도 보는 이가 그것을 찾지못하거나 보지 못하면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창작하는 작가의 몫이 됩니다. 그렇지만 창작이란 직접 그리거나 쓰는것만이 아닙니다. 내재되어 있는 조형을 발견하고, 어떻게 적용시키는가에 따라서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고 새로운 창작으로 다시 태어나는것입니다. 이렇듯이 모든 작품속에는 기가 살아있기 마련이고, 그리하여 99년부터 기아트라고 명명해 보았습니다. 2003년의 작품 <불립문자(不立文字)>(그림10)는 캔버스에 아클릴과 먹으로 표현해 본 것이고, 같은 해의 <불립문자>(그림11)는 나무, 아크릴, 천연재료, 먹 등의 재료로 표현해 본 작품입니다. 2000년의 작품 <비상(非相)>(그림12)은 찌그러진 항아리에 한지를 발라 시간개념과 골동개념을 단절시키고, 조형성만을 부각시킨 필묵작업으로 내용이 없는 것이 바로 내용입니다. 입체화시킨 이 작품은 오로지 감상자가 감상하고 느낄뿐입니다.



정:전각도 주목할만한 작품을 발표하셨는데 전각을 시작한 배경과 과정을 말씀해 주시지요?

황:80년대 산정 서세옥선생이 서울미대 학장을 할 때 한국전각계의 고봉이 되라고 격려하시면서 귀중한 인재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 당시 귀한 계혈석 전황석 등을 제공하면서 중국의 역대 명가들의 인보를 모각하도록 강조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철필로 근골이 있는 기운생동하는 각을 해 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오창석과 제백석 등 청대 명가들과 한인을 많이 공부하였고, 남정, 수촌선생 등 대가들의 인장을 많이 새겼습니다. 저는 전각도 역시 저나름대로의 개성을 살리려고 하며, 한글인장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앞으로 작가로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황:세계인들이 공감하는 서예를 하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유럽의 유명한 큐레이트들을 초빙하여 우리의 조형으로 그들을 설득한 뒤 그들로 하여금 우리서예를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예술로 알리게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후배와 제자들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고 싶습니다.


포헌 선생은 요즘 참선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가 참선을 하는 이유는 마음속의 속진을 걷어내고 작품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칸딘스키와 잭슨폴록에 대해 깊이 연구하는가 하면 동양적 사유에 더 깊이 몰두하기도 한다. 그의 곁에서 동양적 시각으로 서양적 미감을 소화하여 찰라에 표현하는 기아트에 공명한 묵기회원들은 든든한 동반자 이기도 하다. 조기동, 정도일, 이영자, 오화숙, 전애자, 원현숙, 김정현, 윤평수, 정한주, 김보성, 정판기, 이철우, 이선우, 최명식 등의 묵기회원들은 세계속에 우리 서예의 매운맛을 보여주려고 준비하고 있다. 선생이 자호하고 있는 시몽(是夢)처럼 이 모든 꿈들이 현실화되길 빌어본다.


삼도헌에서 정태수(서예세상 지기)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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