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스크랩] 2. 신비한 탄생(1)

함백산방 2010. 10. 7. 22:01
2. 신비한 탄생(1)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어느 곳에서 탄생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남겨져 있지 않다. 다만 문인(門人) 민규호(閔圭鎬, 1836~1878)가 고종(高宗) 5년(1868)에 추사의 문집인 <완당선생집(阮堂先生集)> 5권 5책을 동문(同門)인 남상길(南相吉, 1820~1869)과 공동 편찬해 내면서 그 첫머리에 붙인 <완당김공소전(阮堂金公小傳)>을 지어 싣는데 어머니 기계(杞溪) 유씨(愈氏, 1767~1801)가 임신한 지 24개월 만에 낳았다는 신비스런 내용만 전할 뿐이다.


  민규호는 추사 고모의 손자로 문인인 동시에 5촌 숙질(叔姪)의 친척 관계가 있었고 또한 ‘징빙할 것이 없으면 믿지 않는다.(無徵不信)’는 고증학풍(考證學風)을 추사로부터 철저하게 전수받은 고증학도였다. 뿐만 아니라 여러 민(閔)씨를 대표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실각시키고 스스로 세도(勢道)를 잡은 민씨세도(閔氏勢道)의 선두주자로 개방을 적극 추진했던 선구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견문이 결코 허탄(虛誕)할 리 없는데 이와 같은 기록을 남기어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완당김공소전>에 기록된 다른 내용들이 모두 합리성을 띠고 있으며 또한 그 근거를 공사기록(公私記錄)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어서 우리는 더욱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추사의 향저(鄕邸)가 있는 예산(禮山) 지방에서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추사탄생신비담(秋史誕生神秘談)에 이르면 민규호의 기록이 글을 꾸미기 위한 의례적인 수사나 고사(故事)를 모방한 의도적 조작이 아니라 널리 퍼져있는 속설의 채록(採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안심할 수 있게 된다.


  추사가 태어나는 날 향저(鄕邸)의 뒷뜰에 있는 우물물이 갑자기 말라버렸고 후산(後山)인 오석산(烏石山)은 물론이거니와 그 조종산(祖宗山)인 팔봉산(八峯山, 錦北正脈이 줄기져 내려가다 예산과 홍주 사이에서 요새를 이루어 놓은 산)의 초목조차 모두 시들었다가 추사가 태어나자 물은 다시 샘솟고 초목은 생기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추사가 팔봉산의 정기(精氣)를 타고난 천재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내용의 사실 여부야 어떻든 이런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으니 추사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이곳 예산 향저에서 출생한 것이 분명하다. 부친은 월성위(月城尉)의 막내 손자인 김노경(金魯敬, 당시 21세)이었고 모친은 김제군수 유준주(兪駿柱, 1746~1793)의 따님인 기계유씨(杞溪兪氏, 당시 19세)였다.


  추사가 태어날 당시 월성위궁의 사정을 살펴보면 왕가의 외손인 할아버지 김이주(金?柱, 57세)가 궁(宮)의 주인으로 대사헌(大司憲)의 중책을 계속 맡으면서 건재해 있고 할머니 해평윤씨(海平尹氏, 58세)가 아직 내정(內庭)을 총지휘하고 있었으며, 그 밑으로 큰아버지 노영(魯永, 40세)과 큰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 39세)가 소주인(小主人)의 위치에 있었으나 아직 후사(後嗣)가 없는 상태였다. 둘째아버지 노성(魯成, 33세)과 둘째어머니 연일정씨(延日鄭氏, 33세)씨 사이에는 이미 사촌형 교희(敎喜, 1781~1843)가 나 있었으니 분가(分家)해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노성(魯成)은 이미 2년 전에 동궁익위사(東宮翊衛司)로 출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셋째아버지 노명(魯明, 1756~1775)과 셋째어머니 풍산홍씨(?山洪氏 1755~1775)가 11년 전에 연이어 돌아가면서 3세 소아로 남겨 놓았던 일점혈육인 사촌형 관희(觀喜, 1773~1797)가 이제 14세의 어엿한 소년으로 성장해 있을 뿐이었다.


  관희(觀喜)는 그 모친 풍산홍씨가 큰어머니 남양홍씨의 이종사촌아우였으므로 거의 큰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자랐을 터이니 물론 월성위궁에서 동거(同居)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가정형편으로 이주(?柱) 부부는 막내아들 내외를 층층시하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 주기 위해 예산 향저로 내려보냈을 가능성도 있다.


  24개월 회임(懷妊)이 사실이라면 이는 병으로 생각했을 터이므로 향저로의 피접이 권장되었을 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해 봄부터 천연두가 크게 창궐해 5월 11일에는 왕세자(王世子)인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까지 이 병으로 돌아가는 불상사가 있었으므로 이를 염려한 배려로도 생각할 수 있겠다.(계속)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茂林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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