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

[스크랩] 서화불이를 꿈꾸는 초람의 현대서예(박세호 평문)

함백산방 2010. 12. 28. 19:55

           

                                  書畵不二를 꿈꾸는 艸嵐의 現代書藝


 일찍이 칸딘스키는 “예술작품에 있어 묵수적인 과거의 재현은 사산된 아이를 낳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작가에게 있어 고전을 수용하여 그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해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어느 장르보다 고전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문자라는 틀속에서 표현해야 하는 서예의 경우 ‘현대성’을 구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초람(艸嵐) 박세호(朴世鎬)는 계명대학교 서예과를 거쳐 같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하면서부터 서예의 현대성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발표해 왔다. 석사학위 논문도 <서예의 현대적 표현 연구>라는 논제를 가지고 발표할 정도로 누구보다 현대서예에 심취해 왔다. 그 동안 한글, 한문, 전각, 문인화에 서각적인 기법을 섞어 나름대로 부지런히 작업을 해왔고, 이런 작업들이 평가를 받아 이번 대구청년작가전 초대작가로 선정되었다. 이번 작품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문자를 회화적 시각으로 이미지화 한 작품들과 한문이나 한글로 된 작품들도 작가의 조형시각이 반영된 새로운 결구와 장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운(韻)’이라는 화두를 꾸준히 표현하고 있는 그의 현대서예작품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韻과 玄으로 풀어낸 초람의 조형시각


 초람이 근래 즐겨 쓰는 명제 가운데 하나가 ‘운(韻)’이다. 초람의 작품에 나오는 운이란 무엇일까. 주지하듯이 운이란 중국 남제의 사혁이 지은 <고화품록>에 나오는 말로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기운생동 ․ 골법용필 ․ 응물상형 등 이른바 육법(六法)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기(氣)와 함께 운은 기운(氣韻)이란 의미로 사용되면서 동양회화의 가장 중요한 준거로 추숭되는 말이다. 기운이란 아직 가시지 않고 남아 있는 운치나 기품이 넘치는 뛰어난 예술품을 두고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한편 시(詩)에서 운이란 문자는 여운(餘韻)이란 의미로 사용되면서 말의 여운을 남겨서 효과를 노리는 서정시의 한 형식을 지칭함과 동시에 읽은 뒤에 남는 여운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와 같이 형이상학적인 운이란 화두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고심한다. 마치 소리가 울려퍼지듯이 고정적인 조형질서를 파괴하는 일탈된 조형시각으로 작가자신의 아름다운 영혼의 소리를 붓의 탄력을 이용해 그의 작품에 되살려낸다. 이런 운시리즈의 특징은 화면속에 자유분방함과 긴장감, 우연에 의한 효과, 순간적인 표현을 통해 인위적이고 계획적인 표현을 배제하려고 하였고, 사색과 체험을 통해 얻은 운을 문자 혹은 비문자라는 형식을 통해 추상화처럼 구성해내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문자를 통해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고, 문자와 서체가 지닌 조형성을 감상하게 하는 보편적인 서예작품과 차별화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초람식 현대서예의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운과 함께 이번 전시에서 새로 선보인 문자는 현(玄)이다. 현이란 문자는 검다, 오묘하다, 깊다, 하늘이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흑과 백으로 상징되는 서예작품과 음양으로 대변되는 동양미학의 핵심에 대한 관심, 오묘하고 아득한 우주와 같은 느낌들을 화면에 드러내 보고자 하는 깊은 성찰에서 나온 조형의지이다. <絃玄>이란 작품에서 하늘을 한 작품속에 가두어 연주하고자 하는 그의 미의식이 구체화되고 있다. 두 줄기로 드리워진 하늘로 향한 줄에 결려있는 현자를 응시하노라면 선과 점으로 연결된 서예술의 정취를 연주하는 작가자신을 대변하는 듯하다. <玄>이란 또 다른 작품에서는 음양을 상징하는 화면에 수놓듯 玄字를 대응시킴으로써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화면중앙에 드리워진 문자를 통해 주목성과 집중성을 느끼게 처리한 장법과 점획의 다양한 운필로 인해 서예성을 놓치지 않으면서 현대회화작품의 영역으로 다가가고 있다. 이런 작품류들이 전형적인 초람의 현대서예작품이다.   

 지난 10여년동안 작업해 온 내용들은 초기작품이 복잡하고 혼돈스러움을 강조했다면 지금의 작품은 소략해지고 정제화된 느낌을 준다. 이를 통해 읽는 서예에서 보는 서예로 한걸음 앞서 나가고자 실천하는 초람의 조형시각을 감지할 수 있다. 이렇듯이 초람서예의 해법은 현대회화의 형식에 서예정신을 담아내는데 있다. 문자조형으로서의 현대회화형식을 통해 서예정신을 표현해 보려는 그의 실험의식이 돋보인다. 그의 작품에서는 재료의 다양한 선택뿐만 아니라 고전의 변용에도 주저하지 않는다. 따라서 초람의 현대서예는 그림으로서의 서예와 서예로서의 그림의 관계가 융합된 書畵不二의 현대서예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결구와 장법으로 해석한 고전


 오늘날 서예에 대한 동양삼국의 명칭이 각각 다르다. '서법(書法)'이라고 일컫는 중국에서는 서법의 '법(法)' 보다는 서예의 '예(藝)'쪽으로 나가는 추세이고, '서도(書道)'라고 일컫는 일본에서는 '도(道)'의 정신이 약해지면서 다양한 현대서예적인 표현에 관심이 증대되고 있는듯하고, '서예(書藝)'라고 말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서예의 '예(藝)'에 심취한 일군의 작가들에 의해 다양한 실험이 전개되고 있다. 초람이 추구하고 있는 이른바 현대서예라는 불리는 새로운 서예양식은 그 내용이나 형식이 기존의 전통서예의 본질이나 서예미와 미적표현기준이 달라지고 있다. 즉 전통서예에서는 서예사와 서법에 서예미의 기준을 둔 반면에 현대서예에서는 서(書)의 시각적, 예술적 표현에 그 미의 기준을 두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통서예는 탄력성 있는 붓으로 먹물을 화선지라는 평면공간에 문자로 표현하는 예술이므로 재료와 기법측면에서 대단히 간단명료한 예술이다. 그렇지만 예술적 차원에서의 서예미는 그리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즉 서예의 소재인 문자는 일점, 일획의 결합에 의하여 결구로 성립되고, 문자의 결구를 보기좋게 늘어놓은 장법이란 형식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일점, 일획의  방향, 속도, 그리고 운필중의 압력에 의해 먹의 윤갈(潤渴), 선의 굵기와 방향성에 의해 서예미가 표출된다. 필획에는 長短, 太細, 曲直 등의 느낌이 있고, 자유스러운 것과 경직된 필획이 있을 수 있다. 혹자가 서예를 획(劃)의 예술이라고 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즉 서예미를 축약해서 말하면 먹이 주는 운치와 붓의 운용에서 나오는 필획(線)의 미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서예는 극도로 간소화 된 획의 표현방식을 취하고 있으니 이를 고도의 미적표현으로 승화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초람의 서예작품은 전통서예작품에서 보아왔던 고전적인 결구와 장법에서 일탈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문자의 외형이 뚜렷이 확인되는 전통서예적인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들도 전통서예작품과는 뚜렷하게 차이가 느껴진다. 한문으로 된 <論語句>를 보면, 고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한 표현을 볼 수 있다. 한글로 된 <용혜원님의 시>에서도 개성적인 표현은 확연히 드러난다. 궁체나 판본체하고는 다르게 서각을 하면서 얻은 날카로운 칼느낌을 세로획에 대입하고 있고, 장법상으로도 행과 열을 의식하지 않고 뒤섞어서 가득채운 구성을 선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서예사를 언급할 때 ‘진인상운 (晉人尙韻), 당인상법(唐人尙法), 송인상의(宋人尙意)'라고 말한다. 한 시대를 살아갔던 서예가들은 그 시대의 시대적 미적특징들을 작품속에 구현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작가들은 무엇을 화두로 해서 작품을 할 것인가. 한 작가가 자기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작품속에 표현할 때 가장 고전을 잘 소화한 작품이 될 수 있을것이고, 그것이 모여 시대정신이 될 것이며, 나아가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 현대서예가 될 것이다. 초람이 추구하는 현대서예의 길에도 늘 남보다 한걸음 앞서나가는 시대정신을 갖춰나가길 기원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 초람이 꿈구는 書畵不二의 초람식 현대서예의 꽃이 활짝 필 것으로 확신한다.


무자년 복날에 한국서예사연구소에서

정태수

 



한국의 전통음악 제4집 <잊을수 없는 연주>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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