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

[스크랩] 대전 서단의 버팀목 이곤순님의 서예세계

함백산방 2010. 12. 28. 19:27
 

 작가세계6 장암 이곤순


광개토왕비에서 개성미를 찾은 대전서단의 버팀목


1.들어가며

 

 대전시 중구의 도심 한 가운데에는 예술인빌딩으로 알려진 중도상가가 있고 이 건물 4층에는 대전서단의 맏형이자 대전에서 서실을 처음으로 개원한 장암(長巖) 이곤순(李坤淳:56) 선생의 보문서실(寶文書室)이 있다. 충남대 총장을 지낸 민태식 선생이 “예술의 길은 멀고도 먼길이니 바위처럼 변하지 말고 한결같이 정진하라”는  뜻으로 지은 장암이란 호가 선생의 40여년 서예역정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우리는 선생이 걸어온 길을 반추해 가면서  입문해서 대학생활을 마칠 때 까지를 학서시기로, 서실을 개원한 이후 공모전을 마칠 때 까지를 개성미를 갖추는 시기로, 90년대 이후 최근까지를 개성적인 장암체를 구사하기 시작하는 시기로 나누어서 선생의 서예세계를 살펴보는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2.일중을 만나면서 시작된 서예공부와 대전서단의 창립

 

  장암선생은 1948년 8월 충남 보령시 대천읍 농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천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보냈는데 어려서부터 집에서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붓으로 쓰면서 익혔으니 선생의 붓농사는 거의 반세기에 이르는 셈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중선생의 서예교본으로 시작한 서예공부는 홍성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독학으로 계속되었다. 1967년 충남대학교에 가업을 이어 목장업을 하려고 농대 축산학과에 진학하였으나 그 해 동방연서회에서 주최한 학생서예대회에서 수상을 하면서 서예교본의 저자인 일중 김충현선생을 처음 만나게 되자 미래에 대한 관심의 무게추는 서예로 기울게 되었다. 이듬해인 68년에 국민교육헌장이 반포되고 그 내용을 붓으로 써서 일중선생에게 보냈더니 편지로 자상하게 지도해 주었다. 그 때부터 방학을 이용해 서울과 대전을 오가면서 사제의 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67년 대학 1학년으로 입학한 선생은 대전지역의 김동연씨 등 5명의 청년학생들을 모아 청서동인회란 모임을 만들고  그 해에 학생그룹전을 열게 된다. 또한 대전문화원에서 서예에 관심이 있는 후배고등학생들을 모집하여 지도하였는데 정태희씨가 이 때에 함께 공부한 사람이다. 68년 대학 2학년 때 충남대학 도서관에서 대학생 신분으로 서예개인전을 열었는데 한글을 중심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 전시를 통해 문과대학 국문학과 조종업교수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해 한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생은 충남대학교서예연수회를 창립시켰는데 69년 충남대서예연수회 제1회 전시회를 가진 이래 30년이 넘도록 이 모임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70년 대학4학년 때 전국대학미전에서 한글로 동상을 수상하였다. 이렇듯이 선생의 대학생활은 전공을 뒤로하고 서예를 더 열심히 연마하여 일찍부터 빼어난 서예실력을 보이면서 현대 대전서단의 산파역을 맡게 되었다. 


3.한글과 한문예서를 통해 개성미를 다듬고

 

 71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망설임없이 자신이 가야할 길은 서예라고 판단하고 10월경에 교학상장(敎學相長)하기 위해 서실을 개원하였다. 대전에서 현대적인 서실로는 1호인 셈이다. 71년 한글학회 500돌 기념 휘호대회 최고상인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였고,  5월 제1회 충남미술대전 서예부문에서 23세의 나이로 최고상[<거화취실居華就實>]을 수상하여 일찍부터 대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같은해 8월에는 2회 개인전을 열어서 청년서예가의 솜씨를 대전시민들에게 보여주었다. 여기에 출품된 한글작품 <고지가 바로 저긴데>(도판1)는 일중선생의 필의를 이어받은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이 전시에 대해 71년 8월 11일자 충대신문에서는 해동연서회장으로 있는 장암선생을 소개하고 이 전시를 관람했던 노산 이은상선생이 출품작 가운데 <용비어천가>를 서울로 가져갔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일중선생은 평생 서예를 공부하겠다고 서실을 개원한 청년서예가의 장도를 축하하면서 “항상 법을 서학의 근본으로 삼아 부지런히 매진하라[<이법위주以法爲主>]”(도판2)는 격려작품을 보냈다. 선생은 주야로 공부에 매진하여 도전 초대작가로 등단하고, 74년 국전에 입선하는 등 승승장구한다. 그 당시 국전에서 한글 입선자는 두서너명에 불과하였는데 76년 다시 능숙한 한글흘림 <율곡선생시>(도판3)로 입선하면서 당시 서단에 한글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두 번의 한글 입선 이후에는 한문으로 출품하기 시작한다. 78년 국전 입선작 <박석재선생시>(도판4)는 본격적으로 예서공부를 한 흔적을 보여준다. 83년 미술대전 2회 때 광개토대왕비의 필의를 살려서 쓴 <김부식 선생시>(도판5)로 특선을 하면서 공모전을 마쳤다. 이와 같이 선생의 70년대와 80년대 초의 작품경향은 한글과 예서에서 일중선생의 필의를 이어받아 개성미를 가다듬기 위해 노력했고, 법첩은 장천비, 광개토대왕비, 예기비에 골격을 두고 석문송과 다른 한예를 여기에 접목하기 위해 고심하였던 시기였다. 


4.예서와 행초속에서 빚어낸 장암체


 공모전을 마치면서 이제 자신만의 글씨체를 가져야겠다는 의식이 선생의 머리에 가득했다. 우선 다양한 법첩을 통해 더욱 개성미를 다듬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전서와 행초서로 창작의  영역을 넓혀간다. 84년 11회 열상서단전에  <모공정>(도판6)을 임서하여 출품한 것과,  87년 충남도전 초대작가전에 <장욱시>(도판 7)라는 행초서작품을 출품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80년대 후반부터는 선생의 작품에서 뚜렷한 개성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88년 올림픽 기념으로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88인 국제현대서예전 출품작인 <월창선사시>(도판8)는 지금까지의 서예역정이 고스란히 담긴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껏 광개토대왕비를 즐겨 임서해 오면서 자양분을 얻었듯이 창작의 실마리도 여기서 찾은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를 공부한 이유도 민족적인 서예작품을 창작해야겠다는 일관된 입장에서 비롯되었고 한글서예를 부지런히 연마한 것도 우리의 얼이 담긴 글씨를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90년대에 접어들면, 이와 같은 의식은 더욱 뚜렷해지는데 행서에서는 중국의 왕희지와 안진경의 글씨에서 한걸음 나아가 우리나라 영업의 신행선사비와 우계와 송시열의 글씨를 익히고, 초서는 손과정의 서보와 우우임의 천자문, 장욱의 초서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김구의 초서를 공부하였다. 이러한 의식의 흔적은 96년 국제서법한국본부전에 출품한 행서 <남호선생시>(도판9)에서 보여진다. 왕희지의 연미한 맛에서 일탈된 굳건한 필획미가 넘쳐난다.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 오랜 학서의 결과는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선생의 작품은 이제 한글과 예서 및 행초서에서 뚜렷한 특징을 보이기 시작한다.  2001년 일월서단전에 출품한 예서 <자강불식>(도판 10)에서는 광개토대왕비를 뿌리로 삼고 거기에 석문송을 가미한 선생특유의 예서체를 선보이고 있다. 또한 행초서에서는 느긋한 필의로 여유로운 멋을 느끼게 한다. 2002년 발표된 초서 <퇴계선생시>(도11)와 2003년 일월서단전에 출품한 행초서 <소강절선생시>(도판12)에서 활달함과 변화의 묘를 반세기에 가까운 필력으로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이 한글에서 시작된 선생의 서예탐구는 예서를 거쳐 행초서까지 오면서 비로소 자신만의 개성을  담은 장암체를 일구어내고 있는 것이다.



5.자연스러운 한국적인 글씨를 꿈꾸며

 선생은 제자들에게 항상 다음의 네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붓을 놓지 말라. 둘째, 자신의 작업에 대해 소신을 가지고 꾸준히 밀고 나가라. 셋째, 곁눈질 하지 말라. 넷째, 서둘지 말라. 이는 온고지신(溫故知新)과 심정필정(心正筆正)을 생활화 해 온 선생자신에 대한 다짐이자 문하생들을 지도하는 가르침의 기본이다.  20대부터 제자들을 지도해온 선생은 75년부터 현재까지 26회 전시를 개최한 장연회(長緣會)를 통해 현강 박홍준, 가은 서성관, 중재 신윤구, 수헌 김남중, 의천 조경옥, 화산 임길환, 재당 윤길주 등 중앙의 초대작가들과 지역의 초대작가 50여명을 비롯하여 5천명에 육박하는 회원들을 지도하면서 충청서단의 중심역할 해 왔다. 또한 70년대 중반부터 92년까지 17년 동안 한남대, 목원대, 충남대 등에 출강하면서 수많은 대전의 젊은이들에게 서예를 통해 몸을 닦고 예술적 감흥을 맛보도록 지도하였으니 현대 대전 서단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선생의 작품관은 노자의 자연관에 있다. 생명이 없는 듯한 작품에서 살아있는 작품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이에 대해 노자는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으며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만물을 창조하게 하는 도가 자연을 본받는다고 하는 것처럼 앞으로 선생의 예술은 의도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지금처럼 서예를 즐기면서 그 속에 무젖어 있을 때 자연스럽게 변화되어 나간다고 보고 있다. 그리하여 등산을 하여도 자연과 벗하고 차를 마시거나 음악을 들어도 그 속에 묻히며, 작품을 제작해도 자연스럽게 되기 위해 마음을 비운다고 한다. 그렇게 해 나가면서 자연인이 되었을 때 한국인이면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런 그런 글씨를 쓰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마치 콩을 메주로 만들려면 푹 삶아야 하고, 사과가 제대로 맛을 내려면 잘 익어야 하는 이치처럼 지금껏 서예를 해 온 40여년의 세월은 자연스런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숙성의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이제부터 자연스런 한국적인 글씨를 쓰겠다는 선생의 꿈은 지금까지의 서예역정에서 알 수 있었듯이 분명히 이루어질 것으로 믿어진다. 필자는 일중선생이 내렸다는 고경실(古經室)이란 당호가 걸린 선생의 연구실을 나오면서 방금 보았던 선생의 작품들이 대전서단의 버팀목으로서 여유로운 모습을 지닌 선생과 흡사하여 서여기인(書如其人: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이란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정태수  (이 글은 월간 서예문화에 실렸던 글입니다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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