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

[스크랩] 송천 정하건선생

함백산방 2010. 12. 28. 19:53
1997년 7,8 (격월간) : 서예문화 - 인터뷰기사


“열정적 삶의 흔적, 묵향만큼이나 진하게”



시원스레 큰 창문 너머로 한눈에 북한산의 자태가 병풍처럼 펼처져 있고 유난히 넓은 서재는 마치 작은 운동장을 연상하리만큼 여유롭다.

두 개의 벽면을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득 채운 서재 앞에 서 있는 주인의 모습은 책 속에 묻혀 왜소하기까지 하다.
서예, 미술, 문학, 철학 등 고전에서 현대서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들은 주인의 정성스런 손길이 더하여져 질서정연하며 찾아보기 쉽고 가지런하다.
3층 서재를 지나 위층의 옥탑을 개조하여 만든 골방 서재는 마치 골동품 전시장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만지면 부스러져 없어 질 것만 같은 낡은 옛 필사본 등 묵적과 고서적, 추사선생 현판 등이 골방분위기 만큼이나 옛스럽다.

송천 정하건 선생이 60 평생을 바쳐 마련한 이 서재는 건출한 서예가를 향해 정진해온 젊은 날의 면학의 증언장이자 서예가로서 그만의 창작의 산실이기도 하다.
그의 서책 모으기 30년은 그 치밀하고 자상한 성품 만큼이나 남다르다.

정확한 비전을 갖고 계획된 열정적 수집벽은 이미 60년대 초 통문관 인사동 고서점으로부터 시작된다.
다양한 장르의 서적들은 창작의 보고 3층 서재를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창문쪽에 액자 하나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근대 한국서화사 연구의 선구자인 위창 오세창 선생이 그의 나이 79세에 쓴 “아실사무사 아실사무사” 라는 작품이다.
나의 방에선 사악함이 없음을 생각하겠노라는 이 문구는 공자가 시를 정의할때 쓴 말이기도 하지만 서재 주인의 인품의 한 면모를 잘 나타내는 말이다.

“서예는 법첩이나 서론 몇 권으로 마스터 할 수있는 예술이 아닙니다.
철학, 역사, 문학, 예술등 모든 장르를 총괄하는 총체적 예술입니다.
이와 같은 여러 장르를 총괄하는 총체적 에술입니다.

이와 같은 여러 쟝르에 대한 통찰과 깊은 천착은 물론 오랜 세월을 두고 쉼없이 끈질기게 연구해야 하는 투혼의 예술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요사이 인스턴트 사고에 물든 젊은이들과 쉽게 공모전에 입선하기만 하면 작가인양 하는 후배 서예인들에게 던지는 애정 어린 충고이다.


젊은 후배 서예가들에게 그는 많은 옛 묵적이나 법첩을 보고 난 다음 좋은 작품을 골라 임서함은 물론 서론등 이론 분야와 주변 학문에 대한 깊은 연구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많은 책을 보고 수집하는 방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책이나 자료를 사는데 인색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많은 책을 한꺼번에 살려고 할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분명한 의식을 갖고 차근차근 서두르지 말기를 당부한다.
4층 고서적과 진적등이 가득한 서재 입구 오른쪽에는 “검개잡사고서존” 이라는 행서 작품이 걸려 있다.
책을 펼치니 여러 정사와 야사가 다들어 있다는 그 글속에 담겨있는 뜻이 좋아 나중에 서재를 꾸밀때에 현관 앞에 걸어 놓기 위해 작정하고 구입했다고 한다.

그이 치밀하고 계획성 있는 책 수집 태도를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청의 건륭제 시대의 어각인 “삼희당법첩”은 송의 “순화각첩”에 필적되는 작품이다.
이 어각의 초탁원본인 “초탁 삼희당원본”은 그 선명도가 뛰어나 입체적으로 보이기 까지 한다.

통문관 주인인 이겸노 선생의 사랑에 걸려 있었다는 “기영세가 기영세가” 라는 추사 특유의 예서풍의 현판은 이겸노 선생이 살던 집을 새로 지으면서 돈이 좀 부족해서 내어놓은 작품이라 한다.
또한 추사와 비슷한 시기의 서예가로 예서에 능하며 유석암체를 많이 썼다는 조광진의 “수세묵가 수세묵가”는 예서체 작품으로 비백의 미를 교묘하게 살린 글씨로 현대적 문자 감각을 갖춘 현판이다.

무엇보다도 스승인 검여 유희강 선생이 격려의 선물로 주신 책으로 장희와 더불어 청왕조 전반기의 첩학의 2대가로 불리는 유용의 “유문청공법서”라는 단아하고 풍윤한 서풍의 책으로 유학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송천선생의 성품을 아껴서 주신 것이라 한다.

그밖에 미불의 행서춘여첩, 조선의 문종, 세조, 정조등 제왕들의 기세 있는 글씨, 한글 소설인 초한전 필사본, 일본의 옛 서예잡지인 “서지우”, “서원”, ‘서도” 등 고서의 향기속에 젖어 보았다.


오직 한 길로만 달려왔던 삶의 역정


우리네 보통 사람들이 살아온 5,60년대는 민생고 자체를 해결하기에도 벅찬 헐벗은 시대였다.
더구나 에술가의 삶이란 선택받은 한 두사람을 제외하고는 지독히도 힘든 길이었다.
의식주 해결도 힘든 시대에 진적이나 고서적을 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송천 선생의 수집벽은 이러한 여건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갖고 차곡차곡 진행되었다.
어느날 고서적 보따리를 갖고 귀가하던 선생은 대문 앞에서 부인과 마주쳤다.
보따리를 얼른 뒤로 감춘뒤 부인이 집안으로 들어간 다음 문 앞에 놓고 얼른 대문을 닫았다.

누가 보따리를 가져갈까봐 조바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얼마후 다시 밖으로 나갔다 오는 척 하며 다시 갖고 들어와 후미진 구석에 갖다 놓았다.
며칠이 지난 뒤 부인이 청소를 하다가 책 보따리를 발견하고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먹고살기도 힘든 세상에 책사는 것은 나중으로 미룰 수 없느냐는 논리였다.
“식구들을 많이 고생시켰습니다. 혼자만의 욕심을 위해 식구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꼴이었으니 말입니다.”
한바탕 후에, 부부가 손수레를 끌며 장사하는 예를 들면서 남편이 앞에서 수레를 끌면 부인이 뒤에서 밀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손수레론”을 펴 위기를 넘기고 하였다.


철저한 검약생활로 혼신의 힘을 다해


송천 선생의 수집벽이 발동한 60년대 초는 군사혁명의 와중에서 잘 살아보자는 혁명정부의 구호에 따라 의식주에 총력을 기울이는 판국에 책, 고서적을 구입하는 데에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것이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난한 서예가의 호주머니 사정은 너무나 급박해 그동안 피우던 답배도 끊고 교통비를 절약해 가며 구두쇠 작전을 펴야만 했다.
한번은 인사동의 한 고서점에 정말로 갖고 싶은 고서첩이 있었다. 지갑의 돈을 헤아려보니 지금 화폐가치로 몇천원 밖에 없었다.

책방 주인에게 시골에서 올라왔다고 거짓말을 한 다음 돈을 준비해 오려면 며칠걸리니 기다려 달라고 사정하면서 몇천원의 선금 계약서를 받아 냈던 일이 감회가 새롭다고 한다.

서실을 개원하고 있을때 인데, 좋은 책이 발견되자 임대료로 마련해 놓은 돈을 몽땅 털어넣고 몇 달을 두고 그 돈을 마련하느라 죽을 고생을 하던 때도 있었다고 술회한다.
“책은 돈이 많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과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의 삶이나 예술을 살찌우고 윤택하게 하며, 창조적 작품 세계를 열어주는 가이드 역할을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사게 된다.” 며 책이나 고서첩등 자료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검여 유희강 선생과의 만남


가학으로 조부께 서예를 배운 선생은 고교시절 서예교과서의 저자인 갈물 이철경 선생을 만나 한글서예를 익혔으며, 국전 6회때 독립선언서를 한글로 써 입선하였으며, 8회에도 한글로 입선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서예공부는 군대 제대후 검여선생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24년이라는 긴 세월을 조바심 내지 않고 국전에 꾸준히 출품하는 동안 서예부 최고상이라는 문교부 장관상을 두번(75,78년)이나 수상하였으며 이어 국전 추천작가, 현대미술관 초대작가 등의 영예를 얻게 되었다.

이후 후진들과 제자들의 교육에도 정성을 기울여 금년에는 송천서회전을 24회나 주재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1977년 4월 서울신문회관에서 제1회 개인전을 연 이래 95년 10월 제4회 개인전을 운현궁 미술관에서 개최하였다.

서예그룹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근역서가회의 초대회장, 대한민국서예대전 운영위원장, 예술의전당 운영위원, 서울서예대전 추진위원장을 맡았으며 현재는 사단법인 한국서가협회 회장으로 있다.

30여년전 서예술에 대한 집요한 열정으로 대 서예가로의 희망의 청사진을 펼쳤던 그 집념의 결실인 서재를 나서며, 진정한 값진 삶이란 항상 꿈꾸는 사람의 몫이라는 말이 가슴에 새겨 왔다.

 
<펌>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예원(霓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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