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

[스크랩] 일일신의 예술혼 속에 피어난 모암체(윤양희 선생님의 작품세계)

함백산방 2010. 12. 28. 19:09

耳順의 書境

 
                                               日日新의 예술혼 속에서 피어난 茅菴體

 

                                                        정태수 (계명대 예술학과 박사과정 수료, 월간 서예문화 편집주간)


1.들어가며


동양의 고전인 『대학』에는 "진실로 어느날 새로워지려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는 글이 있다. 일찍이 중국의 탕왕이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세숫대야에 이 글귀를 새겨두고 조석으로 마음을 다스렸다고 한다. 이러한 정신으로 자신과 나라를 경영한 탕왕은 사직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임금으로 역사에서 자리매김되고 있다.

예술가의 정신세계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예술가는 모름지기 항상 일일신의 정신으로 현재의 세계에서 한 걸음 나가 펼칠 자신만의 세계를 찾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는 동서양 미술의 변천 과정과도 괘를 같이한다. 서양미술의 변화 과정이 대상의 모방에서 대상의 재현(再現. represent)으로, 재현에서 다시 작가의 표현(表現. expression)으로 변하면서 예술가들의 표현 영역이 확대되어 왔고, 우리의 오랜 전통예술인 서예도 작가의 작품 변화를 기준으로 보면 재현[臨書]에서 표현[創作]으로 진행된 유사한 패턴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다.

평생을 교육과 연구, 그리고 서예술에 매진해 온 모암 윤양희(茅菴 尹亮熙, 1942∼ ) 선생님(이하 선생으로 호칭)은 항상 일일신의 예술혼으로 재현과 표현의 갈래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예술 양식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 온 대표적인 중진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순(耳順)을 맞이한 모암 선생은 일제 치하의 막바지에 태어나 조국의 광복과 민족상잔의 비극을 어린 시절에 겪었고, 근대화 운동으로 시끄러웠던 1960년대와 70년대의 20여 년을 사범학교 졸업 이후 교단을 지키는 교육자의 길을 걸었으며, 1980년대는 한국교육개발원에서 10여 년 동안 우리나라 미술교육의 입안자로서 미술교과서를 저술하거나 미술교육과정을 연구하였고, 1990년대 이후 다소 풍요로워진 경제 여건에 따라 서예붐이 일어나면서 서예학에 대한 연구 열기가 움틀 때 계명대학교 서예과로 부임하여 후학을 지도하는 한편 작가로서 자신의 표현 양식을 창출하기 위해 영일이 없다. 모암 선생은 직장을 옮기더라도 항상 서예계를 맴돌았고 오늘날 마침내 작가로서 우리 앞에 우뚝하게 다가와 있다.

이 글에서는 모암 선생의 삶의 궤적과 더불어 재현과 표현의 영역을 독자적 양식으로 소화한 그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모암 선생은 필자의 은사이기 때문에 비교적 자세히 기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반면에 필자의 우둔함으로 인해 선생의 지고한 예술세계를 제대로 조명할 수 없어 훼손될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주관적인 견해보다는 객관적 자료에 의해 선생의 작가세계를 소개하고, 작품은 양식적 변화에 따라 3기로 나누어서 기술하고자 한다. 즉 입문해서 보고 배우던 학서기, 공모전을 통해 작가의 의식이 드러나기 시작한 모색기, 모암체를 비롯한 새로운 자형을 발표하는 성숙기로 나누어 서술하고자 한다.

2. 교육자와 예술가의 길


선생은 충청남도 청양군 운곡면 모곡리 695번지에서 1942년 11월 14일 아버지 윤주태(尹柱台)씨와 어머니 이종순(李鍾淳)씨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교육자였기에 자식들도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교육계에 투신하게 되었는데 장남인 모암 선생을 이어 동생인 선희는 공주대학교 교수, 매부는 충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선생은 이러한 가풍에 따라 일찍부터 책 읽고 글씨 쓰는데 관심이 많았는데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급우들과 함께 환경정리를 하거나 담임 선생님을 도와서 괘도를 만들게 되면 그림 밑에 글씨 쓰는 일은 거의 그의 차지가 되었다. 모암 선생의 초등학교 친구들도 글씨 잘 쓰는 친구로 기억할 만큼 글씨 솜씨를 인정받았던 듯하다. 상급학교로의 진학은 당시 농경사회에서 선망의 대상이자 부친의 소원이기도 하였던 대전사범학교로 결정되고 무난히 입학하였다. 그 때 전국의 각 도에는 사범학교가 몇 개 없었고 학업 능력이 우수한 학생들만 입학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면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직업인이었기 때문에 우수한 학생들이 지원을 하였기 때문이다. 모암 선생은 사범학교 재학 시절 한성기(韓性祺)라는 스승을 만나면서 훗날 서예가가 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받았다. 그 분은 국어를 지도하면서 시도 발표하였는데 오늘날까지 그 분에 관한 일화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 학창시절 많은 감명을 받았던 듯하다. 이렇게 서예가의 꿈을 키워가던 학교생활은 1962년 졸업을 하게 되고, 졸업기념으로 그 연령층에서는 드물게 그림 그리는 친구와 더불어 서예·회화 2인전을 대전문화원에서 열게 된다. 그 당시 고등학교 학생 신분으로 연 2인전을 통해 일찍부터 자질을 주위에 선보였던 셈이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모암 선생의 교육자로서의 삶은 서울에서 초임발령을 받은 1963년 이후 창천·수색초등학교를 거쳐 영등포여중·경기상고·경복고에서 20여 년의 교직생활로 이어진다. 그 와중에도 1971년 국제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1973년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면서 「금석학의 근대사적 전개」라는 서예관계 석사학위 논문을 낼만큼 서예는 모암 선생의 의식에서 항상 지근의 거리에 있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이유도 서예작품에서 사용되는 문장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 선문(選文)의 폭을 넓혀야 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학위논문의 연구 테마를 서예쪽으로 잡은 것도 서예에 관한 식견을 전문화시켜야 되겠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대학의 은사였던 양명문(楊明文) 교수를 통해 종로 YMCA 2층에서 철농서회(鐵農書會)를 열고 후진을 지도하던 철농 이기우(鐵農 李基雨, 1921∼1993) 선생을 소개받고 철농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전각과 서예를 지도 받게 된다.
그러다 1981년 한국교육개발원의 연구원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잠시 교육일선에서 물러나지만 그 곳에서도 초·중·고등학교의 미술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개발하는 연구에 주력하게 된다. 특히 모암 선생이 이 곳에 13년 동안 근무하면서 서예계를 위해 두 가지 기여를 하였는데 하나는 그 이전까지 4학년부터 시작하던 서예교육을 3학년부터 배울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개편하였고, 다른 하나는 4차 교육과정 이전에는 초등학교의 서예교본이 궁체 위주로 짜여 있었는데 여기에 판본체를 넣어 한글서예의 다양한 표현과 감상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또한 이 기간 동안 「한글서예 지도방법 개선을 위한 연구」, 『바른 한글 서예』 등 몇 권의 연구물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1994년 계명대학교 서예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선생의 삶은 다시 교육자와 예술가의 길로 환원된다. 계명대에서는 한글과 전서 및 전각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이 분야에 상당한 연구 성과를 내 놓았다. 예컨대 2001년  출판된 『쉬운 판본체』가 그것이다. 이 책은 15세기 우리 한글의 점획과 자형의 특징을 분석하여 쉽게 판본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끄는 지침서이다.

 

3. 鐵農을 만나면서 시작된 서예


이제 이순에 이르도록 서예를 연찬해 온 모암 선생의 작품세계를 3기로 나누고 각 분기마다 작품에서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먼저 처음 붓을 잡고 글씨 쓰는 것이 좋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임서하던 사범학교 학생시절 2인전을 열면서 출품한 작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962년 졸업할 때 제작된 <교육의 목적>(도판1)은 한글흘림체로 대전사범학교 삼학년이라는 낙관 글씨가 뚜렷이 보인다. 그 당시 일중 선생의 한글체가 보급되던 시기인데 그 분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고, 학생의 글씨로는 탄탄한 필력, 수획의 처리가 익숙한 점, 결구의 짜임새가 안정적임을 느낄 수 있다. 모암 선생은 사범학교 시절 한성기 선생을 만나면서 서예에 입문하였고, 그 분이 내려 준 <지존고원(志存高遠)>을 열심히 임서하였다. 즉 입문기에는 한자서예와 한글서예를 함께 공부하였는데 한글에 관심이 더 많았다. 이 때에 입문한 한글서예는 훗날 처음 국전에 출품할 때도 한글작품을 출품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 독창적인 한글서예 표현의 초석이 되었다. 아무튼 이 전시를 통해 당시 주위 사람들은 앞으로 서가로 필명을 높일 것이라고 예측하였다고 한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초임 발령을 받아 교편을 잡는 한편 대학에 진학하여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본격적인 서예공부에 진입하게 된다. 모암 선생의 서풍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철농 이기우와 사승관계를 맺은 과정은 『까마』(윤양희, 2000년 3월호 76쪽)의 기록에 의하면 "양명문(楊明文) 시인과 박두진(朴斗鎭) 시인의 소개"에 의해 비롯된다. 당시 철농은 오세창, 이한복의 필의를 이어받아 서예와 전각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철농의 예술세계는 "서예·전각을 통하여 인간 본연의 원시적인 고졸과 소박미 그리고 현대적 추상미를 접목시켜 독자적 세계를 확보한 '철농체'의 완성에 참된 가치가 있다(김양동, 위의 책, 75쪽)"는 기록처럼 70년대 한국서단에서 10대 서예가로 손꼽히는 작가였다. 그는 무엇보다 1,125과를 수록한 『철농인보』를 발행할 정도로 전각에서 자가풍을 이루었고, 이러한 전각적 안목을 바탕으로 전서와 예서에서 독자적 서풍을 형성하였다. 1964, 5년경 서단에서 전각의 예술성에 대해 관심이 많지 않은 때 철농의 문하에 입문한 모암 선생은 철농의 체본에 의해 한자서예를 익혀 나가며 예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대표적인 한비(漢碑)들을 임서한다. 전각도 처음 시작할 때는 철농 스타일로 시작하였지만 차츰 자신의 인풍을 구축해 간다. 그것은 등완백의 전서와 서삼경, 오양지, 오창석의 전서를 체계적으로 익히면서 학습된 전서의 골격을 전각 작품에 응용하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렇게 10여 년을 공부한 뒤 1974년 한국전각협회가 창립되자 그 해 11월 창립전에 출품한 인풍은 오창석을 염두에 둔 인풍을 띄고 있다. 시인 이흥우(李興雨)는 이 당시의 인풍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어느날(1975년) 모암이 나를 찾아와 나의 성명 석자를 양각으로 새긴 자그마한 석인(石印) 하나를 내놓았는데 인풍은 오창석에 가깝고 얼마간 치졸스러운 듯하면서도 고담한 맛이 있었다(1992년 개인전 도록 평문)" 즉 모암 선생의 학서기 작품 양식은 이와 같이 예서에서는  한비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전각에서는 청대 전각가의 인풍을 수용하려고 노력한 시기였다.

4. 法古를 통한 再現의 시기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 동안 공부한 결과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각종 공모전은 법고한 실력을 검증 받는 계기가 되었다. 1981년 동아미술상전에서 전각 <세불아연(歲不我延)>(도판 2)으로 동아미술상을 수상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한인(漢印)을 바탕으로 한 만백인(滿白印)의 자법(字法)으로 주문공의 권학문을 무밀하게 포치하였다. 모암 선생은 인장의 근원은 한인이라고 생각하고 전각삼법(篆刻三法)의 모델이 되는 한인 연구에 깊이 몰입하였는데 오늘날 선생의 인풍을 한인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한자서예에서는 1984년 미술대전에서 한자서예 <완당선생 시>로 특선을 할 때와 1985년 미술대전에서 작품 <소동파선생 구>(도판 3)로 우수상을 수상할 때 서삼경의 전서에서 오창석(吳昌碩)의 서풍으로 옮겨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선성(線性)과 자형(字形)면에서 보면 오창석과 오대징의 특성이 융합된 느낌을 받는다. 즉 우수상을 수상한 작품 <소동파 구>는 철농풍의 작품에서 오창석풍으로 옮아가는 과도기에 나타난 대표적인 작품이다. 오창석의 <서령인사기(西 印社記)>와 <수진택허당기(修震澤許塘記)>에 준거를 둔 규범적인 작품으로 기필과 수필에서 오창석의 특징을 재해석해내고 있다. 특히 1988년 제23회 한국서예가협회전에 출품한 <유곡(幽谷)>(도판 4)에서는 법고의 준령을 넘어서서 개성이 보이는 서풍을 보이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해 이흥우는 "마치 이른봄에 돋아나는 실한 두릅나무의 새로운 순끝처럼 모암의 개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1992년 1회 개인전 도록 서문) 용필면에서는 전각의 영향으로 철필이 주는 금석기를 중봉에 대입하여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전서의 대칭적 균형감을 상실하지 않고 있다. 즉 이 시기의 한자서예 작품에서 보이는 특징은 철농의 영향을 받고 있으나 서서히 중국 명가들의 장점을 취사선택하여 독자적인 서풍을 열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 한글서예에서는 손재형, 김충현, 서희환의 서풍을 참고하고 있다. 손재형의 글씨에서는 전서적인 획질을, 김충현의 글씨에서는 훈민정음과 월인천강지곡을 기준으로 한 개성적인 서풍을, 서희환의 글씨에서는 월인천강지곡과 손재형의 획질을 섞은 고졸한 직선기조를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여기에 한자서예와 전각에서 체득한 모암 선생의 독자적인 자형과 획질을 추가하여 기필과 수필에서 날카로움이 엿보이면서 납작한 자형을 선보이고 있다. 1987년 동아일보 미술동우회전에 출품한 <박목월 시>(도판 5)에서는 앞에서 거론한 세 사람의 자형에서 벗어난 점을 가로획과 세로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가로획은 일찍이 위부인이 말한 대로 '천리에 진운을 친 구름'처럼 변화하고 세로획은 '오래된 등나무'처럼 획질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더구나 한글 속에 한자가 섞여 있어도 장법상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한글과 한자를 조화시키고 있다. 특히 1989년 제24회 한국서예가협회전에 출품한 <산도화>(도판 6)에서는 좌우를 맞추어 판박이처럼 서사하던 판본체의 익숙한 장법에서 벗어나 행과 열이 뒤섞인 독특한 장법과 변화가 많은 세로획으로 새로운 자형의 태동을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모암식 판본체가 태동한 배경은 한국교육개발원에서 미술교육을 입안하면서 학교의 서예교육이 궁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판본체의 서예성을 제고하고 한글서체를 다변화시켜야 하겠다는 모암 선생의 소신에서 비롯되었다. 즉 이 때부터 한글서예에 대한 이론적 연구와 창작의 두 바퀴를 함께 가동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모전을 통해 모색기를 보낸 모암 선생의 서풍은 한자의 경우 오창석과 철농, 한글의 경우 일중과 소전을 바탕으로 한 독자적 개성미를 갖추기 시작한다.


5. 일일신의 예술혼 속에 피어난 모암체


90년대를 넘어서면서 모암 선생의 작품은 한층 성숙되어 일변하고 있다. 무릇 예술가가 맹목적으로 과거를 답습하는 것은 "사산(死産)된 아이를 낳는 것과 같다."는 칸딘스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누구보다 선변(善變)에 대한 의식이 높았던 모암 선생은 철농의 서예적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각고의 노력 끝에 작품상 변모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에 관해 이규일은 1996년 도록 서문에서 "모암은 전각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철농을 사사했지만 서든 각이든 철농 그늘을 벗어나 있다. 좀 과장하면 너무 철농을 닮지 않아서 이 사람이 철농의 제자인가 하고 의심이 갈 정도다. 그만큼 제것 만드는 일에 열심이다."고 말하는가 하면, 이흥우는 1992년 도록 서문에서 "철농의 제자 중에서 모암은 아마도 가장 철농을 닮지 않은 글씨를 쓰는 애제자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제평들을 집약해 보면 90년대를 넘어서면서 철농의 각풍과 서풍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개성미를 살려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전각에서는 한글의 자법과 장법에 특징적인 인풍을 보여주고 있다. 2001년 발표된 <한 팔십 산후에야>(도판 7)에서는 시제를 전각으로 새겼는데 획질과 금석미가 어우러져 예스런 고서를 보는 듯한 이미지를 풍긴다. 이에 대해 정하경 시인은 "쪽에서 나온 물감 쪽보다 더 푸르고, 스승의 터전 위에 우뚝 솟은 교목"(2001년 도록 서문) 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철농의 인풍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서 독창적인 한글전각을 시도하는데 그것은 그 동안 연찬해 온 판본체가 뿌리를 이루고 있다. 음각에서는(도판 8) 굵직하고 중후감이 있는 판본체의 점획을 살려 칼맛을 내고 있고, 양각에서는 고졸함이 스민 필획맛을 내고 있다.

한자서예의 경우 예서에서는 장천비, 을영비, 화산묘비와 광개토왕릉비에 하소기의 서풍을 융합하고 거기에 전각적 시각을 반영하여 필획이 경쾌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서풍(도판 9)을 보여주고 있고, 전서에서는 오창석의 전서를 응용한 자형에 가로획과 세로획의 굵기를 다르게 하고 자간의 여백을 다르게 하여 어시메트리(asymmetry, 비대칭)한 느낌을 주는 서풍(도판 10)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한글서예의 경우 모암 선생의 판본체는 서예계에서 독창성을 인정받고 있다. 기필을 모나게 하거나 수필을 뚝 부러지게 하면서도 적절하게 원필과 굴곡이 있는 획질이 섞인 1993년 <구룡폭포>(도판 11)가 비교적 표준적인 모암 선생의 판본체 작품이라면 기필과 수필을 약화시켜 몽당빗자루를 보듯이 고졸한 느낌을 주는 2001년 <고백>(도판 12)은 한걸음 더 나간 변형작품이면서 행과 열은 맞추고 있다. 그러나 1996년 작품 <수화선생말씀>(도판 13)에서는 가로와 세로를 맞추지 않고 기필과 수필도 그다지 의식하지 않으면서 처리하였지만 혼연일체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의식은 금싸라기 같은 고전을 소화한 뒤에 나온 것이다. 그것은 선생이 저술한 여러 권의 저작물에서 확인된다. 그 중에서도 판본체에 관한 지속적인 연구를 집대성한 『쉬운 판본체』와 『바른 한글서예』는 선생의 역작이다. 이 책에는 고전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학습을 통해 신풍을 열어 나가야 된다는 교육자적 안목이 구석구석 배어 있다. 차근차근 배우되[下學上達] 날마다 쉬임없이[日日新] 나가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예술관이자 교육관인 것이다. 또한 한글서체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모암체'(월간 서예문화 2001년 12월호 18쪽 참조)일 것이다. 모암체의 전형은 1996년 발표한 <수정가>(도판 14)이다. 이 체는 조선 후기 필사본에 나타나는 필획의 특성을 옥누연가의 자형 특성과 조화시켜 만든 모암 선생 특유의 서체이다. 2001년 발표한 <서한체>에서는 상하 연결이 더 활달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이 글씨에서는 전각의 칼맛을 한글의 중심획인 세로획의 기필에 도입하여 칼로 도려낸 듯한 날카로운 기필을 함으로써 궁체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보완하고 있다. 이미 국내의 공모전에 적잖게 등장하는 모암체는 점획의 구조적인 이해를 통해 서예를 가르치고 공부해야 한다는 선생의 지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최근 작품 발표에서 가끔씩 선보이는 한글과 한자의 '일자서(一字書)' 형식은 단조롭고 보수적인 국내의 작품 형식에 대한 또 다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발표한 <여(如)>에서 몇 개의 점획으로 조형성을 강조한 간결한 이미지는 선생의 날로 새로워지려는 작가 정신을 충분히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 나오며


작가는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사유와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영역을 갈망한다. "개인은 우주 속에서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모아 나간다."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말처럼 모암 선생에게 있어서 서예는 그의 생(生)과 사(死)를 순환하는 우주(cosmos)이다. 그가 이순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지켜왔던 그만의 인생관과 미의식은 다른 어느 작가보다 사색적이고 구조적이다. 교육자와 서예가의 길을 걸어오면서 잠시도 붓을 놓지 않고 전각과 한글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독특한 자신의 세계를 열어놓았다. 선생의 작품세계는 전각에서 철농의 기법을 바탕으로 서삼경과 오창석풍을 수용하여 독자적인 인풍을 열어 나가고 있고, 전서와 예서에서 청대 명가들의 서풍을 바탕으로 전각적 철필의 도흔을 도입시켜 신풍을 보여주고 있으며, 한글에서는 판본체와 모암체에서 서단에 새로운 화두를 제기하고 있다. 모암 선생에게 있어서 서예에 관한 탐구는 철필에서 붓으로 붓에서 철필로 돌아오면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자기 표현을 위한 화두였던 것이다. 세인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스승의 속박과 구속의 고리를 작가 스스로와의 고독 속에서 굳건히 이겨낸 모습은 마치 신록의 오월처럼 늘 새롭게 느껴진다. 그리고 다시 스승의 입장에서 항상 잔잔한 말투로 애정 어린 지도를 해 주시는 모암 선생은 당신의 글씨를 어설프게 흉내내기보다는 고전에 천착하여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열어 나가도록 제자들에게 주문한다.
 
 
 이 글은 월간까마 잡지에 실렸던 글입니다.

 작품은 여기를 클릭하세요http://www.daechonnet.co.kr/calligraphy/ancestor/%A4%B7/%C0%B1%BE%E7%C8%F1.htm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