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 김상옥

시인 김상옥의 익살-하

함백산방 2008. 1. 10. 10:58
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 <18> 시인 김상옥의 저항정신(하)
친일 경찰국장 호통쳐 내쫓아
낙상으로 수차례 수술… 생활고 겪기도
먼저 떠난 아내따라 닷새만에 '하늘로'

 
  김상옥 시인과 60여년간 해로했던 부인 김정자씨의 다정했던 모습.
초정은 63년 부산에서 서울로 이주했다. 인사동에 아자방이란 이름의 표구점 겸 골동상을 차렸다. 자녀들 교육문제가 남아 있고 교사직은 은퇴한지라 수입원을 따로 만들어야 했다. 이런 용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조향과의 고소사건 이후 시조시인 초재호가 시와 그림에 전념하라면서 준 당시 돈 거금 3백만 환이 계기가 된 것이다. 서화를 표구하고 골동품도 사고 팔고 하는 사이에 시화전시회도 가졌다. 전국순회전시를 하면서 부산에 모처럼 들렀다.

1973년 필자가 사회부장으로 있는 국제신보를 찾아 왔다. "지금 내가 시화전시를 위해 부산에 내려 왔으나 실은 한 가지 마지막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 소망이란 자기가 평생 수집한 조선조 백자류, 연적류 등 골동품을 사회에 기증하고 싶다는 것이다. 너무 뜻밖의 제의여서 그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봤더니 단서 하나가 붙었다는 것이다. 자기골동품을 기증받으려면 이를 수장, 전시할 건물이 필요하고 그 건물을 지을 땅을 내놓아야 한다는 조건이다. 자신은 그 속에 방 한 칸만 쓰면 족하다는 얘기다. 술을 입에 댄 적이 없는 성품이어서 부산 사는 동안 잦은 접촉은 없었지만 막상 이런 제의를 듣고 보니 구미가 당겨 대서특필, 사회면 머리기사로 내보냈다. 당시는 국제신보의 독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때여서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결과는 얻은 것이 없었다. 이런 조건에 딱 맞아 떨어질 독지가를 만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이제 세월이 한 세대를 넘게 흘러 돌이켜 보면 초정이 과연 그런 소망이 이뤄지리라 믿고 제의한 것일까. 그 오랜 뒷날 초정의 마지막 측근인 역사학자 해양대의 김재승 씨로 부터 그의 소장품들을 몽땅 예상액의 5분의 1값으로 처분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초정은 낙상으로 여러 번의 수술을 받고 휠체어 없이는 운신 못하는 말년을 보냈다. 아마도 생활고에 그 같은 결정을 내린 듯하다.

초정은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집착이 남달라 평생의 정신적 반려로 삼았다. 이른바 그는 상고 취향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도전과 저항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부산여중에 갓 부임해 왔을 때 5·16군사 쿠데타로 모든 교육공무원은 마치 중국의 인민복 같은 옷을 입어야했다. 교장이하 예외가 없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를 알면서도 김상옥 선생 하나만은 더블 보턴의 양복을 멋지게 차려 입고 명찰도 달지 않은 채 태연히 출근하는 것이었다. 교장의 지시도 어겼다. 초정은 교장에게 "나를 파면하라. 내가 파면되면 나는 재건복을 입지 않고 명찰도 달지 않아 파면되었다"라고 쓴 팻말을 내 등 뒤에 달고 다닐 것이라고 소리쳤다. 그렇게 되면 군사당국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 김상옥 한 사람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을 학교 측이 가졌을 법하다. 그렇게 하여 재건복 입지 않은 유일한 교사가 된 것이다.

특히 초정은 이승만에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광복 이후에 친일한 자를 요직에 기용했기 때문이다. 정부수립 이후 통영의 다방에 앉아 있었는데 신임 경남경찰국장이 초도 순시차 통영에 왔다가 부하들을 데리고 이 다방에 들어 왔다. 그 경찰국장이란 자가 불과 몇년전 일제 시대 때 자신을 포함하여 동료들을 경찰에다 잡아다 투옥시키고 모진 고문을 자행했던 바로 그 자였다. 불같은 초정이 벌떡 일어나 "저 놈이 누구냐 , 네 이놈!" 소리를 지르며 의자를 들어 올려 때리려하는데 다방 주인이 급히 말리는 사이 그 자는 줄행랑을 쳤다. 초도순시는 엉망이 되고 그 날로 중단되었다. 그는 이승만을 한번도 대통령이라고 불러 본 적도 없고 대통령으로 인정한 적도 없었다.

1933년 보통학교를 어렵게 졸업한 그는 통영에 있는 작은 인쇄소에서 인쇄공으로 사회에 첫 발을 디뎠다. 지방의 소규모 인쇄소였기에 혼자서 북치고 장고치는 식으로 문선, 조판, 해판에 이르는 전 과정을 도맡아해야 했다. 보통학교시절부터 시를 쓰고 재간을 키워오던 터라 인쇄공으로 일하면서 지방문화계 인사들과 친교가 이뤄져 나름대로 보람을 느꼈다. 윤이상은 초정보다 나이가 조금 위였으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경찰에 쫓길 때 피신도 같이 다녔을 정도라면 짐작이 가는 사이다. 시인 김춘수, 조연현도 같은 또래의 친구였고 청마 유치환과 화가 전혁림도 가까운 사이였다. 인쇄공에서 서점경영으로 발전했다.

마침내 1939년 '문장'지에 시조 '봉선화'가 가람 이병기의 추천을 받고 동아일보에 시조 '낙엽'이 당선되어 문인으로 얼굴을 내밀게 되었다. 19세 때였다. 초정은 보석 같은 언어의 선택으로 빛나는 시의 탑을 쌓았다. 2004년 10월 31일 85세를 일기로 아내가 돌아간 지 닷새 만에 그의 뒤를 따랐다.



입력: 2006.06.11 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