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지필묵의 재해석을 통해 펼친 산여울의 조형서예(산여울 최정희의 서몌세계)

지필묵의 재해석을 통해 펼친 산여울의 조형서예                                                                -산여울 최정희 서예전에 부쳐-     흔히 서양문화는 실증적이고 분석적이며 동양문화는 직관적이며 종합적이라고 말한다. 과학적 정밀성을 바탕으로 한 서양의 분석적인 문화체질은 한국서예 고래의 서예관과 개념을 서서히 바꿔놓고 있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凡美之起 由人心生也)는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이 퇴색되어가는 느낌이다. 다시 말해서 서예는 단순한 미술의 영역에만 있지 않아서 인격의 문제, 인성의 문제, 사회적 기능의 문제까지도 포괄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문제들은 몰수된 채 최근에는 미술의 잣대로만 메워지고 있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으로 서예술이라는 의미속에는 시(詩)와 글씨[書]와 그림[畵]이 함께 담겨있어서 서예를 하는 사람들은 삼절(三絶)이란 말을 자랑스럽게 사용하곤 했다.   그러나 요즘들어 시는 문학계에서 떼어가고, 그림은 미술계에서 떼어갔다. 이렇게 되다보니 우리 서예의 정체성이 반감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굳이 서양의 게슈탈트(Gustalt ; 전체성을 잃고 개별성만 인식하게 되는 것)설을 원용하지 않더라도 서예가 지닌 이런 부분의 총화(總和)가 이루어질 때  그 개체들의 산술적 합산 이상의 시너지 효과가 발휘되기 마련이다. 단순하게 붓질의 기교만 강조되어서는 서예가 지닌 높은 정신성과 문화적인 플러스 알파의 세계가 엷어질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최근 몇몇 작가들은 서예가 지닌 본래의 삼절정신을 복원하기 위해 문학과 미술의 영역까지 관심의 추를 드리우고 있다. 산여울 최정희도 그런 작가이다. 처음 한글서예로 입문해서 한문과 문인화의 영역까지 섭렵해 나가면서 발표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그러나 정신성이 강한 예술이라는 이유로 인해 재료 및 도구와 소재에 대하여 소홀히 취급해서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대추세를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시각성(視覺性)을 중시하지는 않았지만 서예는 엄연히 시각이라는 지각(知覺)에 호소하는 예술형식인데, 그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여 이 점에 관심이 적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재래의 도구와 재료를 새로운 가치관에 투영해 봄이 없이 무조건 받아들이고 미화하는 보수적 태도 때문일수도 있다. 먹의 세계는 서양화에서 볼 수 없는 동양 특유의 축약미(縮約美)의 세계이며, 화선지의 침윤성, 모필의 변화무궁한 점 등이 서예의 특장(特長)으로 비판없이 미화되어서 어떤 때는 합목적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탐구의 대상이어야지 신앙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최근의 서예환경적 변화는 먹 일변도에서 다양한 채색을 할용한 재료의 다변화와 문방사보와 결부된 기법도 점차 확대되어 나가는 추세이다. 따라서 서예계도 전통의 정신성은 살리면서 내용적인 면에서도 전래적인 문자결구의 형식만 고집하는 것이 아닌 조형적 입장에서 구도, 색채, 형태, 기법에 의해 품평을 하는 시대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시대상황에 맞게 여러 가지 시도를 한 산여울의 작품들은 굳이 현대라는 말을 붙이지 않더라도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이번에 발표한 그의 작품에서 눈여겨 볼 몇 가지 특징들을 거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종이에 대해 변화를 모색한 점이다. 지금까지 종이가 흡수력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계속 발전해 온 것은 먹과 같이 물에 잘 스며드는 수용성 재료이기 때문이다. 흡수력이 좋은 종이는 서예가에게 일회성을 요구한 결과가 되었기에 고도의 숙련성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모필과 뗄 수 없는 재료가 되었다. 이렇기 때문에 필력을 중시하고 운필의 묘를 절대시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유분방하게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야할 창조의 예술세계에서 그 창조의 의지가 필력에 의해 억눌려서 다양한 종이의 사용을 저해한 측면이 없지 않다. 산여울은 화선지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종이를 실험하거나 종이자체에 다양한 채색을 가함으로써 흰색일변도의 종이에서 탈피하고자 한 노력이 돋보인다. 이는 종이의 재질과 더불어 흰색에 서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조형세계를 펼쳐보고자 하는 작가의 실험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글작품 <김용환 시>에서는 윗부분에 색감을 적절하게 넣었고, 한문작품 <求其放心>를 보면 중간 부분을 상하와 다른색으로 변화를 주고 있어 시각적인 측면을 살리려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인다. 이렇게 흰 종이에 다양한 색을 뿌리거나 칠하여 변화를 구하고 있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둘째, 붓과 먹에 대한 실험이다. 서예가들이 사용한 붓의 변천과정은 유심필에서 무심필로, 단호에서 장호로, 소형에서 대형으로 변해 왔는데, 이것은 붓의 보수력, 즉 붓의 기능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의 변화를 뜻한다. 즉 한번 먹을 찍어 더 많은 글자를 쓸 수 있고 선을 표현하는데 용이한 쪽으로 확장되어 왔던 것이다. 먹은 유현(幽玄)한 색깔과 변색이 없고 수용성이어서 널리 애용되고 있다. 먹과 붓은 필력과 농담을 살리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도구이다. 그러나 필묵이 서예의 우위적 특성을 만들었다는 공적 때문에 서예도구를 한정짓는 요소로 작용했음을 부인해서도 안된다. 산여울은 검은먹 일색에서 탈피하기 위해 푸른 칼라를 먹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산여울>이라는 작품에서 이러한 시도를 하였는데 흔히 보지 못한 작품이라 다소 생경할 수는 있지만 새로운 시도임에는 분명하다. 또한 붉은 종이 위에는 글씨가 희게 보이도록 시도한 작품 <정열의 꽃>도 이런 맥락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吾友我師>란 작품을 보면 작가의 붓에 대한 해석력을 엿볼 수 있다. 점획의 비백과 강약을 살린 휘호를 함으로써 붓의 탄력성과 강약을 살리고자 한 작가의 의도를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붓의 특장을 드러내 보이는 작품이 여러 점 보인다.    셋째, 전통적인 장법(章法)이나 결구형식(結構形式)에서 일탈된 작업을 하고 있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명가들의 결구와 장법이 결구와 장법에서 대명사적인 형식미를 이루며 그 범주에 머물러 왔다. 명비들의 형식을 통해 수련을 해 왔고 그런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그 틀 안에서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건축구조와 주거환경에 맞춰 고전적인 장법에서 변화를 모색해 나가는 추세이다. 산여울이 발표한 작품들도 이런 추세에 맞추어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산빛>이라는 작품에서는 윗부분을 비우고 중간부분에 제목처럼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시각적으로 주목성을 높히고 아래에 발문형식으로 설명하듯 작게 배치하였다. ‘산’이라는 글자를 산의 실제 모습으로 바꿔놓은 점도 재미있어 보인다. <행복>이라는 작품에서는 위와 반대로 포치하여 또 다른 변화를 느끼게 한다. 누군가 예술작업은 ‘생경하게 만들기’라고 말하였듯이 익숙한 장법에서 일탈되었을 때 거부감과 아울러 생경함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이런 시도자체가 작가의 의도된 일탈로 보여지기에 이에 대한 평가와는 상관없이 신선해 보인다.    오늘날 서예의 위기론이 빈번하게 거론된다. 재료와 도구간의 상호 보완관계, 서사도구로서의 기능에만 매인 전문성의 억제, 소재구성의 정형성, 고정화된 인식에서 비롯된 표현의 위축, 아마추어 정신에서 온 안일한 태도, 이런 원인들이 결국 서예를 박물관에 수장될 전통예술로만 한정지어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있는지도 모른다. 순수성이나 전통성만 고집하다가는 서예고유의 명성까지 빛이 바래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되었다. 이제 막다른 골목어귀에서 처음의 분기점으로 되돌아가야 다시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새로운 시대의 미적가치가 있다면 수용하고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다소 어울리지 않아보여도 새로운 시도와 끊임없는 실험을 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산여울의 작품들은 시대적 미적가치를 작가의 미의식으로 해석하고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앞으로의 작업과정에 대해 주문한다면, 전통서예가 물려준 유전인자로서 간직할 바에 대해 숙고하고, 물려받은 것 중에서 버릴 것은 더 과감히 버리고, 소홀히 보아왔던 것 중에서 유익한 것을 찾아보고, 외래적인 것들도 현대적인 미적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면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이 모든 것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나가는 실험을 지속적으로 해 주기 바란다. 산여울은 작업에 임할 때 늘 성실하게 임하고 매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작가이기에 앞으로의 작업성과도 기대된다. 작가의 예도에 많은 호응이 있기를  기원한다.   한국서예사연구소장 정태수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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