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 김상옥

백자부의 시인 초정 김상옥 5

함백산방 2008. 1. 6. 08:06
'백자부'의 시인 초정 김상옥(5)


2007-08-05 17:49:17
 초정은 문학의 길에서만은 언제나 당당했다. 그의 연조에 비슷한 어떤 시조작가가 신문사 주변을 맴돌면서 신춘문예 심사위원이라는 허명을 얻으려 한 것을 심히 못마땅히 여겼다.

 어느날 젊은 기자가 초정을 만난 자리에서 "도대체 시가 뭡니까?" 하고 느닷없이 물었다. 그러자 초정은 "기자 양반,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 놓고 내가 당황하기를 바랬어요? 시가 뭐냐는 그따위 질문은 국민학교 2학년만 되면 그 나름으로 답할 수가 있어요. 반면에 평생 시를 써온 노인이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질문이요, 나도 그것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지, 그걸 질문이라고 해요?"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시인들에 대한 빈정거림을 두고 그 대상이 언론인이라 하더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성미를 지녔던 것이라 할 것이다.

 작곡가 금수현(금수현은 소설가 김말봉의 사위로서 장모로부터 받은 시 '그네'를 작곡하여 일약 유명해진 분. 지휘자 금난새의 아버지)이 문교부 편수관으로 있을 때 초정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을 ' 시조 작법'에 관한 글을 써 달라는 내용이었다. 일본에는 단가(短歌)와 같은 국민시가 있어 현대시 못지 않는 사랑을 받고 있는데 우리나라 시조는 광복 후에 우리말과 글을 마음대로 쓰게 되자 오히려 천대받고 사라지는 기현상이 있어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초정은 처음에는 거절했다. 교과서에 그런 글을 실어 봤자 국어선생들이 낱말풀이나 가르칠 테니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예단을 한 때문이었다. 금수현은 다시 초정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초정은 "교과서에 그런 글을 싣기 전에 먼저 전국을 돌며 지역별로 중등학교 국어 선생님들을 모아 놓고 시조에 대한 강연을 개최하여 실질적인 교육을 위한 준비부터 해야 한다"고 했다. 금수현은 그렇게 할테니 먼저 글부터 써 달라고 졸랐다. 그때 초정은 글을 써 주었고 그 글은 교과서에 실렸다. 그후 초정은 "예상했던 대로 낱말풀이에 그치고 시조를 한국시의 원류이자 국민시가라는 관점에서 창작하고 감상하는 살아 있는 교육을 하는 학교는 별로 없었지요."라고 술회했다.

 초정은 현대시를 쓰는 시인들에게 자주 일침을 놓았다. 말을 너무 헤프게 쓰면서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옛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 준 일이 있었다. 초정이 12살 쯤 되는 때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통영의 해평 땅 갯마을에 어디서 굴러왔는지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남녀 한 쌍이 와서 살았다. 아내는 일을 하고 남편은 뱃일을 하여 비록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어느 바람 불고 파도가 높던 날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함께 뱃일 나갔던 다른 선원들이 돌아와 남편의 죽음을 알렸다. 풍랑에 휩쓸려 수중고혼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내는 그 선원들과 함께 망망대해로 나가 파도에 휩쓸린 자리를 확인하고 그대로 물속에 뛰어들었다. 남편의 뒤를 따른 것이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같은해역에서 두 구의 시체가 떠올랐다. 여인이 먼저 죽은 남편의 허리를 꽉 부여잡은 채 한 몸이 되어 있었다." 여기까지가 그 이야기의 줄거리이다.

 초정은 하늘도 바다도 가로막지 못한 한 여인의 열렬한 사랑에 감동한 통영의 선비들이 열녀비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글귀는 "만고창해 일편단심 萬古滄海 一片丹心"이라고 기억해냈다. 초정은 "이 한 마디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된 문장을 찾기 힘들어요. 여기에 비하면 현대시는 아무것도 아니예요." 하고 시의 절제된 언어에 대해 강조한 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