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

[스크랩] 경남서단에 뿌린 문인화 씨앗-운정 조영실님의 문인화 세계-

함백산방 2010. 12. 28. 19:29
 


          경남서단에 뿌린 문인화의 씨앗


 “문인화란 담백한 먹의 멋과 강한 필력, 문기있는 조형이 창의성 있게 표현된 그림입니다. 무엇보다도 문인화를 그리는 사람은 사물을 정확하게 관찰한 뒤 그 사물이 지닌 외면의 표현보다는 작가가 지닌 내면의 정신을 표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작가의 인품과 일치되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33년 동안 오로지 개성적인 문인화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고심해 온 운정(雲亭) 조영실(曺永實) 선생의 문인화관을 요약한 것이다. 그는 특히 경남문인화단의 밑거름이 되어 오늘날 수많은 문인화가를 배출하여 문인화의 보급과 저변인구의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선생의 70년대와 80년대에 개성미를 다듬어 나가던 시기의 화풍과 90년대 이후 독자적인 화풍을 선보이기 시작한 그림들을 살펴보면서 선생의 문인화세계를 엿보기로 한다.


서양화에서 문인화로 전공을 바꾼 70, 80년대


 운정선생은 경남 사천에서 1937년 태어났다. 고등학교시절부터 미술반활동을 하면서 그림에 재주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를 눈여겨 본 미술교사의 권유로 1959년 부산사대 미술과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서양화를 전공하면서 교사와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1972년 어느날 우연히 인사동 어느 화랑에서 먹으로 그림을 그린 문인화를 목격하였는데 그 때 수묵으로 작가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는 문인화에 상당한 관심을 두게되었다.

 

 선생은 부산사대에서 교사가 되기 위해 서양화를 열심히 그리며 색채감각을 가꾸어 나가면서 모든 색이 합일되면 검은색이 되고, 검은색은 온갖색의 모색이 된다는 동양적 색감에 관심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화선지 위에 수묵으로 표현하는 문인화를 꼭 그려보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생각의 물꼬를 1970년대 초반부터 틔우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오일칼라 대신에 수묵의 향내가 짙게 풍기는 먹을 갈게 되었다.

 

 우선 문인화를 그리기 전에 글씨부터 연마해야겠다는 판단이 서자 진주에 있는 진주서도학원에 입문하였다. 어느 정도 글씨의 기본기가 갖추어졌다고 느끼자 1974년 대구의 야정 서근섭 선생의 문하에 입문하여 4년 동안 문인화를 배웠다. 죽농선생의 화풍 위에 대상의 정수를 취하여 힘찬 용필로 기운생동하게 표현하는 야정선생의 영남문인화풍은 이후 작품제작에서 큰 바탕이 되었다. 이 시기의 화풍은 1979년 대아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진주에서 초대형식으로 첫 전시를 할 때 보여진다. 그림1, <묵난>과 그림2, <묵국>에서는 전통의 사군자기법을 연마한 흔적이 그대로 재현된다. 석재 서병오선생과 죽농 서동균선생의 골기있는 필의와 대담한 구도와 사의를 위주로 하는 전통적인 영남문인화법의 기초공부를 마친 뒤 야정선생의 추천으로 1978년 강암 송성용 선생의 문하에 입문한 뒤 강암선생이 작고한 1997년까지 20년 동안 사제의 인연을 맺으면서 스승의 인품과 화품을 전수받았다.

 

  강암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보고 느낀 강암스승의 인품은 오늘날 제자들을 지도할 때 그대로 전하고 있다. 항상 제자를 대하면서도 예를 갖추어 따뜻하게 배려하는 전형적인 유가의 풍모를 지닌 스승이 입문 후 6년이 지난 어느날 공모전에 출품을 해보라고 권유했는데 결과는 낙선을 하고 말았다. 그 날 이후 “남을 위한 공부보다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라”는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면서 공모전이 있을 때는 전주에 가서 여관을 잡고 주야로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화풍이 스승을 닮게되면 어김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자네가 강암인가? 왜 내 그림을 흉내내고 있는가”라고 꾸짖으면서 개성을 지닌 작가로 홀로서기를 원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이 1984년 발표한 그림 3, <묵죽>이다. 강암풍의 대나무라고 할 수 있지만 부분적으로 보면 개성의 기미가 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이 시기에 스승으로부터 진정한 사의화는 사물의 외양보다 작가의 내면을 화폭 위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받았는데 오늘날까지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다. 같은해 제작한 작품 그림 4, <묵죽>에서는 좌측 상부에 예서와 행서를 섞어쓴 화제가 특이하고 우측상부는 광대한 여백을 조성하여 공간경영에 대해 고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87년의 작품 그림 5, <청죽>은 정묘년 새해 원단 기념 휘호작품으로 아직까지 스승의 화풍이 은근하게 남아있다. 이는 스승의 정신과 예술적인 혼을 닮으려는 선생의 마음가짐이 화면에 그대로 스며든 것이 아닌가 한다. 


  운정풍(雲亭風)을 만들기 위해 분주한 90년대


 90년대 초반에 접어들면서 선생은 수묵담채에 대한 다양한 실험작을 선보이고 있다. 91년 공모전을 마감하면서 그는 이제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이나 장르에 관계없이 불치하문의 각오로 공부에 박차를 가한다. 예컨대 중국의 북경중앙미술확원 학과장인 장입진(張立辰)교수를 찾아가 수묵화의 현대적 표현에 대해 교류하는가 하면, 경상대학 교환교수로 온 중국인들과 교류하면서 중국의 최신 회화정보를 얻기도 하고, 사비를 모아 제자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그림공부를 하러 가기도 한다.

 

 이를 통해 수묵위주의 문인화제작방식에서 나아가  과감하게 채색을 도입하거나 다양한 회화기법을 응용하기 시작한다. 미술대학에서 익혔던 서양화 기법을 도입하는가 하면, 중국에서 체득한 용묵법을 극대화하거나, 물과 은은한 담채로 획 위주의 그림에 운(韻)을 부가하여 감상자로 하여금 작품속에서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1994년 제작된 작품 그림 6, <추색>이 이러한 실험을 시도한 작품이다. 담채와 먹번짐을 살린 이 작품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양식상의 변화가 뚜렷이 드러난다. 소재도 생활주변의 식물로 옮겨왔고 분위기를 중시하는 회화적 입장이 강조되어 보인다. 94년 제작된 작품 그림 7, <고추잠자리>에서도 아련히 지고있는 연꽃이미지를 부드러운 담묵을 중첩시켜 담아내고 있다. 이렇듯이 선생의 90년대 작품양식에서는 수묵에 담채를 도입하여 회화영역을 확대시켰고, 소재도 사군자 위주에서 다양화되고 있다. 또한 그림속의 화제글씨의 수가 급격히 감소되고 작품의 외적형태도 서양화의 P형식으로 변모되어 간다.


2000년대 이후의 독자적인 문인화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선생의 작품은 이제 자신만의 모습을 뚜렷이 보여준다. 2001년 개인전을 열면서 도록의 서문에 자서를 남겼는데 여기서 지금껏 임해온 작업에 대한 소회를 담담하게 읊조리고 있다. “캔버스와 물감통을 짊어지고 유명사찰이나 고적등을 주유하며 겉으로 드러난 풍경을 담기위해 분주히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면(面)을 중시하는 서양화에 심취해 있던 내가, 30여년전 우연히 인사동의 어느 화랑에서 먹으로 연출된 난(蘭)과 죽(竹)의 맑고 깨끗한 무한한 내면의 세계에 매료되어 선(線)을 중시하는 문인화와 인연을 맺어 면에서 선으로, 유형의 세계에서 무형의 세계로 뛰어들어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무던히 노력했지만 그림재주가 없는이라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이 나이가 되도록 꼴이 이러하오니 내 인생이나 작품이 미완성이라 완성될 때까지 노력해 볼까 합니다” 우리는 이 글에서 문인화가의 길이 험난하고 긴 수련의 과정이 필요함을 알 수 있으며, 서양화를 공부하는 학도에서 문인화로 눈을 돌린 이래로 오랜 세월 먹과 가까이 해 온 심정을 읽을 수 있다. 그 동안 10만장이 넘는 종이를 소비했고, 초기의 사군자와 수묵위주의 그림에서 서양화와의 접합기를 거쳐 이제 한층 더 깊은 먹맛에 취해 있다. 깊은 먹의 맛은 작가가 지닌 정신세계를 발현하기 위한 매개체이다. 근작에서는 담채의 여운과 먹의 조화, 여백과 추상화되어가는 화면의 경영으로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2000년 발표한 그림 8, <구성앵두>는 서양의 미니멀 아트(Minimal art, 최소한의 조형수단으로 제작된 그림이나 조각)를 연상시킨다. 앵두의 잎과 줄기를 걷어낸 뒤 열매만 수북히 모아서 화면 위에 재구성하고 있다. 사물에서 필요한 부분만 간취하여 이를 작가의 가슴과 손을 통해 감상자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해 제작된 그림 9, <연(蓮) 4>은 한결 심원해진 번짐기법과 연한 담채로 연잎을 묘사하고 꽃의 붉음과 잠자리의 정교함을 상보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넓은 잎에 엽맥이 거의 생략된 단순한 붓질, 여백의 활용과 담채 등이 최근작에서 두드러진 특징으로 보여진다. 

 

 2001년의 그림 10 <소송(疎松)>에서는 성긴 소나무 두어 가지에 소나무 잎 몇 가닥으로 극히 절제된 화면구성을 하고 있다. 이처럼 함축성과 단순성은 최근의 작품에서 중요시된다. 2003년의 작품 그림 11 <생(生)>에서는 30여 년의 화업이 총결된 독자적인 난을 선보이고 있다. 역필(逆筆)로 운필한 이 그림 속에는 강함과 삽(澁-껄끄러움)함, 필획의 속도가 늦음과 빠름, 먹물의 촉촉함과 마름, 필획의 굵기와 가늠 등등의 서예적 필획미가 있는가 하면, 감필의 단순함, 여백, 먹의 농담(濃淡) 등 운정식 문인화의 참모습이 무르녹아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작가의 길을 걸어오면서 선생이 추구해 온 모든 것들이 이 작품속에 응축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경남서단에 뿌린 문인화 씨앗


 작가로서의 삶 외에도 선생은 경남서단에 문인화를 보급하고 일선학교에 문인화 붐을 조성한 장본인이다. 42동안 초중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슬하에 1남 4녀 5남매를 성공적으로 양육하였는데 큰딸 선희씨는 대학교수, 아들 병곤씨와 딸 은희, 미희씨는 중고등학교 교사, 막내딸 정희씨는 대학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자식들도 아버지의 영향으로 모두 교육자로 가업을 잇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70년 이후 경남지역의 교사연수를 통해 문인화를 적극적으로 보급한 선생의 공로로 이지역의 문인화인구늘렸고 향수층을 두껍게 하였다. 운정한울문인화연구회는 교사출신 문인화가들의 모임으로 발표전만 15회를 개최한 바 있고 전문작가로 활동하는 사람도 5명에 이른다. 이렇게 경남지역에 문인화를 보급하게된 계기는 서양문화의 무분별한 도입으로 사회가 각박하고 윤리가 쇠퇴해졌기 때문에 동양정신 및 예의를 숭상하고, 전통예술의 맥을 잇기 위해서였다. 83년부터 본격화된 연수는 경남도교육청의 지원 아래 대아중학교에서 문인화교사연수를 실시한 이래 수시 혹은 주말을 이용해서 연수를 하였는데 방학 때는 60여명이 연수하기도 하였고, 지도교사 4명을 두고 문인화를 보급하고 있다.

 또한 경상남도 학생공모전을 96년도에 시작한 이래 금년에 9회를 앞두고 있다. 이 공모전에는 초중고학생들이 첫해에 743점이 응모하였고, 8회대회 때는 1219점의 작품이 접수되어 날로 문인화 열기가 높아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해마다 선생은 사비 500만원씩을 투자하여 남모르게 경남의 문인화보급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학교에 재직할 때는 매달 50만원씩 적금을 부어서 시작했고, 지금은 연금에서 떼어내어 문인화의 예술성을 제고하기 위해 힘쓴다.


 이와 같이 선생은 작가로서 5번의 개인전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갖춰나가면서 2000년대 이후 비구상적인 문인화세계를 펼쳐가고 있다. 사물을 관찰하여 핵심적인 면을 화면 위에 표현하고 있고, 획과 먹의 운을 중시하며, 담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2년 뒤 70이 되면 세계로 나아가 자신이 꿈꾸는 비구상적인 문인화로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문인화를 알리고 싶은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다.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 혹시 부담을 줄까 싶어 순두부만 즐겨 먹는다는 제자를 아끼는 마음, 경남지역에 문인화의 씨앗을 뿌린 문인화보급에 대한 열정, 관광지나 길거리에서 질서를 지키지 않은 사람을 보고 무심히 지나치지 못하는 몸에 밴 교육자 정신이 오늘날 선생의 참모습이다. 서여기인(書如其人: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이라는 말이 있듯이 화여기인(畵如其人:그림도 그 사람과 같다)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인터뷰 동안 꼼꼼하게 챙겨주는 부인 송정현여사와 함께 경남문인화단을 더욱 살찌게 하여 선생의 꿈에 세계인들도 동참하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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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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