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스크랩] 3. 천재를 기르다(3)

함백산방 2010. 10. 7. 22:06

3. 천재를 기르다(3)


  월성위가에서 오직 한사람 남은 장년 남자인 노경이 대비의 배려로 선공부정(膳工副正, 종3품)의 직에 봉직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사도 잠시일 뿐 월성위궁을 내리덮은 암운은 걷힐 줄 모르고 계속 불행을 몰아와서 어린 추사를 비탄 속에 빠뜨려 놓고 어떻게 헤어나오는지 지켜보는 듯했다.


  16세 되는 해인 순조원년(1801) 신유 8월 21일에는 추사에게 둘도 없이 자애로웠던 모부인 기계유씨(杞溪兪氏)가 불과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아래로 14세, 8세 난 두어린 남동생을 거느린 추사의 애통한 심정은 이제까지의 그 어떤 경우보다도 더욱 참담했을 것이다.


  추사는 역사상의 모든 위인들이 그랬듯이 이런 극한 상황에서 더욱 용기백배했던 듯 아우들도 격려하며 학예수련에 몰입해 간다. 그래서 벌써 20세 전후에서는 그의 문명 필명이 도하(都下)에 자자하고 사행을 통해 연경(燕京)에 까지 알려지는데 이는 박제가의 성실한 지도와 격려 그리고 찬양이 크게 작용한 탓이었다.


      (추사 유년기 필적 : 상 부주 서(上 父主 金魯敬 書) 추사가 어린시절 아버지에 올린 글)

  그런데 아직도 월궁(月宮)을 덮은 어두운 구름의 작난은 그치지 않아 20세 되는 해인 순조 5년(1805) 을축 1월 12일에 정순대비(貞純大妃)의 국상(國喪)을 만난지 한달만인 2월 12일에 초취부인(初娶夫人) 한산이씨(韓山李氏, 1786~1805)와 사별하게 된다. 모친 상사(喪事)에 대한 지통(至痛)을 겨우 진정할 만하자 상처하는 아픔까지 맛보아야 하는 인간적인 불행을 추사는 어떻게 극복해 나갈을지 생각만 해도 아득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비탄의 연속 속에서도 추사일가의 남자들은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학문연마에 심혈을 기울였던 듯하니 이 해 10월 28일에는 홍천현감(洪川縣監)으로 있던 노경이 문과에 급제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온 경사였다. 왕실에서도 월성위궁의 참화를 애석해 하던 차라 순조는 특별히 승지를 보내 화순옹주(和順翁主) 내외사당에 제사를 드리게 하고 노경의 문과급제를 축하한다.


  그런데 추사는 모처럼 찾아온 집안의 이런 경사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사별의 고통으로 가슴을 쳐야 했다. 정순대비에 의해 종성(鍾城)으로 유배됐다가 3년만에 풀려나서 겨우 일년남짓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스승 박제가가 10월에 그 스승인 연암 박지원의 임종을 보고 돌아와서 그대로 병석에 누워 돌아간 것이다.


  이제까지 그를 사랑했던 모든 가족들이 그의 곁을 떠나가더니 이제는 스승까지도 그를 버리고 갔다. 엄청난 가정적인 불운이 연속적으로 밀어닥쳐 절망하고 좌절할 때마다 격려하고 방향을 제시해 망연하다가도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게 해준 명석하고 자상하며 항상 신선했던 정열적인 스승이 그렇게도 열망하던 자신의 학예성취를 다 지켜봐 주지도 못하고 홀연히 떠나간 것이다.


  이제까지 혈육을 잃은 슬픔을 무수히 당해온 추사였지만 정신적인 의지처를 잃은 지금처럼 절실하게 허전하고 쓸쓸함을 통감한적은 없었을 듯하다. 세상에는 오직 자기밖에 남지 않았다는 고독감이 절박하게 그를 엄습했을 것이다. 더구나 다음해인 순조 6년(1806) 병인 8월 1일 양모인 남양홍씨(南陽洪氏) 마저 59세로 돌아갔음에서랴! 이제 추사는 인정에 집착해 사랑한다거나 미워한다거나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며 인생 자체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절감하고 다만 학예수련에 심신을 바쳐 그 성취만을 목표로 삼으리라 결심했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고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며 돌아간 분들의 시랑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여겼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다른 일은 돌아보지 않고 학예에만 전념하는 생활자세로 일관하게 된다.(계속)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茂林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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