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

[스크랩] 졸박청고(拙樸淸高)한 서품(書品) 모암 윤양희(茅菴 尹亮熙) 선생과 띠실전

함백산방 2010. 12. 28. 19:49

 (졸박청고(拙樸淸高)한 서품(書品) 모암 윤양희(茅菴 尹亮熙) 선생과 띠실전)


  어제 A 교장님으로부터 모암 윤양희 선생과 그 제자들의 서예전이 인사동에 있다하여 집을 나섰다. 언제나처럼 안국역을 나와 수운회관을 지나 부남미술관에서 무슨 전시가 있나 확인 후 인파들로 북적이는 인사동 골목을 비껴 백악미술관에 들르니 1층엔 회화전과 2층엔 중국 고비 탁본전이 있어 한 바퀴 둘러본다. 흔히 서예의 제체를 공부할 때 법첩으로 사용하여 많이 알려진 고비들의 탁본들이었다. 가장 오래된 예서체인 오봉이년각석(五鳳二年刻石)에서부터 육조, 한, 당의 제비(諸碑)들을 위시하여 송의 황정견, 미불, 소식, 악비의 서적(書蹟)에 이르기 까지 널리 알려진 비들이 망라된 탁본들로 주최측은 정탁이라지만 너무 진한 오탁으로 금석기를 실감하지 못하겠다.

                  

  갤러리라메르 입구를 향해 들어가는 데 마침 모암 윤양희(茅菴 尹亮熙, 1943~ ) 선생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 계셔서 인사를 드리며 함께 오르다. 전시장 입구에서 1980년대 초 함께 서예에 매진했던 모암 선생 고제(高弟)인 밀내 박수자(朴壽姿, 1953~) 선생이 있어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밀내 박수자 선생은 나와 1980년 서울A초등학교에서 동료교사로 처음 만났다. 작은 키에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수더분한 성격, 약간은 투박한 대구 형 경상도 사투리, 그 동안의 30년을 격했어도 동안(童顔)의 얼굴은 그대로다. 아마 늘 젊고 밝게 사는 탓일 것이다. 나보다 2년 뒤에 2번째 학교로 부임한 박 선생은 그 시절 한창 붐을 타고 있던 서예에 입문, 벌써 모암 선생에게서 지도를 받고 있었다. 그러니 두 분의 인연은 30년 가까이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 때 박 선생은 20대 후반으로 서예에 매진하는데 옆에서 지켜보는 우리로서도 남다른 천품(天稟)과 미적 감각,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노력으로 하루가 다르게 눈에 띄는 성장을 한다. 그 때 모암 선생은 초등에서 중등으로 자리를 옮겨 교직에 계셨는데 전각과 전서로 일가를 이룬 철농 이기우(鐵農 李基雨,1921~1993) 선생을 통해 전예서(篆隸書)와 전각(篆刻)을 배우셨다는데 벌써부터 한글은 일중 김충현 선생의 글씨를 사숙(私淑)하여 성가를 이룬 상태였고 동아미전에서 동아미술상의 수상 작가로, 국전 등을 통해 한창 작가로 발돋움하고 있는 때였다. 박 선생은 서예에 입문한지 얼마 안 된 짧은 기간 안에 그 힘들다는 국전 마지막 회에 입선의 영광을 안는다. 모두들 내일처럼 기뻐해주던 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30년이 흘렀다.

                       (김동리 선생 시 : 패랭이 꽃)

  그 때 홀로 좋아 독습하고 있던 나는 박 선생이 받아온 모암 윤양희 선생의 체본을 보고 얼마나 경도(傾倒)되었던지...그 때 한글은 궁체 일변도의 곱게 쓰는 것으로만 알던 나에게 궁체도 획질의 변화와 획의 자연스런 운필을 통해 변화를 주면 자기만의 개성을 나타낼 수 있다는 깨달음 주었다. 밀내 선생의 안정된 자형과 구도의 글씨를 보면서 영향을 많이 받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모암 선생에게 직접 지도를 받지는 않았지만 체본을 통해 또는 밀내 선생을 통해 선생의 서예술에 대한 모든 것을 영향 받았으니 모암 선생을 사숙(私淑)했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그 후 모암 선생과 밀내 선생은 초,중등미술교과서의 서예부분의 책임 편집을 맡아 본인의 글씨를 넣어 편집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연구하는 서예인으로 서단(書壇)의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 그런 인연으로 두 선생의 전시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찾아 감상하고 뭔가의 영감을 얻기도 하였다.


  이번 전시는 정년퇴임을 앞 둔 모암 윤양희 교수의 여섯 번째 전시이자 그의 제자들 그룹인 띠실(모암(茅菴)의 한글 풀이 이름)전을 함께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윤양희 선생의 작품을 보면 한자 서예에 있어서는 전예(篆隸)가 주를 이루었다. 우선 우리 근대 전각가 철농 이기우 선생을 사사했기에 전각과 함께 익힌 전서와 예서의 영향이 크리라 본다. 그러나 선생의 개인전시회의 작품 경향을  보면 한문서예보다는 한글서예를 많이 발표하는 것 같다.

                               (오현 스님 시)

  선생은 80년대 초 한국교육개발원에서 미술교육을 담당하면서 한글서예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초기 한글 판본체인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 등의 자형을 분석해 새로운 표현방법을 만들었다. 원래 대전사범을 졸업하여 초등학교 교단에 서면서 자연 붓을 들었겠지만 그런 환경이 한글에 더 가깝게 접근하지 않았나 본다. 저서도 ‘쉬운 판본체’ ‘바른 한글서예’ 등 저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선지 큰 전시장 걸린 작품엔 전서, 전각, 탁본 등 다양한 작품들로 가득하다.

                      (인생재근(人生在勤) 청야(靑也))

  주로 판본체의 필획은 내적으로 응축하여 오래된 등나무 넝쿨처럼 겉은 투박하면서도 내재한 강한 힘에 의해 금방이라도 움직이려는 것 같은 졸박(拙樸)함이 세필 중심의 궁체를 바탕으로 표현된 개성적 서체는 표일(飄逸)하여 날렵해 보인다. 그러나 가로 세로 정형화한 틀을 너무 강조한 형식이라 조금은 답답함을 느끼지만 방촌(方寸)의 예술을 익힌 전각가의 공간개념을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도 있겠다.


  또한 국문학을 전공한 작가답게 서예작품의 내용은 짧고 아름다운 시와 시조가 대부분으로 문학적 향기를 흠뻑 느낄 수 있는 내용들이다. 지난번 전시작품 중에도 백수선생 시조가 눈에 자주 띄어 그 백수선생이 누굴까 궁금했는데 바로 시조시인 정완영 선생의 호(號)란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백수 정완영 선생이 모암 윤양희 선생의 개인전에 축하시조를 지어 보냈는지 도록에 수록되어 있다.

                        (백수 정완영 선생 시조 적막한 봄)

<모암서법(茅菴書法) 바라보며>


모암(茅菴)같은 이를 내가 왜 진작 몰랐을까

언제나 마주 앉으면 고향마을 같은 사람

저녁 놀 아득히 물들고, 풍경(風磬)소리 흔들린다.


따뜻한 미소가 흐르는 모암서법 (茅菴書法) 바라보면

새벽닭 희 울음소리 낭자할 것 같기도 하고

칠갑산(七甲山) 문 여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기도 하이. (모암 선생은 칠갑산이 있는 청양 출신임)


그리고 함께 하는 제자들의 띠실전의 서문(序文)의 글을 누가 썼는지 아름다운 한 편의 수필을 읽는 듯 가슴에 와 닿아 여기 전재해 본다.

                        (조지훈 시 앵음설법鶯吟說法)

“삶은 반드시 선하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좋은 삶만이 선하고 행복하다”라고 철학자 세네카는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엮어가는 여러 가지 삶에서 어떤 모습의 길을 선택하든 참된 기쁨으로 행복(幸福)이라는 영글고 알찬 수확을 거두어드리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돌아보면 좋은 삶으로 향(向)하려는 깊은 고뇌(苦惱)의 몸짓 중에 만난 것이 서예(書藝)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예술의 전당에서, 대학, 대학원에서, 또는 다른 인연(因緣)으로 모암 선생님과의 소중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길을 찾은 듯 어렵사리 붓을 들었으나 서예(書藝)의 길은 홀로 험한 밤길을 걷는 것 같았습니다. 


                         (윤강로 시 모과를 : 눈 꽃 김정민)

  선인(先人)들이 이르기를 서(書)는 천품(天稟)과 노력(努力)을 겸(兼)해야 한다고 하였거늘, 천품(天稟)이 부족하니 노력(努力)에 힘을 기울일 밖에... 그러나 갈수록 향방(向方)을 몰라 암울(暗鬱)히 마음 애타할 때 늘 선생님께서 밤하늘의 별처럼 “빛”으로 계셨기에 희망(希望)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24명이 “띠실”이라는 따뜻하고 옹골찬 울타리 안에 수줍고 설레는 모습으로 모였습니다. 늘 푸르른 산 長松으로 높이 뵈던 선생님!  어느덧 정년퇴임을 앞에 두신 선생님께 작은 위로와 축하를 겸하여 많이 부족하지만 弟子展을 갖게 되었습니다.

                         (노정 구경회 : 도연명 시)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라고 신영복 선생은 말했습니다. 이번 띠실전에 臨하면서 모두가 처음 붓을 들었을 때와 같은 初心으로 돌아가 더욱 純朴하고 좋은 삶의 자리를 찾으려는 다짐을 하려는 것으로 慰安을 삼고자 합니다.


  丁亥년이 終占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공연히 마음이 허전하고 아쉬움이 커가는 때입니다.

               (밀내 박수자 : 김용택 시 그대 생의 솔 숲에서) 

  “마음속에 詩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환해졌습니다.”라고 한 시인처럼 마음속으로 떠올린 詩 한 구절에 세상을 밝게 바라보는 포근한 눈길과 결 고운 心性을 닮고 싶습니다. 書의 길도 이런 詩人의 마음자리를 따라 뚜벅 뚜벅 걸어간다면 그 뒷모습이 한층 넉넉하고 맑아 보일 듯 싶습니다. 그리하여 書藝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잔잔한 마음의 平和 속에 모두 幸福했으면  좋겠습니다(完)

                                    ( 모양 윤양희 선생의 도록과 띠실전 도록)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茂林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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