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부'의 시인 초정 김상옥(2)
2007-07-16 09:30:00 |
광복 직후 출판이 된 초정의 첫 시집 ‘초적草笛’은 편집, 교정, 문선, 조판, 인쇄, 장정, 판각, 접지, 제본의 전 과정을 초정 혼자 손으로 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초적’의 첫머리에 ‘독서의 명(銘)’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
꿀벌이 꽃을 대하듯 책을 대하라
벌은 달고 향기로운 꿀을 길어가되
그 꽃잎 하나 아직 상한 적 없었나니!
1960년대 중반쯤이었을까? 이 시를 접하고 감동을 받은 어느 분이 전국 도서관 사서회의에서 긴급 동의를 하여 이 작품의 출처를 물었다는 것이다. 마침 회의 마감 전에 다른 누군가가 그 작품은 김상옥의 ‘독서의 명’이고 실려 있는 시집은 ‘초적’이라고 답을 했는데 다음 날 시에 대해 물었던 그 사서(司書)는 초정 시인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방문하고, 책은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고 영하의 추위에도 방은 냉돌이고 난로도 전화도 없는 것에 충격을 받은 사서는 다음날 당장 목수와 미장이, 전화국 공원들을 시인의 집으로 들여보냈다. 초정은 이때의 심정을 “이리하여 내 가엾은 서울살이는 하루아침에 천지개벽을 이루었다”고 말한 바 있다.
1970년대 초반의 일이다. 신세계 미술관이 초정에게 초정 시서화전(詩書畵展)을 열겠다는 제의를 했다. 카탈로그의 권두사는 이경성(李慶成)씨가 쓴다는 것이었다. 개전 전야에 이경성씨가 찾아와 작품을 일별하고는 “이것은 단지 문학의 여기(餘技)가 아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세계 전시를 마치자 미도파에서도 전시를 권유했다. 전시회는 신세계처럼 성황을 이루게 되었는데 개전 첫날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소설가 박완서(朴婉緖)씨가 그의 딸과 함께 찾아와서 불쑥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딸이 봉직하는 학교의 월급봉투였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대학교 4년, 근 20년 형설의 공을 쌓은 딸애의 첫 수확으로 초정의 서화를 산 것이었다. 초정은 “ 이렇게 귀한 화료는 아마 저 거장(巨匠) 미켈란젤로도, 화성畵聖 솔거도 받아 본 적이 없을 것이다.”고 술회했다.
1973년 4월 초정은 자신의 시집 가운데 초호화판 시집(아마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시집 중에 최고의 장정?) ‘삼행시 육십오편’(三行詩 六十五篇)을 낸다. 초정은 스스로 쓰는 시조를 ‘삼행시’라 했는데 이는 시조를 현대시 개념으로 끌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다. 그 무렵 시집 한 권 값이 3백원인데 이 시집은 정가가 5천원이었다. 이렇게 고가(高價) 의 시집을 낸 까닭을 초정은 “그것은 아마 불우했던 나의 소년 시절의 간고(艱苦)에 대한 보상 심리의 작용이 아니었던가 싶다”고 측근에게 밝힌 바 있다.
그 호화판이 나올 무렵 초정은 진주를 자주 방문했다. 삼현여자고등학교 창립자인 시조시인 아천(我川) 최재호(崔載浩) 교장을 찾아오는 것인데, 아천 교장은 그때마다 소장 시인 세 사람을 어김없이 분위기 좋은 밥집에 불러 앉히고 ‘문학의 밤’을 열었다. 그 세 시인은 박재두, 김석규(金晳圭), 그리고 필자였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초정의 시집을 한 권씩 기념으로 샀다. 이때의 이야기는 추억으로 많이 남아 있다. 어쨌거나 초정은 우리 문단에서 필자의 시를 아주 정확히 인정해 주는 사람 중에 한 분이었다.
'초정 김상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자부의 시인 초정 김상옥 4 (0) | 2008.01.06 |
---|---|
백자부의 시인 초정 김상옥 3 (0) | 2008.01.06 |
백자부의 시인 초정 김상옥 1 (0) | 2008.01.06 |
초정 김상옥선생 시정신 우뚝 (0) | 2008.01.06 |
초정 김상옥 시인 시비 건립 (0) | 2008.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