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스크랩] 2. 신비한 탄생(2)

함백산방 2010. 10. 7. 22:03
2. 신비한 탄생(2)


  공식기록에 의하면 4월 10일에는 국왕이 양제(禳祭, 돌림병을 물리쳐 달라고 지내는 제사) 지낼 것을 명하는 하교가 있었고 6월 29일경에 가서야 병세가 누그러지기 시작한다는 보고가 있으며, 그 사이 죽은 어린이들의 숫자는 알려진 것만 전국에서 3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추사는 월성위궁의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태어나면서도 예산 향저에서 첫울음을 터트려야만 했던 듯 하다.


  어떻든 그는 천연두와 가뭄이 극성을 부리던 정조(正祖) 10년 (1786년) 병오(丙午) 한여름 6월 초 3일에 월궁(月宮)의 막내손자 김노경의 장자로 태어난다. 그의 탄생은 탄생 그 자체만으로도 손이 귀한 월성위궁의 큰 경사였을 터인데 더구나 팔봉산 정기를 타고나서 비범하리라는 칭송까지 받게 되니 집안의 기쁨은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조부는 막내에게서 난 손자이지만 마치 적장손(嫡長孫)이나 탄생한 것처럼 기뻐하고 그에 어울리도록 이름을 정희(正喜)라 짓고 자(字)를 원춘(元春)이라 했다.


  이토록 신비와 축복속에서  태어난 추사는 과연 주변의 기대대로 점차 자라면서 천재성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돌을 지나면서 말과 글을 함께 터득해 나갔고 세살 때 벌써 붓을 쥐고 글씨 쓰는 흉내를 내는데 그 집필(執筆)이 하두 야무져서 부친이 시험하고자 어느 날 붓장난에 열중하고 있는 그의 등 뒤로 몰래 가서 붓을 확 잡아 채었으나 몸뚱이가 붓에 딸려올지언정 붓은 놓치지 않았다.

                                                 (영조의 글씨 :진체 열성어필첩) 

  이에 장차 명필(名筆)이 될 줄 알고 그 교육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조선시대 명문가(名文家)들이 대개 그랬던 것처럼 그의 집안도 대대로 명필이 끊이지 않아서 일종의 가학(家學)을 이루고 있었다.


  고조할아버지 흥경(興慶), 중조할아버지 한신(漢藎), 할아버지 이주(?柱), 아버지 노경이 모두 필재(筆才)를 타고났다. 특히 증조부 월성위는 송설체(松雪體)와 한석봉체(韓石峯體)를 익혀 청경수려(淸勁秀麗, 맑고 굳세고 빼어나게 아름다움)하고 기품있는 글씨를 써서 일찍부터 영조(英祖)에게 필법으로 더욱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행장에 이렇게 적고 있다. <초년에 송설체(松雪體)를 익히고 만년에는 종요(鍾繇)와 왕희지체(王羲之體) 및 한석봉체로 사법(師法)을 삼아서 심획(心劃)이 주경(?勁)하고 자법(字法)이 방정(方正)했다.


  이에 육상묘향대청(毓祥廟香大廳)에 흥유심(興惟深) 세 글짜를 왕명으로 쓰는 외에 육상묘상시죽책문서사관(毓祥廟上諡竹冊文書寫官), 저경궁상시시인전문서사관(儲慶宮上諡時印篆文書寫官), 정성왕후시책문서사관(貞聖王后諡冊文書寫官), 인원왕후애책문서사관(仁元王后哀冊文書寫官) 등 왕실전례(王室典禮)에서 서사(書寫)의책임을 도맡다시피 했다.

                             (김한신(월성위, 추사 증조부) 書 육상묘상시죽책문)

  할아버지 이주(?柱)도 가법(家法)을 이어 당시 진체(晋體)라 불리우던 조선화된 종왕서체(種王書體, 종요와 왕희지 서체)와 촉체(蜀體)로 불리우던 조선화된 송설체(松雪體, 원나라 조맹부 서체의 이칭)에 모두 능했는데 특히 그의 진체정서법(晋體正書法, 중국 진나라 왕희지가 쓴 해서체)은 영조의 어필체(御筆體)와 방불하니 월성위(月城尉) 묘비명(墓碑銘)의 글씨에서 그 실제를 확인할 수 있다.(계속)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茂林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