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의 새길을 여는 작가
-야정 서근섭의 작품세계-
Ⅰ. 들어가는 말
야정(野丁) 서근섭(徐根燮)은 광복 이후 한국의 대표적인 서예가의 한사람으로 자리매김되는 죽농 서동균(1902∼1978)의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친은 한국 현대서예사에서 한 획을 그은 작가로서 국전심사위원을 지냈으며, 서예인으로서는 최초로 문화훈장을 수상하기도
한 유명한 서예가이자 문인화가로서 특히 묵죽화에 능하였다. 야정은
일찍부터 가학으로 서예와 문인화를 배웠다. 그는 선친의 훈육아래 학서기를 지나면서부터 독자적인 조형감각으로 서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70년대 까지는 학서기, 80년대는 모색기라고 볼 수 있는 그의 서예발전과정에서, 줄곧 문인화에 천착하면서 주로 묵죽(墨竹)영역에서 일가견이 발휘되고 있었다. 90년대를 지나면서 선친의 전통적인 문인화 위에 독자적인 문인화 세계를 펼쳐보이면서 한국의 현대문인화 개척에
모색적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문인화는 특히 수묵의 깊이와 특성파악에 두각을 발휘하여 현대적인 감각을 갖추고 있다.
동양삼국의 범주에서 자리잡고 있는 서예나 문인화는 특히 한국적
상황에 있어서 소재나 양식 등 주로 전통적인 표현기법의 답습 내지는
모방에만 급급해서 매우 보수적 성향애 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년의 야정은 고정된 이러한 시각에서 한 걸음 나아가 서양의 현대미술
가운데 추상표현주의의 양식과 유사한 문인화 작품을 하는가 하면, 대부분의 국내작가가 전통적인 서법적 표현에 묶여 있는 서예작품의 경우에도 역시 문자의 해석방식을 달리하거나 점획의 새로운 포치를 통한 현대서예작품을 70년대 이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의 이러한 작품발표과정을 학서기와 모색기, 그리고 성숙기로 나누어 살펴보고, 작품양식의 특징에 대해서 필자의 천견을 붙이고자 한다.
Ⅱ. 학서기
한국서예는 신라의 김생과 최치원이 왕희지와 구양순의 서법을 익히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과언이 아니다. 고려시대말에는 조맹부의 송설체가 들어온 이래 조선초기까지 송설체가 풍미하게된다. 한석봉이
왕체(왕희지체)를 재해석하여 자가서체를 형성하고, 조선중기 이후 옥동 이서로부터 백하 윤순, 원교 이광사로 이어지면서 조선색 짙은 이른바 동국진체가 성립된다. 그러나 조선말 19세기에 이르러 우리서예사에서 전무후무한 서예가인 추사의 출현으로 조선의 독창적인 양식이 개척되기에 이른다.
추사는 금석고증학적 바탕과 새로운 조형의식으로 예서를 재해석하여 서예사에 남는 독창적인 추사체를 창출하였다. 그 후 추사학파들에
의해 근대서예의 맥이 이어졌지만 일제의 질곡시대를 지나면서 우리서예의 정체성은 희석되고 말았다. 현대서단은 국전시대로부터 미술대전, 서예대전을 거치면서 공모전이라는 제도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
다행히 80년대 이후 서예인구의 양적팽창과 함께 대학에 서예과가 생기면서 서예의 예술성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있다고 보여진다.
야정은 현대서단이 시작되는 시점에 어린시절을 보내면서 서예를 가업으로 하는 선친의 슬하에서 당시의 사정으로 흔하지 않았던 지필묵과 서예자료들을 생활 속에서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선친은 자식을 훈도하면서 매우 엄하게 지도하였다고 한다. 무릇 학문이든 예술이든 편하고 쉽게 얻으면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시키지 못하는 폐단이 있기 마련이다. 그는 매일 일정한 분량의 글씨를 써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의 선친은 문인화를 지도하는 방법도 오랫동안 작품연구를 하게하고 어느정도 그 작품에 대한 연구가 되었다 싶으면 필법과
방법을 조금씩 가르쳤다. 그는 선친으로부터 몇 장의 체본밖에 얻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문열씨의 소설인 금시조에 등장하듯이 죽농은 마지막 인생길에 자신이 평생 제작한 작품들을 모아 불태웠을 만큼 치열한 작가정신의 사표로서 그에게 남아있다.
스승이자 생부였던 죽농은 자신이 걸어왔던 예술의 길을 자식에게 전수하면서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먼저 가르친 셈이다. 70년대 까지 계속된 그의 학서기는 오늘날 탄탄한
필력과 폭넓은 수묵발현의 근원이 되고 있다.
이라반적으로 야정을 문인화가로 알고 있지만 이 때 까지 그는 서예연마에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고 있었다. 처음 글씨에 입문할 때 안진경의 <쌍학명>, <가묘비>, <고신첩>을 익혔고, 차츰 구양순과 저수량의 당나라 해서를 두루 섭렵하였다. 행서는 왕희지의 <집자성교서>,
안진경의 삼고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였고, 70년대에 이르러 전서와 예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였는데 전서의 <석고문>과 예서의 <장천비>, <사신비>, <조전비> 등의 한비(漢碑)를 깊이있게 연구하였다.
당시의 서단 정황으로 보아서 그의 서예의 기초수련이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그는 이 시기를 회고하면서 전체 학습시간 가운데 글씨의 비중을 8할로 하였고, 문인화의 비중을 2할로 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서(書)와 화(畵)가 동원(同源)이란 인식아래 그림에 앞서 글씨가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야 된다고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시기까지 고전에 대한 연찬이 어떠했는가는 1977년 임서한 예서작품 <장천비>와 1976년 제작한 <전서대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사람보다 오랜 학서기를 보내면서 서예의 기본인 정확한 용필과
점획조형 및 결구분석을 통해 서예의 기반을 다졌고, 전통적인 사군자를 연마하여 죽농의 작품을 방불하게 한다. 1979년 제작된 <매죽우석>과 1974년 제작된 <풍죽>에서 전통적인 사군자의 수련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 때 까지 그의 일차적인 목표는 선친의 작품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각고의 노력으로 학서기를 보낸 덕분에 이후 그는 다양한 현대서와 신개념의 문인화세계를 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Ⅲ. 모색기
1978년 부친 죽농이 76세의 일기로 별세한 이후 야정은 그 동안 천착해 왔던 고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세계를 열기 위해 창신의
고뇌가 점철된 90년대 이전까지를 그의 작품세계에서 모색기로 보고자 한다.
이 시기 그는 글씨에서 초서에 관심이 많았고, 80년대 중반에는 갑골문과 금문, 청대 하소기의 예서와 행서 등 한문 오체의 개성적인 작품까지 연마의 폭을 넓혀 갔다.
문인화에서도 전통적인 사군자화에서 산수, 인물, 화조, 기명절지 등에 이르기 까지 표현기법을 연마하고 장르의 벽을 넘어 본격적인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70년대부터 지명도를 점차 넓혀가던 그는 이미 영남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로서 자리매김되고 있었다. 이 시기 국내 서단에서는 북위시대의
해서가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글씨공부도 고전의 연마에서
비롯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고 있었다.
일본 등지에서 중국의 법첩이 수입되는가 하면 서예학에 대한 연구열기가 움트고 있었다. 또 극소수이기는 하여도 이른바 현대서에 대한
관심이 늘어가는 추세였다.
야정은 이런 움직임이 있기전에 간혹 현대서형식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지만, 80년대 이후 작품전에서는 현대서와 문인화를 절반씩 발표해오고 있어 이분야의 개척자라고도 할 수 있다.
현대서의 경우 1988년에 발표한 <반야심경>과 1987년에 발표한 <희묵>은 기존의 서예작품과는 다른 표형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야정 스타일의 현대서 작품이다. 문인화의 경우, 1988년에 제작된 <죽>에서는 죽간과 잎을 분리하여 전통적인 죽화와는 많은 차이를 느끼게 하며, 구도에서도 파격을 보이고 있다. 1989년에 제작된 <허심직절>에서도 선친의 작품과는 다른 대범한 필획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이 시기 그의 작품을 통해 선친의 작품양식과 틀에서 벗어나고자 고뇌한
흔적을 읽을 수 있고, 새로운 실험으로 자신의 세계를 모색해 보려는
작가의 노력을 감지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창신으로 거듭나기
위한 모색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Ⅳ. 성숙기
90년대를 지나면서 현재까지 서예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고
대학에 서예과도 4개 학교로 확충되면서 전문작가와 연구자도 속속
배출되고 있다. 일반인들의 서예에 대한 인식도 교양이나 여가선용의
차원에서 전문적인 예술분야라는 인식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국내에서 안주하거나 머물었던 서예가의 시각도 국제적인 현대미술의 조류나 경향을 의식하기 시작했고, 몇몇 작가들은 이를 작품으로
구현하고 있기도 하다. 야정도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의 문인화에서는 더욱 단순해진 몇 개의 선과 터치로 대상의 내면을 형상화한
작품과 대범한 구도, 힘찬 필획 등으로 서양의 현대추상미술을 연상케하는 작품을 내놓고 있다.
이 시기 그의 작가적 위상도 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위원과 운영위원을 맡아 보는 한편, 계명대학교 서예과 교수로 부임하여 학교를 통해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1994년 5회 개인전의 평문을 쓴 심재완 박사에
의하면, "기존 틀에 새 기법, 문자와 회화의 접목 등으로 무한한 새 화법을 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작품경향에 대해 살펴보면, 1994년 발표된 <관산>에서는 기존의 서예작품에서 중시되는 소밀(疏密), 고졸(古拙), 균제(均齊) 등의 고전적인 개념과 문자라는 형식에서 일탈하여 세계미술화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다양한 재료에 대해서도 많은 실험을 하였는데 1993년 발표된 <문자유희> 시리즈에서는 화선지에 린시드유와 몇 가지 재료로 균열을 생기게 하여 고졸한 맛을 느끼게 처리하였다. 오늘날 이 기법을 흉내내는 후학들과 기성작가들이 많은 실정이다. 그는 서예작품을 평면이 아닌 입체의 설치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1988년 제작된 <일출>은 사각기둥에 산 위로 떠오르는 해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그 사각형의 설치물을 어디에서도 감상할 수 있게 입체로 제작하여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최근들어 성숙미를 보이는 그의 작품은 더욱 노련해진 필획과 발묵효과, 파격적인 구도 등에서 놀랄만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2001년 발표된 <문자유희Ⅱ>를 비롯한 시리즈에서는 원숙한 필획과 꼴라쥬 기법에 흘리기 기법까지 응용된 작품으로 서양미술을 적극적으로 서예작품에 응용하고 있다. 문인화도 부분을 확대하거나 대담한 필획으로
전통적인 문인화 양식을 초월한 자신의 양식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2001년 발표된 <추실>에서 '신문인화'라고 하여도 좋을만한 그의 독창적인 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이제 극도로 절제된 몇 번의 붓터치로 대상의 정수를 사의적으로 표현한 신문인화 개척에 열기를 쏟고 있다.
Ⅴ. 나오는 말
야정은 가학의 전통과 부단한 노력으로 독자적 서예세계를 일구어 나가고 있는 현역 중진 작가이다. 반세기를 닦아온 견고한 필력으로 현대적인 문인화의 새길을 열기에 영일이 없는 그는 고전적인 서예의 문맥에 현대적인 미의식을 가미하여 작품속에 담아내고 있다. 즉 서예와
문인화의 고전에 천착한 뒤 이를 다시 현대적 조형시각으로 확대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의 문인화에서는 서예가 지닌 추상표현적인 요소가 극대화 되어 있고, 재료면에서는 기존의 문방사보가 지닌 한계성을 뛰어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고, 물상의 현태보다는 상(象)을 취하려는 동양적 조형원리가 충분히 구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전시마다 새로운 작품을 보여주기 위한 그의 진지한 노력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오랜 학서기와 모색기를 지나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작가는 고정화된 자기패턴에 익숙해져 화석화된 작품들을
양산하기 마련인데, 야정의 경우는 젊은이 못지 않은 열정으로 문인화의 새길 열기에 오늘도 붓을 놓지 않고 있다. 이 점이 그가 지닌 작가적 매력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며, 앞으로 제작될 작품에 기대를 갖게
하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희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예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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