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 김상옥

시인 김상옥이 익살-상

함백산방 2008. 1. 10. 10:57
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 <17> 시인 김상옥의 익살(상)
"예수는 도적… 나는 예술의 킹…"
특유의 해학… 전세 살며 고가 백자 구입
12세때 시 발표, 반일로 세차례 감옥살이
조향과 법정싸움 벌여 사과 받아내기도

 
  가람 이병기, 노산 이은상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적인 시조시인이었던 김상옥 선생의 생전 모습.
초정 김상옥이 부산 남성여중에 재직할 때 처음 찾아 뵈었다. 고교 졸업반 학생으로서 그의 시조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그런 용기를 부린 적이 없는 주제에 문단의 대가를 만나볼 생각을 실천에 옮겼던 것은 내겐 대견한 일이었다. 필자가 그의 시조집 '초적'을 비롯, 시집 '고원의 곡' '이단의 시' 등 처음부터 나온 작품집을 죄다 가지고 있다고 했더니 몹시 반가워하던 기억이 새롭다.

그는 내 이름을 수첩에 기록했다. 그때 받은 미소가 몹시 따뜻하여 가슴에 오래 남아 있었다. 초정이 처음 시를 발표한 것은 12세에 쓴 동시 '꿈'이다. 이 시인과 가장 오래도록 친근했던 역사학자 김재승 씨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1932년 통영보통학교 4학년 때 프린트 판 교지(여황의 여록)에 발표한 것이다. 대단한 조숙이다.

그는 일찌감치 타고난 재간의 소유자였다. 초정은 그토록 아름다운 언어의 주술사로서 우리 시사, 특히 시조문학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나아가 시적 재능의 발휘에만 만족한 것이 아니었다. 남다른 민족애를 지닌 애국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였다. 일제 때 사상범으로 세 차례나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장기간 할 정도로 정의감, 민족애를 가슴에 불덩이처럼 안고 살았다. 일본 경찰에 쫓겨 고달픈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우리의 수많은 진정한 애국지사들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나 미온적 행동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성격은 칼날 같은 데가 있지만 그런 성깔은 함부로 부리지 않았다. 예컨대 부산시절인 1960년, 동아대 교수이자 시인 조향이 주관한 부산예술제를 가리켜 "예술제가 아니라 마술제"라고 비꼬아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조향이 발끈한 것 까지는 이해하지만 급기야 모 일간지에 초정을 두고 남의 시를 훔치는 '도벽시인'이라고 모함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초정의 격분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무학이나 다름없는 초정이 대학을 배경으로 업은 교수의 힘이 막강한 줄 알지만 그렇다고 굴할 수는 없었다.

김상옥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조향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사회저명 인사들과 문인들, 특히 월탄 박종화, 미당 서정주를 비롯하여 문단 중진들까지 흔쾌히 서명에 동참했다. 이미 피란시절에 서울 문인들을 홀대하여 인심을 잃은지 오래인 조향을 상대한 싸움이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재판정에서 조향은 원고를 벌하길 바라지 않는다고 했고, 초정은 "조향을 엄벌할 것"을 바란다는 단호한 자세를 취했다. 과오를 인정한 조향으로부터 화의 제의를 받아들여 서울과 부산의 일간지에 사과광고를 내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초정은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아 교사자격증이 있을 리 없다. 그는 만년 강사로 지냈지만 어느 정규교사보다 든든하고 존경받는 그런 교사생활을 영위했다. 그의 주옥 같은 작품들이 교과서에 몇 편씩이나 실려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시·서·화 삼절에다 전각까지 그 솜씨가 비범하여 찬탄을 들을 만했다. 그런 반면 너무 엄격한 나머지 제자를 일상적인 정분에 얽매여 문단에 추천한 일이 없다는 사실, 정부가 주는 문화훈장 같은 걸 거절하는 기개에 이르면 보통사람이 쉬이 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초정은 또 특유의 재치와 해학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해 양가가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의 주례를 맡은 적이 있다. 자신은 크리스천이 아니지만 성경을 들고 갔다. 양가 가족과 친지들이 무슨 말을 하느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첫 마디가 "예수는 이 지상에서 가장 큰 도둑입니다"로 시작되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말자 참석한 교인들은 모두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자못 비분강개하는 분위기였다. 혼란스러워질 판이었다. 곧 이어 "생각해 보세요. 인류역사상 예수만큼 오래도록, 그리고 많은 인간의 마음을 도둑질해간 분이 또 있습니까? 마음을 많이 뺏기면 뺏길수록 행복한 것이 우리 신자들 아닙니까?"라고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이만한 비유법을 쓰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화가 났던 교인들이 웃으며 돌아갔다는 일화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스스로 자신을 한국의 '스리 킹' 중의 하나라고 했다. 권력의 킹은 박정희, 돈의 킹은 이병철, 예술의 킹은 단연 자기라고 했다. 그 이유란 이렇다. 자신이 2000만 원짜리 전셋집에 살 때 4000만 원짜리 조선조 백자를 샀다. 이병철이 백자나 청자를 10억 원을 주고 사는 것은 쉽다. 자신의 경우처럼 전셋집값의 배를 던져 사는 것은 그만큼 예술품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가 그 점에선 왕임을 자부한다는 익살이다.



입력: 2006.06.04 1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