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스크랩] 3. 천재를 기르다(1)

함백산방 2010. 10. 7. 22:04
3. 천재를 기르다(1)


  이 가문이 이와 같이 갈수록 명필이 되어갔던 것은 계속 외가쪽 혈통이 명필인 것과도 크게 관련이 있을 듯하다.


  조부 이주(?柱)의 외조부는 선조(宣祖)의 제오부마(第五駙馬)인 금양위(錦陽尉) 박미(朴?,1592~1645)의 현손(玄孫) 금원군(錦原君) 박사익(朴師益, 1675~1736)이었고 부친 노경(魯敬)의 외조부는 역시 선조 제이부마(第二駙馬)인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1582~1657)의 현손(玄孫) 사휴당(四休堂) 윤득화(尹得和, 1688~1759)였다. 이들 가문은 부마도위(駙馬都尉) 때부터 대대로 서화에 능했던 집안들이었다.

  따라서 추사의 혈통 속에는 서화에 모두 정통했던 선조의 그 아래 양 도위가(都尉家)의 예술성까지 더 보태어졌다고 모아야 하니 추사의 에술적 천품은 결코 우연하게 타고난 것이 아니었다. 이런 그의 예술적 천재성은 일찍부터 팔봉산정기설(八峯山精氣說)롤 말미암은 주변의 촉망속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의해 확인되고 가학(家學)에 의한 철저한 수련을 거치게 된다.

                                     (김이주(추사의 조부) 글씨 : 월성위 묘표)

  당시 사대부들이 거치는 기본교육인 유가칠서(儒家七書)와 사서(史書)의 강학(講學)을 받은 것은 물론이려니와 월성위(月城尉) 이래 수장해온 다벙면의 장서(藏書)와 서화 전적을 통해 안목을 착실히 넓혀간 것이다. 전통학예에 대한 기초수련이 이와같이 착실히 무르익어 가는 동안 추사에게는 그의 천재성을 발휘시킬 수 있는 새로운 인연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큰 아버지 노영(魯英, 1747~1797)이 영조 50년 갑오(1774)에 갑과 제1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급성장하니 추사가 태어날 당시에는 이미 당상(堂上)의 품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본래 그는 월성위 장손으로 벌써 24세(1770) 때에 영조가 선공감(繕工監) 가감역(假監役) 벼슬을 내릴 정도로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때 이조에서 즉시 발령을 않는다 하여 14년 동안이나 이조판서를 지내는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1725~1790)의 조카 박상덕(朴相德, 1724~1779)을 즉일 파직하고 충청수사(忠淸水使)로 강등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북학의 선구자였던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6)의 재당질서(再堂姪?, 7촌 조카사위)로 일찍부터 처가의 영향 아래 당시 신사조이던 북학에 눈을 돌려 북학의 시조인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문하에 종유(從遊, 학덕이 높은 이를 따라 놀고 배움)하고 있었다. 이것이 정조 당시 왕실의 분위기이기도 했다.


  일찍이 담헌은 영조 41년(1765)에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 서장관(書狀官)이던 작은아버지 홍억(洪檍, 1722~1809)의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연경(燕京)에 가서 당시 고증학(考證學)의 대가이던 엄성(嚴誠, 1733~?), 육비(陸飛,1719~?), 반정균(潘庭筠) 등과 친교를 맺고 북학에 뜻을 두게 되는데 뒷날 그는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으로 있으면서 왕세손이던 정조에게 이를 알려 정조로 하여금 북학에 심취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의 기능을 확충하고 연소신예한 북학파들을 대거 등용해 북학진흥에 심혈을 기울이도록 후원해주니, 자연히 연암문하의 제자들이 규장각을 독점하기에 이른다. 소위 시문사대가(詩文四大家)로 알려진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냉재(冷齋) 유득공(柳得恭, 1748~1807),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 강산(薑山) 이서구(李書九,1754~1805)를 비롯하여 금릉(金陵) 남공철(南公轍, 1760~1840) 등이 그들이었다.(계속)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茂林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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