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

[스크랩] 마음을 새기는 작가(인천 청람 전도진 선생)

함백산방 2010. 12. 28. 19:27
 

작가세계 8 청람 전도진


                 말없는 돌 위에 마음을 새기는 작가

                                                                 정 태 수


 전각가 청람(靑藍) 전도진(田道鎭) 선생은 한국현대전각의 산증인이다. 그는 1948년 평북철산에서 태어나 피난시절 인천으로 내려와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인하대 교육대학원에서 한문교육으로 석사과정을 마친 학구파이기도 하다. 선생의 서예와 전각역사는 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예역정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0년대 중반 인천의 대가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 1925〜 1975)선생의 문하에 입문하면서 시작하였고, 파란만장한 전각가로서의 삶은 1967년 석봉(石峰) 고봉주(高鳳柱1906〜1993)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1968년 전국신인예술상과 국전특선 3회로 최연소 초대작가, 인천광역시 문화상을 수상한 쟁쟁한 수상실적이 말하듯이 40여년의 세월동안 오로지 서예와 전각의 외길인생을 걸어왔다. 우리는 선생의 작품세계를 수학기, 모색기, 성숙기로 나누어서 들여다 보기로 한다.


동정선생과 석봉선생과의 운명적인 만남

 청람선생의 인장에 대한 관심은 도구도 없이 감나무도장을 열심히 새겨 주위에 나누어 주었던 초등학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의 선린동 화교동네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중국에서 들어온 얇은 법첩(法帖)과 인보(印譜)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필법이나 각법에 관계없이 그저 몽당붓으로 쓰고 문방구용 칼로 새겼던 것이다.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미술반 활동을 하였는데 미술반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기도 하면서 그림에 재주를 보이자 그의 글씨와 미술적 재능을 눈여겨 본 담임선생님이 동정선생을 소개한다. 그런 연유로 당시 신경희씨의 한의원 2층에 있었던 인천최초의 서실인 동정서숙에서 본격적으로 서예에 입문한다. 60년대 중반 고등학생 신분으로 입문한 이후 동정선생이 작고한 75년까지 군복무기간을 제외한 세월을 서실에서 살다싶이 하면서 기본기를 닦았다. 입문한 후 몇 년이 지난 67년경에 동정선생은 아끼는 애제자였던 청람에게 전각가 석봉선생을 소개하면서 전각가로도 대성하기를 기대하였다. 어릴적부터 꿈꾸었던 파란만장한 전각가의 철필인생도 이 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안진경의 서법과 오창석의 각법을 익힌 수학기

 작품에서 드러난 양식상 특징으로 보면, 입문한 60년대와 국전에 출품한 70년대까지를 수학기로 볼 수 있겠다. 입문초기 고등학교 재학시절에는 안진경의 안근례비, 다보탑비, 쌍학명, 호구사시 등을 열심히 임서하였다. 그러면서도 스승의 내제자로서 의발을 이어받으려고 노력하였는데 동정선생은 자신보다 뛰어난 작가가 되라는 의미로 청출어람(靑出於藍)에서 두 자를 따서 ‘청람(靑藍)’이란 호를 내렸다. 입문초기에는 60년대말까지 안진경의 해서를 주로 공부하였는데 69년 국전 18회에 출품하여 입선한 작품 <임호구사시>(그림 1)를 통해 안진경의 해법을 얼마나 충실하게 익혔는지 짐작할 수 있다. 70년대로 접어들면서 다양한 서체를 익히기 시작하는데 70년대 중반부터 전서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공부에 박차를 가한다. 석고문과 청대 전서명가들의 소전(小篆)을 부지런히 임서했고, 70년대 후반에는 다시 대전(大篆)쪽으로 올라가 금문들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74년 국전 23회 입선작 <수권석문>(그림 2)에서는 오양지의 전서풍을 느껴볼 수 있다. 또한 70년대 후반부터 행서와 여타서체들을 섭렵하면서 자신의 개성이 담긴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81년 국전 30회 특선작품 <용비어천가>(그림 3)는 오창석을 비롯한 청대 명가들의 전서를 바탕으로 자신의 시각이 반영된 작품으로 어느 정도 스승과 격리된 서풍을 보여주고 있다. 국전에서 특선 3회와 입선 7회를 하였지만 연령제한규정에 묶여 초대작가로 등단하지 못하고 84년에야 초대되어 최연소 초대작가의 기록을 남겼다.

 

 한편 이 시기 선생의 전각공부는 석봉선생이 거주하던 충남예산까지 왕래하며 무수히 많은 돌에 새김질을 하게되면서 한국전각계에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석봉선생은 중국 오창석의 수제자였던 일본인 히다이 텐다이(比田井天來.1875〜1945)의 수제자로 일컬어지는 명인으로 한국현대전각의 초석을 놓은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석봉선생은 오창석으로부터 받은 전각도를 그대로 제자인 청람에게 전하여 오늘날 청람선생이 가보로 간직하고 있다. 초기의 전각작품을 보면, 68년에 선생이 새긴 자신의 성명인과 호인은 매끈하게 디자인된 것처럼 보인다.(그림 4)  69년에 새긴 음양각은 서삼경풍을 충실히 수용한 작품이다.(그림 5) 70년대를 넘어서면서 그의 전각작품은 몰라보게 세련되어진다. 75년작 음양각(그림 6)에서는 변화를 모색하고 있으며, 79년의 음양각(그림 7)에서는 점획의 접필부분에서 변화를 주거나 칼맛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이 시기부터 성명인 음각에서는 인(印)자를 사용하지 않아 공간의 변화를 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1973년 우리나라 현대전각계의 첫 전시였던 한국전각협회전에 노대가들과 함께 참여한 것만 보아도 얼마나 일찍부터 전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는지 알 수 있다.

  

붓과 칼로 개성미를 찾는 모색기

 대체로 80년대를 선생의 작품에서 모색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동정선생이 타계한 후 글씨방면으로는 홀로서기를 해야될 상황이었고, 전각방면으로도 석봉선생의 영향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다. 서체의 표현에 있어서도 한글과 행초까지 자유롭게 작품화하고 전각에서도 자신의 각풍을 만들어 나간다. 88년 올림픽 기념으로 열린 국제현대서예전에 출품한 <금문金文>(그림 8)은 2미터가 넘는 시멘트재료에 각을 하고 탁본을 하여 세인을 주목시켰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고대의 족휘나 상형성이 많은 도상문자 및 금문들을 마치 암각화를 연상케 하는 기법으로 제작하였는데 많은 경비를 들여서라도 작품다운 작품을 제작하겠노라는 프로정신이 들어간 작품이다. 91년 현대미술관 초대전에 출품한 작품 <두보시>(그림 9)는 한글과 한문을 섞어도 어색해 보이지 않을 만큼 다양한 서체를 구사한 작품이다. 80년대를 넘어서면서 본문을 왼쪽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른쪽에 낙관을 하는 서사방식을 지향한다. 이런 방식의 작품은 기존의 오른쪽에서 시작해서 왼쪽에서 마치는 방식과 정반대라서 처음에는 오해를 사기도 하였으나 고정관념을 타파시킨 작품을 하려는 작가의 굳건한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전각은 고새와 한인을 바탕으로 변화가 없는 듯 하면서도 은근히 착종되는 획법과 기필과 수필부분에서 날카로운 도법을 보여주고 있다. 88년의 음양각(그림 10)을 보면, 안정감 속에 미묘한 변화를 느끼게 하는 자법과 마치 오래된 인장을 보는 듯 푸근한 이미지를 풍긴다. 여기에서도 성명인에서는 인(印)자가 없는데 인장이란 것을 아는데 굳이 인(印)자를 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선생의 지론이다. 이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장우성, 김충현, 송성룡, 최정균, 송영방, 서희환 등 명가들의 인장을 새겨줄 정도로 전각가로서 명성을 쌓아나가고 있었다. 따라서 글씨와 전각에서 개성미를 다듬어 나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와 각에서 새로운 형상성을 이룬 성숙기

 90년대를 넘어서면서 선생은 서와 각에서 자신만의 특징적인 형상성을 갖추어 나간다. 각에서 터득한 장법과 공간개념을 서예작품으로 환치시켜 여백을 극대화하거나 회화성을 가미하기도 한다. 재료와 글감을 다채롭게 수용해 나가는데 글감으로 대중가요의 가사를 사용하기도 하고, 재료는 스치로폼, 점토, 나무, 석고, 기와 등이 동원된다. 작품의 형태도 과거의 규격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형태로 표구를 시도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늘 새로운 글감에 맞는 작품형태를 제작하려고 하고 거기에 새로운 각을 새겨서 찍고자 하는 작가정신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99년작 <화광동진(和光同塵)>(그림 11)은 서체와 농담 및 굵기를 달리하여 풍자적인 내용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동’자 대신 화투의 똥광를 그려넣고 “똥입니다”라는 낙관글씨를 써 넣고 있다. 고상한 아악대신 저급하다고 생각되는 민요를 연주하는것과 같이 감상하는 대중을 향해 서예는 더 이상 특정계층의 향수물이 아닌 대중예술이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2001년작 <대상무형象無形)>(그림 12)에서는 탁본과 각의 기법을 혼용하여 문자가 지닌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있다. 2003년작 <상선약수上善若水>(그림 13)는 전각의 특질과 여백을 극대화하여 문자를 회화화하고 있다. 청색으로 찍은 상선약수는 푸른 물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글씨는 좌에서 우로 가면서 포치되어 있다. 수십년간 방촌의 인장속에 문자를 포치해 온 노하우로 서예작품에서도 공간의 허실과 획의 이합집산을 생각하여 허허실실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있는 것이 요즘 작품의 특징이다.

 

 전각작품은 90년대 이후 많은 변화를 보인다. 지금껏 고전적 기준을 중시하면서 점진적으로 조금씩 자신의 세계를 열어왔다면, 90년대 이후의 작품에서는 전각삼법이라 일컫는 자법(字法), 장법(章法), 도법(刀法)에서 이전의 작품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98년작(그림 14)에서 음각은 장법에서 소밀을 강조하고, 도법에서는 단도의 묘취를 살리고 있어 보는이로 하여금 투박한 운치를 느끼게 한다. 양각에서는 테두리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내부의 문자와 혼연일체감을 느끼게 한다. 2001년작(그림 15)에서는 왼쪽으로 시선을 쏠리게 해두고 오른쪽은 점점 약하면서 거대한 공간을 만들어 가공되지 않은 천연의 태고미를 느끼게 한다. 획의 태세(太細)와 무밀한 공간운영, 칼맛의 어울림 등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40년 세월을 치석하면서 보낸 연륜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작품이다. 초기의 양장미인처럼 곱고 정제미를 보이던 각법과 최근의 각법은 판이하게 다르다. 이제 바햐흐로 선생의 독창적인 청람식 전각세계가 열리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듯하다.


至誠으로 세계를 향해 새김질을 하는 刀人

 “20대에 10년 동안 열심히 임서를 하고 30대 부터는 무조건 창작을 해야  한다” 그래야 작가도 되고 서예도 살아난다는 것이 선생의 지론이다. 우리 서단에서는 너무 오랜 세월을 임서에 매달리다 보니 창작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20대 이공계박사가 나오는데 50대까지 임서를 하면 짧은 인생에 언제 자신의 글씨와 자신의 작품을 할 것인가. 곱씹어볼 말이다. 선생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서예와 전각이라는 두 개의 어께짐을 메고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도록 이 길을 걸어왔다. 동정선생과 석봉선생을 만나 서법과 각법을 전수받고, 거기에 오창석, 등산목, 조지겸, 오양지의 각풍(刻風)을 눈여겨 보면서 일본쪽 명가들의 각풍도 대입시켜 왔다. 이제 일본쪽의 박(博)한 맛과 등산목의 후(厚)한 맛이 어울린 선생 특유의 각맛이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지극한 정성으로 극기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70년대에 이미 일본의 『전각지남』과 『조양자감』을 구해서 책모서리가 닳도록 보았고, 200조가 넘는 성명인을 새겨서 사용할 정도로 많은 작업량을 가진 성실한 작가이었기 때문에 이런 봉우리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고유섭이 주창한 ‘무기교의 기교’와 ‘구수한 큰 맛’을 자신의 작품속에 담아 한국적인 전각상을 제시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선생의 이러한 꿈은 멀지 않은 시간 안에 이루어 질 것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극기를 좌우명으로 삼고 부지런히 작업하는 선생의 작가정신과 이화여대 섬유예술과를 졸업하고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에 오른 부인 윤영숙 여사가 오로지 부군을 위해 선생이 새겨서 여러 상자에 가득히 담아 둔 인장마다 일일이 인모(印帽)를 만들어 씌운 내조의 따뜻함을 가슴 가득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팔공산 삼도헌에서 정태수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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