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 김상옥

백자부의 시인 초정 김상옥 4

함백산방 2008. 1. 6. 08:06
'백자부'의 시인 초정 김상옥<4>


2007-07-30 09:30:00
 1995년 11월 4일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이 독일 베를린의 발트 병원에서 영면했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11월 14일 그의 고향 통영에서는 젊은 시절 함께 교류했던 향인들이 모여 추도식을 열었다. 추도 위원장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던 친구 초정 김상옥이 추대되었다.

 초정과 윤이상은 닮은 점이 많다. 초정이 스스로 왕임을 자처한다면 윤이상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정신의 자유를 구가했다. 초정은 말하기를 "윤이상은 김일성의 귀빈으로 북한을 드나들었으나 사실은 고향 통영과 애증을 동시에 심어 준 한국땅을 죽을 때까지 그리워했어요. 세상을 뜨기 얼마전에 한국에 와서 연주를 할 목적으로 일본에까지 왔으나 우리 정부가 끝내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와 공해상에서 멀리 고향을 바라보다가 되돌아 갔어요." 하고 회상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한사람의 뛰어난 음악가를 나라 밖으로 내 몰았던 것은 이땅의 편협한 예술 풍토였고, 밖에 나가 있는 그를 '북의 사람'으로 만들어 간 것은 우리 정부 기관이었지요" 라 말하기도 했다.

 윤이상이 국내에서 활약 할 때 음악 평론가로 상당히 큰 영향력을 주고 있던 한 분이 예술도 결과에 못지 않게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했던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정규대학을 나오지 못했던 윤이상의 학벌을 두고 헐뜯었던 것이리라 그 바람에 자존심이 상해 유럽으로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서 잠시 윤이상의 이력을 훑어 보자. 1956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파리 음악원에서 P. 르벨과 T. 오벵에게서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운다. 1957년 8월 서베를린 음악대학에서 R. 슈바르츠 쉴링, J. 루퍼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우고 B. 블라허에게서 작곡을 배운다. 1860년 서독 프라이부르크에서 중국 한국의 궁중음악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했고 1962년에는 관현악곡 ‘바라 婆羅’가 베를린 라디오 방송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된다. 1963년 북한을 방문하고 1965년 서독 하노버에서 ‘오 연꽃 속의 진주여’를 초연하게 된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중앙정보부는 그를 임의 동행 형식으로 귀국시키고 재판 결과 그는 무기징역을 받게 된다. 이후 동료 음악가 교수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 정부 도움으로 석방이 된다. 1971년 8월 뮌헨 올림픽의 문화행사로 오페라 ‘심청’이 발표되고 1977년 서베를린 예술대 교수로 임명된다. 1995년 죽기까지 수많은 작곡 발표와 수상이 이어졌다. 만년에 사람들은 그를 유럽의 현존 5대 작곡가로 불렀다.

 초정은 "독일에 있던 그가 북한으로 들어가게 된 동기는 단순했어요. 역시 고향 사람으로 북한에서 음악가로 활약하고 있던 최상한(崔相漢)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만나러 간거지요. 김일성이 그를 극진하게 환대하고 이용한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한 쪽에서는 내몰고 잡아 가두는데 한 쪽에서는 이해하고 존경하고 환대하니 그런 사람을 끌어 안은 모습이 한국인들과 정부의 눈에 이상하게 비춰진 것이지요." 라고 윤이상 편에 서서 말했다.

 초정은 일제 때 보통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이고 윤이상은 제도권 국내 학교로는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전문으로 하는 일의 그 전문성으로 인해 전문성이라는 언덕에 큰 깃발 하나씩을 꽂아 놓았다. 초정의 경우 그 수련이 힘들고 외로운 것이어서 그도 모르는 사이 주변에서 왕따가 되어 있을 수도 있었으리라. 문단 주변이나 지역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둘러보아도 이점 쉽게 확인이 된다.

 큰 소설가는 소설의 내공쌓기 때문에 그들 동창으로 부터는 외면과 질시의 입방아에 쓸려 들어가기 일쑤이고, 성공했던 지역 유행가 가수의 경우에도 입방아에 언제나 오르내리기를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