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

[스크랩] 철학이 있는 초서(간산 김광욱 교수님의 서예)

함백산방 2010. 12. 28. 19:16

                                               철학이 있는 草書


                                                                          정  태  수

  흔히 행, 초서는 서예의 꽃이라고 말한다.  특히 초서는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막힘없이 한숨에 내려쓰는 자유스런 묘미가 있다.  전, 예, 해서는 형태의 자세한 표현과 점획의 정적靜的인 표출이 우세한 반면에 행, 초서는 형태가 생략되거나 필획의 동적動的인 구성이 두드러진다.  현재 각종 공모전이나 개인전에도 초서작품의 숫자는 미미한 실정이다.  그것은 초서자체가 지닌 난독성難讀性과 학서學書의 어려움과도 관계가 있지만 전, 예, 해서 위주의 서숙교육으로 인하여 개인의 임의성을 잘 나타낼 수 있는 초서교육이 상대적으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초서가 갖는 이러한 환경적 소외에도 불구하고 20여년 학서과정의 대부분을 행, 초 연구에 전념한 계명대 서예과 김광욱 교수는 5월 16일 대구 벽아미술관에서 행, 초서 위주로 첫 번째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김광욱 교수는 경북 의성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일찍부터 한문과 서예에 접하게 된다.  공직에 계시던 부친은 엄격한 유가의 덕목을 훈육의 요체로 삼아 가르쳤고, 이로 인하여 한학과 서예는 자연스럽게 소년기의 정서 형성에 적잖게 이입되었다.


  중등학교 학창시절은 서예에 대한 열정이 움턴 시기로 심도있는 서예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한문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결국 대학과 대학원에서 모두 한문전공을 한 이유도 서예공부를 위한 주춧돌을 놓기 위해서 였다.
  1982년 석계石谿 김태균金台均 선생을 만나 본격적 서예수업을 받게 된다.  그 당시 석계 선생은 항상 서예는 학문과 병행될 때 품격이 격상된다고 가르쳤고, 현재까지 그 가르침을 지켜나가고 있다.  이번 출품작의 문장 내용도 평상시에 암송하는 한시와 사서삼경에서 가려낸 경구經句가 대부분이다.


  그의 평범하고 소박한 생활처럼 작품에 투영된 정체성 또한 가식과 인위성을 배제하고 있다.   지난 수년간 한국서단에서는 전,예 위주의 점획서법이 유행하여 도식화되고 몰개성적인 양식이 동어반복적으로 지속될때 그는 저만치 비켜서서 자신의 서예관을 고수하고 있었다.


  요즈음 예술면에서는 계층간의 위계가 허물어지고 문화적인 면에서는 수직적인 획일성에서 수평적인 다양성으로 급변하여 예술가 각자의 아이덴티티(정체성)를 요구하고 있다.  비록 소수이긴 하나 몇몇 서예인은 자기작품에 대한 정체성이 부족하여 자기가 쓴 화제내용도 모르거나 유명한 작가의 작품 모방에만 급급하는 작가도 있다.  이런 현상은 바로 서예가 갖고 있는 특수성, 즉 폭넓은 인문학적 지식과 사색에 바탕한 철학결핍이 빚은 결과이다.  이런 점을 미리 간파하고 주변학문을 닦아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 그는 아직은 들어낼 때가 아니고 공부할 때라고 말하면서 자기 표현을 절제하고 있다.


  이번 출품작에 대한 의미는 평소 학습해온 행, 초서의 일차적 정리에 있다.  그는 거창한 수식으로 광초를 섞어 세勢가 노출되는 서풍보다 안으로 침잠하여 잔잔한 울림을 담아내는 서풍을 선호한다.  이런 작품관의 이면에는 깊은 유가적儒家的 성찰이 내재內在하기 때문이다.  김교수와 만나 두어시간 이야기해 본 사람은 깊은 유가적 사색의 일단을 들을 수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송, 명宋明의 이학가들이 마음의 수양에 관해서 말할 때 마음을 공경스럽게 유지하는 공부(主敬)를 주로해서 말하거나, 마음을 머무르게 하는 공부(靜)를 주로 해서 말하기도 하지만 두 가지가 다 중요하다고 한다.  그는 외물에 끌림이 없게 마음이 머물려면(無欲故精) 마음에 공경심을 가지면 저절로 텅빈듯 머무름(虛靜)을 갖게 된다는 주자의 논리를 수용하여 생활화하면서 그것을 그대로 작품에 반영한듯 하다.


  일반적으로 초서는 무질서하고 난잡하게 보이지만 분방함 가운데 유기적인 엄격한 질서를 갖추고 있다.  속速과 지遲, 끊어짐과 이어짐, 허虛와 실實이 융합하고 여러 서체가 혼융된 서예의 정수라고 하는 이유도 온갖 변화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변한 가운데 정靜을 강조한 점이 그의 작품 곳곳에 드러난다.  평소 연구실에 가서 서가에 책이 정리된 것을 보면 들쭉날쭉 하지 않고 가지런하게 꽂혀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심정필정心正筆正 이라던가 바로 성정과 작품이 일치하는 반증이리라.


  김교수가 즐겨 임서하는 법첩은 왕희지척독집이다.  왕희지를 근간으로 당나라 손과정의 서보, 안진경, 유용, 왕탁 등의 제가들을 섭렵하였으나, 아직은 고전연마에 충실한 단계라고 겸사를 덧붙인다.  출품작 35점(예서 1, 전서 1, 갑골문 1, 해서 1) 중 대다수가 초서다.  이 분야에 더욱 천착하여 이론체계를 갖추고 전문서적도 발간할 예정이다.


  초서는 인식하기 어렵고 쓰기 어려우며 읽기 곤란하다.  이러한 단점이 있으나 인간의 감정과 필법의 제한을 벗어나 개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글씨 쓰는 외의 다른 취미가 없다는 김광욱 교수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쉬운 조형언어로 우리에게 철학이 담긴 초서를 제시하고 있다.  평소 주위에서 경상도진국이라는 말을 듣는 그는 작품에서도 무덤덤 하게 초서의 진국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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