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 김상옥

백자부의 시인 초정 김상옥 1

함백산방 2008. 1. 6. 08:03
'백자부'의 시인 초정 김상옥(1)


2007-07-09 09:30:00
 초정(草丁) 김상옥(金相沃. 1920-2004)은 일찌기 교과서에 실렸던 시조 ‘백자부白磁賦’로 인해 '백자부'의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1920년 경남 통영시 항남동에서 아버지 김덕홍(金德洪) 과 어머니 진수아(陳壽牙) 사이에 6녀 1남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와 여섯 누나들은 외아들 하나를 위해 희생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그의 거침 없는 성격,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외고집은 이런 환경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었다.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정이 부유하거나 중류 정도로 살아가는 데 걱정이 없었다면 초정의 일생은 별로 드러나지 않는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을 것이다.

 아버지 기호(箕湖) 김덕홍은 선비였다. 직함도 없고 땅뙈기도 없는 김덕홍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은 갓을 만드는 일이었다. 통영갓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김덕홍이 만드는 갓은 격이 높아, 철종 임금의 국상 때 사용한 백립은 김덕홍의 집에서 만든 것이 가장 많았다. 통영 갓방 중 '선창골 갓집' 이라면 초정의 부친이 하던 갓집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갓을 양산하는 것이 아니고 정성을 다해 조금씩 만들어내므로 언제나 집은 가난했다. 김덕홍이 병석에 눕게 되자 초정의 집안은 하루 아침에 궁색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초정이 여덟살 되던해 1927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초정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부터 서당 송호재(松湖齋)에 들어갔다. 학동 중에 초정이 제일 어렸다. 그러나 시험만 치면 '괴(魁)'를도맡아 차지했다. '괴'란 무리들 중에 으뜸이라는 뜻이다.

 서당에서는 하나의 강(講)이 끝나면 시험을 보았고 그 결과 '괴'를 한 사람은 '괴턱'을 내야 했다. 떡을 찌고 술을 빚어 훈장과 학동들을 대접하는 잔치였다. 생계를 꾸려 가기에도 힘 들었던 어머니 진씨는 괴턱을 감당하기 위해 가락지를 잡혔다. 그래서 초정은 '괴'를 받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서당을 그만 두게 되는 결정적 인 이유는 '군자君子' 취임식 때문이었다. 서당 송호재 뜰에는 앵두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발갛게 익은 앵두가 학동들의 군침을 삼키게 했다. 훈장은 앵두를 함부로 따 먹는 행위를 엄금했다. 앵두는 비록 한 그릇이라도 큰 섬에 따서 담아야 이듬해 더 많이 열린다는 것, 따서는 성주신과 서고 앞에서 천명한 후 골고루 나눠 먹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느날 훈장이 잠시 출타한 틈을 타 학동들 중 머리 큰 아이들이 앵두를 따 먹을 궁리를 했다. 자신들이 따 먹으면 날벼락을 맞을 게 뻔하니 나이가 어리고 공부를 잘해 훈장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던 초정에게 앞장 서서 따도록 부추겼다. 초정은 기왕 딸 바에야 많이 따서 골고루 나눠 먹어야지 하면서 , 나무에 있는 앵두를 거의 다 따버렸다.

 훈장이 돌아와 처참해진 앵두나무를 보고 진노했다. 범인을 추궁하자 한참 있다가 초정이 나섰다. 훈장은 "하고도 안했다고 발을 빼는 놈은 도적이다. 그러나 여럿을 위해 안하고도 했다고 나서는 놈은 군자다. 상옥이는 비록 어리나 군자다." 훈장은 서고 앞에 '군자'를 좌정시키고 다른 학동들은 마당에 무릎을 꿇리고 세 번 읍하게 하는 등의 '군자 취임식'을 거행했다. 이 내용은 장경렬 편 ‘불과 얼음의 시혼’(2007. 태학사)에서 인용했다. 앞으로 초정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을 중심으로 하여 필자와의 체험을 참고로 쓰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