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

[스크랩] 관객속으로 들어가는 붓놀이

함백산방 2010. 12. 28. 19:15

                                    관객 속으로 들어가는 붓놀이(율산 리홍재의 서예)


                                                                정 태 수


 대구 동성로 입구에 있는 율림서도원에는 낮과 밤이 따로 없다. 24시간 연중무휴로 서실이 열려있기 때문에 항상 공부하는 회원들로 북적거린다. 거기에는 밤낮을 구별하지 않고 원생들을 지도하면서 자신의 공부에 매진해 온 율산(栗山) 리홍재(李洪宰)가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시절 서예가 좋아 하루 종일 글씨쓰기에 매달리고 싶었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후학들에게 그대로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연중무휴로 서실을 개방한다고 말한다. 초등학교 5학년 특활시간에 처음 붓을 잡아본 그는 그 정서를 잊지 못하고 지내다 1976년 죽헌 현해봉선생의 문하에 입문하면서 본격적인 서예학습의 길로 접어들었다. 3년 뒤 1979년 7월경에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종이를 너무 많이 소비하는 것을 기특하게 생각해 온 어느 필방 주인의 배려로 대구의 심장부인 동성로에 서실을 개원하게 된다. 그 뒤 해를 거르지 않고 율림 서도회전을 개최하였으니 벌써 20회를 훌쩍 넘겨버렸다. 이 과정을 통해 두 명의 한국서예협회 초대작가를 배출시켰고, 지방의 시도전에서는 20여 명의 초대작가를 양산시킬 정도로 탄탄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율산의 지도자로서의 능력보다 작가로서의 능력이다. 자승자각(自勝者覺 ; 자신을 이기는 자가 깨달음을 얻는다)이라는 좌우명을 가진 율산은 인간은 쓰기위해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손잡이가 달린 작은 가죽가방 속에는  언제든지 메모할 수첩이 준비되어 있다. 여러 차례 즉석에서 메모하는 습관을 지켜 본 필자는 때묻은 몇 권의 수첩에서 창작 아이디어가 어지럽게 메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는 술을 마시거나 노래를 하면서도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마치 즉흥환상곡처럼즉석에서 메모를 하는 습관이 있다.

 특히 3월의 대규모 전시를 앞 둔 요즘엔 모든 생각이 이 곳에 집중되어 있어서 대화를 나누다 문득 떠오른 발상의 여운을 놓칠세라 메모를 하기도 한다. 글씨에 대한 이런 열정은 독학하다시피 이룬 그의 작품세계를 형성한 가장 큰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세필에서 대필까지 척척 휘호하는가 하면, 오체를 거침없이 구사하기도 한다. 그의 능력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그의 연구실 서탁 위에 밑줄이 빼곡하게 그어진 오체자전이 말해준다. 오늘의 율산이 있기까지 모서리가 헤질 정도로 닳은 이 자전이 그의 가장 큰 스승이자 작가로서의 능력을 생성시킨 바탕이 된 셈이다.


 율산은 3월 한 달 동안 대구의 밀리오레라는 대형 옷판매점에서 지금까지 견지해 온 전통의 벽을 넘어 서예계에서 유래가 없는 퍼포먼스전이라는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수 많은 시민들이 드나드는 옷판매점에서 갖는 전시도 특이하거니와 전시 기간 동안 수 차례 음악, 무용과 함께하는 그의 퍼포먼스는 어떤 행사의 구미를 돋구기 위한 간헐적이고 일회적인 쇼형식의 퍼포먼스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서예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지금 전개되고 있는 세계문화의 조류를 읽고 있는 것인가? 세계문화의 조류는 산업화시대가 정보화시대로 이행되면서 장르간의 벽 허물기가 진행되고 있다. 음악, 미술, 무용, 영화 그리고 거기에 뉴 미디어까지 섞여 문화예술은 지금까지 지켜온 각각의 영역을 허물고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치 혼합화를 추구하고 있다. 앞으로 이런 분위기는 더욱 가속화될 교통발달과 인터넷을 이용한 정보확산, 그리고 위성방송 수신을 통한 외국문화의 자연스런 수용으로 한층 빠른 속도로 혼합화에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일종의 토털문화 지향성의 이러한 문화 하이브리드(hybrid ; 혼성) 현상은 연극과 무용이 적절히 결합된 뮤지컬 스타일의 혼성 퍼포먼스가 정통의 극장에서 예사롭게 공연될 정도로 일반화되고 있다. 율산이 계획하는 퍼포먼스전도 문자를 위주로 작품만 뎅그러니 걸린 정적인 기존의 서예전시에서 벗어나 동적인 공연을 통한 시각성과 풍물을 곁들인 청각성까지 한꺼번에 전시장에 흡수하여 서예, 무용, 음악이 어울어진 혼합성격의 전시형태이다.

 즉 다양한 시각효과와 청각효과를 결합하여 관람자와 직접 접촉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장르간의 혼성화는 장르간의 영역을 허물고 서로의 특성을 결합함으로써 예술가는 새로운 가치의 추구와 실현에서 오는 기쁨을 맛보고 관람자는 새로운 충격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서예가 지닌 독특한 특성인 문자성과 일회성 등등의 고유한 미적 속성이 희석되지 않을까 염려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이번 전시도 아직은 실험단계이지만 곧 그만의 독창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금의 세계문화 조류를 볼 때 장르와 장르가 벽을 허물면서 전체성을 추구하는 합일로 나아가고, 그러면서 더욱 극단적 개성과 독창성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장르적 특성을 확립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산이 일일신(日日新 ; 날마다 새롭게 거듭나고자 하는 마음)의 정신으로 시도하는 서예퍼포먼스전도 내용과 성과를 떠나 그 시도만으로 서예계에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 질 것으로 보여진다.  

       
*이 글은 월간서예문화에 실렸던 글입니다*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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