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스크랩] 1. 명문(名門)의 후예(後裔)(3)

함백산방 2010. 10. 7. 22:01
1. 명문(名門)의 후예(後裔)(3)

  

  이로부터 학주의 자손들은 현요(顯要, 드러나기도 하고 중요하기도 함)의 직책을 거치면서 왕실과 내외 친척 관계를 맺어 명실상부한 국중 명문으로 성장해 간다. 즉 그의 장증손(長曾孫)인 흥경(興慶, 1677~1750)은 영의정을 지내고(1735), 흥경의 말자(末子) 한신(漢藎, 1720~1758)은 영조(英祖) 차녀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1758)에게 장가들어(1732년 11월 29일) 왕실의 내척(內戚)으로 위복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특히 화순옹주는 진종(眞宗)의 동복(同腹) 누이로(정빈(靖嬪)이씨 소생) 영조가 각별히 사랑하던 따님이었다. 그래서 영조는 옹주가 태어났던 영조 잠저(潛邸)인 창의궁(彰義宮, 천연기념물 제4호 백송이 있던 통의동 35번지 일대)에서 얼마 멀지 않은 적선방(積善坊)에 월성위궁(月城尉宮, 현재 정부종합청사 북쪽 길건너)을 마련해 주고(1735) 내당(內堂)을 종덕재(種德齋), 외헌(外軒)을 매죽헌(梅竹軒) 소정(小亭)을 수은정이라 어제(御製)어필(御筆)로 써서 하사할 정도였다.


  월성위는 장옹주(長翁主)가 하가(下嫁)전에 요절해 실제 의빈(儀賓)의 장(長)이었다. 그러므로 왕실전례(王室典禮)를 솔선봉행(率先奉行)할 기회가 허다했는데 그때마다 상사(賞賜)가 푸짐한 위에 영조의 각별한 사랑으로 내사(內賜)가 적지 않았고 정빈방(靖嬪房)의 유산이 옹주이외에는 갈 데가 없었던 까닭에 월성위궁은 탐재를 하지 않아도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에 월성위는 동대문 밖 검호(黔湖, 지금의 금호동 일대)에 독서지소(讀書之所)를 마련했고 충청도 예산(禮山) 용산리(龍山里) 오석산(烏石山) 일대를 친산(親山)으로 살들이기도 한다. 용산은 삽교천(揷橋川) 하류에 위치해 내포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육해로의 교통요지니 서울에서 서산(瑞山) 선영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한다.


  이곳을 고가로 사들여서 부모의 산소를 쓰고 묘사(墓舍)와 농사(農舍)를 지어 향저(鄕邸)로 삼았던 것이다. 이 집들을 지을 때 충청도 53군현이 1간씩 부조해 53간집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니 당시 월성위가의 위복(威福, 위세와 복락)이 어떠했던지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나 월성위가 후사없이 39세에(1758년 1월 4일) 요절하고 화순옹주도 동갑나이로 그를 따라 14일을 굶어 순절하니(1월 17일) 왕녀의 열행은 조선왕가에 처음있는 장거(壯擧, 장한 일)였다.

  

                                            (영조 어진 : 조석진, 채용신 모사)

  이에 영조(65세)는 월성위의 부탁으로 후사가 된 월성위 장형(長兄) 한정(漢楨, 1702~1764)의 셋째 아들 이주(?柱, 1730~1797)를 각별히 보살펴 가문을 일으키게 하니 이주는 온갖 청요(淸要)의 직을 거쳐 좌참찬에 이르고 그 여러 아들 조카들이 차례로 등과해 벼슬길에 오른다. 장자 노영(魯永, 1747~1797)은 예조참판, 차자 노성(魯成, 1754~1794)은 수원판관, 넷째 아들 노경(魯敬, 1766~1838)은 이조판서에 이르고 본생 조카인 노응(魯應, 1757~1824)도 병조판서에 이른다.


  이와 같이 홍욱의 종손계열이 왕가의 내척으로 권귀(權貴, 권세와 부귀)를 누리는 데 반해 홍욱의 말자 계통에서는 그의 고손인 한구(漢?, 1723~1769)의 따님이 영조 35년(1759)에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로 책봉됨으로써 한구는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이 된다. 그리고 한구의 아우인 한기(漢耆, 1728~1792)는 공조판서, 한로(漢老, 1746~1797)는 지중추부사를 지낸다.


 사촌인 한록(漢祿, 1722~1790)은 은일로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의 의발을 받은 호파(湖派) 산림(山林)의 거두였는데 이제 산중 재상의 예우를 받기에 이르렀다. 뒤미처 영조 말년경부터 정순왕후의 실권이 점차 비대해지면서 왕후의 남형(男兄, 오빠) 구주(龜柱, 1940~1786)가 세도를 잡으러 했으나 정조의 현명한 처단으로 미수에 그쳤다.


  그러나 순조(純祖, wodnk 1801~1834) 초년 정순왕후가 섭정하면서부터 한록(漢祿)의 아들 관주(觀柱, 1743~1806)는 우의정으로 세도재상이 되고 관주의 아우 일주(日柱, 1745~1823)는 호조참의, 사촌 면주(勉柱, 1740~1807)는 우참찬이 되며 정순왕후 사촌 용주(龍柱, 1755~1812)는 동부승지가 되니 일족의 권귀는 당세를 관절(冠絶)했다. 따라서 당시 한다리 김문의 번영은 비록 내포 일대에서 뿐만 아니라 경화거족(京華巨族)들 사이에서도 갑을을 다투게 되는데 추사는 이렇게 명문 거족화한 한다리 김문 중에서도 왕실의 내척으로 일찍부터 가문의 중심이 돼왔던 월성위가의 혈통을 이어받고 태어났다.(계속)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茂林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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