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

[스크랩] 서예는 마음을 담는 그릇(함산 정제도 선생)

함백산방 2010. 12. 28. 19:16

작가의 세계3  함산 정제도


                       서예는 마음을 담는 그릇


  예술에서 외적형식은 '정신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어떤 모습의 그릇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 자체가 또한 정신의 문제이다. 함산(咸山) 정제도(鄭濟道) 선생은 오로지 서예라는 하나의 그릇에 40년 동안 지성(至誠)의 정신을 담아왔다. 그의 다져지고 또 다져진 지성(至誠)은 이제 자신만의 율동미 넘치는 행초(行草)의 그릇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행초에서 일가를 이룬 그의 서예입문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1947년 충남서산에서 출생한 선생은 일찍부터 예능방면에 두각을 나타내어 그림공부를 위해 서울의 서라벌고로 진학하게 된다. 초등학교 때 한글로 입상한 경력이 있있던 그는 고1 때 교내미전에 서예작품을 낼 사람이 없어서 서예작품 두 점을 출품하였는데 글씨 잘 쓴다는 소문이 금새 학교와 동네에 퍼지게 되었다. 어느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평소 눈여겨 보던 통장이 성북구 정릉동에 거주하던 효남(曉楠) 박병규(朴秉圭, 1925∼1994)선생을 소개해 주었다. 그 날이 1963년 5월 24일 이라고 또렸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선생의 서예역정은 정확하게 40년이 되는 셈이다.


  당시 효남선생은 국정교과서 총무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요일 새벽시간에만  서예지도를 해 주셨다. 그것도 새벽 4시로 못박혀져 있었다. 그래서 일요일 새벽시간을 지키기 위해 토요일 저녁이면 거의 밤샘을 하다시피 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준비를 하고 통금이 해제되기를 기다려 4시 가까이 되면 효남선생댁으로 달려가길 6∼7년. 그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의 먹갈기는 어김없이 계속되었다. 특히 효남선생은 먹갈기와 벼루갈기부터 예도에 입각하여 철저하게 가르쳤는데 먹은 똑바로 닳도록 하고, 벼루는 사용후 먹물이 한방울도 묻어있지 않도록 깨끗이 닦게 하였다. 이는 단순하게 벼루에 먹을 가는 것이 아닌 마음을 갈고 닦도록 지도하신 것이다.


 아무튼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선생의 필재는 두드러졌다. 고등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서예대회는 거의 윗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1965년 동아일보와 동방연서회가 주최한 제5회 전국남여고교 초·중·고교생 서예휘호대회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였고, 조선대학 미술실기대회에서 고등부 최고상을 수상하는 등 3번이나 최우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학창시절의 서예에 대한 관심은 대학진학 이후에도 계속되어 서라벌예대에서 공예를 공부하면서도 본격적으로 국전서예부에 출품하게 된다. 1969년 국전 18회에 입선하면서 시작된 공모전은 1981년 국전 30회 때 특선으로 마칠 때 까지 계속 되었다. 그 후 중등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도 하고, 1993년에는 서예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찍부터 일반인들에게 서예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KBS와 MBC에 출강한 지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변함없이 서예지도를 계속하고 있다.

 조지겸서풍에서 중체 혼용으로


 이제 선생이 공부해 온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처음 입문해서 <고신첩>을 익히는데 주력하였는데 매 주 열심히 임서해 가면 효남선생으로부터 교정을 받으면서 형태가 정확하다는 칭친을 많이 받곤 하였다. 그리고 조지겸의 글씨에 많은 매력을 느끼고 집중적으로 임서했는데 1969년 국전에 첫입선한 작품(도판 1)은 조지겸의 행서맛을 살려낸 작품이다. 72년 21회 입선작과 23회 입선작도 조지겸의 글씨였다. 그러나 78년 27회와 79년 28회 국전에서는 왕희지의 행서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출품하고 있다. 그 뒤 80년 29회 국전과 81년 30회 국전에서는 조지겸에 왕희지의 서풍(도판 2)을 혼융한 독특한 풍격을 선 보이고 있다. 즉 공모전 시기를 통해 살펴본 선생의 풍격은 초기의 조지겸풍에서 점점 왕희지를 가미한 새로운 풍격을 볼 수 있다.

 80년대 선생의 작품에서는 중체를 혼융한 서풍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제 조지겸의 느낌은 적어지고 왕희지를 바탕으로 한 독특한 양식의 서풍이 나타난다. 1987년 근역서가회전에 출품한 작품에서는(도판 3) 곡선의 여유로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95년 서울서예대전에 출품한 작품(도판 4)에서는 대소(大小) 강약(强弱)과 방원(方圓) 및 속도감이 느껴진다. 이시기에 昆盧寺의 편액과 주련은(도판 5) 중체 혼용의 정리단계라고 보여진다.


 최근의 작품에서는 획의 태세(굵고 가늘기)가 두드러져 보이고 몇 자씩 이어서 서사하기도 하며, 회소와 안진경, 그리고 왕희지의 서풍이 무르녹아 있다. 2002년 일월서단전에 출품한 행초서에서는(도판 6) 대소, 강약, 윤갈, 지속 등 행초서에서 활용할 수 있는 획의 아름다움이 한껏 발휘되고 있다. 2002년 제10회 서가협초대작가전에 출품한 작품에서는(도판 7) 지금까지 연찬해 온 모든 서가들의 중체가 혼융된 독자적인 함산선생 특유의 서풍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그야말로 40년을 법고(法古)한 뒤 화사하고 봉긋하게 머리를 내민 봄꽃처럼 창신(創新)의 멋을 내뿜고 있다. 여기에는 이제 미불의 변통과 왕탁의 기이함까지 녹아들어있어 더 실팍한 멋이 있다.


 선생의 서예는 해서에서 구양순과 안진경의 당법과 조지겸의 변법을 익혔고, 행서에서는 왕희지를 바탕으로 안진경과 유석암의 첩이 주는 맛을 가미하였고, 초서에서는 미불, 왕탁, 회소, 손과정의 장점을 취사선택하여 선생나름의 멋스런 풍격을 창출해 내었다. 글씨를 쓸 때나 작품을 제작할 때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는 선생은 초서도 천천히 서사해야 마음의 절주를 작품속에 담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공모전에 임할 때는 공부한다는 자세로 최소 500장은 제작해서 출품한다는 학서의 자세를 견지하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보여준 뛰어난 필재는 사실 이렇게 각고로 노력한 결과였지 우연히 얻은 성과는 아니었던 것이다.  

 지극한 정성이 형상화되어 나온 작품


노자는 "마음은 깊은 곳을 좋아한다[居善淵]"고 하였다. 선생의 성품은 담백하고 깊은 연못과 같다.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는 선생의 종교인 불교에서 공(空)을 가져왔고,  낚시를 통해 담백과 기다림의 미학을 체득화하였다. 하염없이 찌를 바라보면서 지구력과 욕심을 자제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물가에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인생과 예술이 하나가 되어 쓸데없는 욕심을 제거할 수 있는데 이런 기분으로 작품에 임하면 그 속에 속진이 제거된 나의 형상이 담겨있을 것이라는 논리다. 깊은 물은 그 속에 네모난 모양, 세모난 모양, 둥근 모양 할 것 없고 울퉁불퉁 튀어나온 돌까지 덮고 유유히 흘러간다. 담백의 깊음은 이와 같아서 조용하고 맑고 정숙함과 엄숙함이 섞여서 작품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앞으로 더 부지런히 임서해서 그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겠다는 선생의 장심구도(藏心求道)하려는 각오는 우리에게 밤과 낮이 지나야 다시 새벽이 온다는 폄범한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 저것 모두 할 수 있다는 아마츄어적인 생각으로 충분히 연찬하지 않고 설익은 작품을 선보이는 것은 마치 풋과일을 급히 출시하는 상인의 마음과 다름이 없다고 공박한다. 여기서 또한 선생의 뚜렷한 작가관을 엿볼 수 있다. 땀흘린 뒤 추수하는 농부의 마음과 같고, 수도하는 수도승과 같은 청정한 작가관을...

정태수 (이 글은 월간 서예문화에 실렸던 글입니다)
         
 

함산 정제도 ( 咸山 鄭濟道 )

1. 국전 특선 2회(29,30회)
2.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3. 88국제현대서예전 초대출품(예술의전당)
4. 국전30년전 초대출품(예술의전당)
5. 서예대전 심사위원 역임(서가협·미협)
6. 동아미술제 심사위원 역임
7. 저서:(중학교 서예· 고등학교 서예교과서 - 6차교육과정)

현주소 : 경기도 군포시 산본2동 대림A733-704
연락처 : 031)392-4682, 017-233-4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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