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

[스크랩] 학과 같은 작가 학정 이돈흥님의 서예세계

함백산방 2010. 12. 28. 19:26

 

작가세계 학정 이돈흥


행초의 선경(仙境)에서 노니는 학(鶴)처럼


               정 태 수


  광주의 상징인 금남로가 끝날 즈음에 전남도청이 있고, 전남도청 맞은편 빌딩에는 학처럼 고고하게 광주를 지키는 학정(鶴亭) 이돈흥(李敦興) 선생의 서예연구실이 있다. 연구실을 들어서면, 서가 가득히 꽂혀있는 정리된 책과 손때묻은 즐비한 법첩들이 주인의 연구열기를 대변해 준다. 선생은 이 공간에서 마치 스님이 불교를 깨우치기 위하여 행자(行者)로서 절간에 들어가 잔심부름을 하면서 차츰 불교를 익히면서 고승(高僧)이 되어가듯 오랜 세월을 서예의 예도(藝道)에서 해탈(解脫)하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우리는 이 시점까지 40여년 동안 수행해온 선생의 서예역정을 초기에 절의 법을 깨우치기 위해 동분서주한 행자시절과 같은 입문기와 의문을 가지면서 도를 구한 수련기, 그리고 자아(自我)를 찾아 해탈의 문으로 다가가는 견성기로 나눠보고자 한다.


 부친의 권유로 시작한 서예입문

 선생의 서예입문은 지금부터 37년전인 1966경 대학입학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고등학교를 마치고 전남대 공대에 입학한 선생은 펜글씨를 배우기 위해 학원을 방문하였는데 탁월한 필재를 발견한 부친(교장 선생님)의 권유로 송곡 안규동 선생의 문하에서 서예를 배우면서 시작되었다. 학교를 마치고 군문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ROTC 장교로 있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공부할 환경이 되었다. 이 시기 안진경의 해서와 황산곡의 행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1970년 국전19회 때 황산곡의 행서체인 <구의산중(九疑山中)>(그림 1)으로 출품하였는데 입선하였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 황산곡의 필의에 핍진하게 다가가고자 노력한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10년 가까운 시간을 서예연마에 투자하면서 차츰 묘미를 느끼게 되자 1975년 젊은 나이였지만 평생을 서예와 더불어 살아야겠다는 결심으로 연구실을 개원하게 되었다. 이 때 선생의 관심영역은 조지겸과 왕희지의 행서, 회소와 장욱의 초서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낮에는 원생들을 지도하고 밤에는 법첩연구에 몰입하여 새벽까지 연구실의 불을 밝히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그 결과 1982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조지겸 필의의 행서인 <연천초색만(連天艸色晩)>(그림 2)을 출품하여 특선을 하면서 공모전을 마감하게 되었다. 즉 이 시기는 왕희지를 통해 정법을 깨달았다면 조지겸을 통해 변법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행초와 예서를 섭렵하면서 시야를 넓혀간 수련기

 1980년대 이후 선생이 가장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 서체는 행초서이다. 그러나 행초서에 힘과 다양한 조형성을 갖추고 자신만의 개성적인 서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예서를 익혀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977년 1회 개인전 때 등완백의 예서와 행초서를 엮어서 선보인 것도 이와 같은 중체다변화(衆體多變化)의 연장선상이었다. 1985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품으로 춮품한 작품 <장사숙좌우명(張思淑座右銘)>(그림 3)이 이러한 예서수련의 중간과정이었다면,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품으로 출품한 작품 <어희신하동(魚戱新荷動)>(그림 4)은 개성적인 행서발문과 중후한 예서가 어울어져 중체를 폭넓게 익혀온 성숙과정이 무르익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평소 후학들에게 학서자의 기본은 붓을 제대로 잡는 것에서부터라고 강조하고, 나아가 여러 서체의 창작을 많이 해야 하며, 특히 장법(章法)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말라고 당부하는 것도 오체(五體)를 두루 익힌 선생의 안목과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이 시기 선생의 예술역정은 행서에서 예서와 여러 서체를 넘나들면서 고르게 익히고 개성미를 가꾼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행초에서 두드러진 독자적인 경지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행초서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선생은 처음 행초서를 익힐 때는 철저하게 서고를 작성해서 다양한 장법을 모색했지만 최근에는 종이 위에서 즉흥적인 감흥을 조형화 할 때가 많다고 한다. 행초서는 마음속 감정을 표현하기 좋기 때문에 선호하는 서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려야 하고 세월속에서 자연스럽게 익어야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작품이 나온다고 말한다. 1997년 서예대전 초대작가전에 출품한 행초작품 <채근담구(菜根譚句)>(그림 5)는 점획에서 예서의 삽세[澁勢, 깔깔함]와 행초의 부드러운 운율이 융합된 중체혼용의 결과를 엿볼 수 있다. 내용에서도 세상은 더럽지도 않은데 걸핏하면 세상사람들은 스스로 더럽다고 생각하고 괴로워한다는 채근담 구절을 인용하여 엷어진 세상인심을 질타하고 있다.

 1999년 미술대전 초대작가전에 출품된 작품 <한수재 시(寒水齋詩)>(그림 6)에서는 행초서의 묘미로 일컫는 윤갈(촉촉함과 마름), 태세(점획의 굵고 가늠), 지속(운필의 빠르고 느림), 강약(점획의 강하고 약함) 등등이 한 장의 작품안에 성공적으로 드러난다. 이 작품이 다소 텁텁한 느낌이라면, 2003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전에 출품된 작품 <왕폐 시(王敝詩)>(그림 7)에서는 부드럽고 고운 자태와 험하고 빠른 선율이 있는가 하면 거침없이 일필휘지하여 걸림없는 자유해방감을 낙관까지 연결시킨 장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행초의 대가라는 고명을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음악의 교향곡과 같은 총합된 화음의 울림을  듣는 기분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아름다움은 우연히 생성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2002년의 한글작품 <송강선생 장진주사>(그림 8), 2000년의 예서작품 <화의죽정(華意竹情)>(그림 9), 2000년의 행초작품 <권상하선생 시>(그림 10)에서 보듯이 폭넓고 오랜 연찬의 결과물인 것이다. 40년 가까운 세월속에서 생각의 추를 드리우고 붓과 먹의 조화를 맞추어 왔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최근 선생의 행초작품을 보면서 깊고 넓은 우물속에서 오랜시간 길러올린 두레박에서 맛보는 감천수의 청량함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마치 시야가 탁 트인 정자위를 얽매임 없이 오가면서 노니는  한 마리 학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제 해탈의 문을 눈앞에 두고 있는 선생은 노자의 예술관 한 구절을 말하면서 앞으로 작가로서 나아가야 할 길을 예시하고 있다. “오광십색(五光十色)은 오히려 사람의 눈을 멀게하고 오음잡주(五音雜奏)는 오히려 사람의 귀를 혼잡하게 하여 귀를 먹게 하고 오미(五味) 즉 맛있는 음식은 사람의 입을 넘치게 하며, 말을 타고 번잡하게 왔다갔다하면 오히려 정신만 혼란해진다” 이 말은 그림이 너무 호화찬란하면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음악이 너무 듣기 좋으면 대중가요 밖에 안 된다는 의미이다. 쉽게 말해서 惡과 사기가 있는 美는 금물이라는 뜻이다. 선생이 앞으로 추구해 나가는 미는 세속에 있는 소박한 미를 부정하지도 않고, 세속에 젖은 순수한 감정의 즐거움을 부정하지도 않고, 세속의 심금을 울려주는 기교를 경시해서도 안된다는 자기 다짐일 것이다. 

 선생의 이러한 뜻은 서울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는 자식과 오명섭, 임춘식, 이선경, 최돈상, 강덕원, 장주현, 박신근씨 등의 제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제자들에게 작품을 출품할 때 선생에게 보이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도 선생글씨에 얽매이지 말고 그 뜻만 이어 받아 청출어람해야 한다는 의지 때문이다. 모쪼록 무등산 분지에서 움터오른 선생의 예술혼이 방방곡곡으로 공명이 되길 고대해 본다.


팔공산 삼도헌 동창아래서 정태수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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