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부'의 시인 초정 김상옥<3>
2007-07-23 09:30:00 |
그런데 16세 되던 해에 있었던 이야기는 어쩌면 황당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진주에 정기환이라는 30대 중반의 지식인이 있었는데 그가 진주로 어린 시인 초정을 초청했다는 것이다. 그때 초정은 뛰어난 동필(童筆)로 알려져 신동 소리를 들으면서 귀염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초정으로는 그때의 진주 행보가 난생 처음의 나들이이기도 했다.
진주에 가 보니 정기환은 퇴기(退妓)의 집에 어린 초정의 거처를 마련하고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더라는 것이다.초정 곁에는 초정 또래의 동기(童妓)도 한 사람 앉혀 놓더라는 것. 그 방에는 초정이 전에 정기환에게 써준 당시(唐詩) 족자 한 폭이 걸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닷새를 지내는 동안 초정은 생일을 맞이했는데, 그날밤 휘황한 달빛 아래 벚꽃이 만발한 남강둑을 그 동기와 함께 거닐었다. 그 소녀를 생각하며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달빛에 지는 꽃은 밟기도 삼가론데
취하지 않은 몸이 걸음조차 비슬거려
이 한밤 풀피리처럼 그를 그려 울리어라
숙성힌 상황에 숙성했던 작품으로 읽힌다.
초정의 청년기는 마냥 한가하지가 않았다.1936년부터 1939년까지 송맹수(宋孟秀), 김기섭(金杞燮), 장응두(張應斗), 윤이상(尹伊桑) 등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세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그 뒤에도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 찍혀 계속 감시를 받았다.
그 무렵 다시 헌병대의 동태가 이상하게 느껴져 윤이상과 서울로 도망을 쳤다. 당시 윤이상은 통영군의 촉탁으로 있다가 미곡창고 서기로 삼천포에 있었다. 증명서 한 장 없이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올라간 초정은 화신 백화점 건너편 이규복이라는 충청도 노인이 경영하는 작은 도장포에 취직했다.그 노인이 공교롭게도 서대문 형무소 바로 옆에 살아 그 집에서 안심하고 출퇴근을 했다.
윤이상은 상경하여 등사 원지를 긁는 필경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때 윤이상의 친한 친구 가운데 최상한이라는 지휘자가 있었다. 6,25가 닥치자 최상한은 월북했는데 그 사람 때문에 윤이상이 북한에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초정은 도장을 판 덕분으로 위창(韋滄) 오세창(吳世昌) 선생을 만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초정은 향리에서 서당에 나가 한문 수업을 받았고 한의사로서 글씨와 시에 능했던 진산(眞山) 이찬근(李瓚根) 선생, 그림, 글씨, 전각에 뛰어난 완산(玩山) 김지옥(金址沃) 선생 등의 문하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예인의 삶을 살 수 있었던 행운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어떤 예술이든지 정교하고 지미(至美)한 경지를 열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가람 이병기(李秉岐)는 18세때 초정이 쓴 <청자부>를 보고 "글이 너무 절정에 올라가 있어 이런 글을 쓰면 단명한다'고 말한 대로 초정은 편편마다 언어의 지미함을 드러내 보였다. "보면 깨끔하고 만지면 매촐하고/ 신(神)거러운 손아귀에 한 줌 흙이 주물러져/ 천년 전 봄은 그대로 가시지도 않았네."(<청자부> 첫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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