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

[스크랩]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서예가 일중 김충현 선생의 월인천강전을 다녀오다.

함백산방 2010. 12. 28. 19:48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서예가 일중 김충현 선생의 월인천강전을 다녀오다.>


  작년 가을 서세하신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1921~2006)선생은 누가 뭐래도 20세기 한국 근현대 서단에서 한글과 국한혼서체 그리고 한자의 제체(諸體)에 독보적인 경지를 구축한 거장으로 평가하는 데 큰 이론이 없을 것이다.



  1938년 18세 때 동아일보 주최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에서 최고상을 받은 이래 1942년 22세 때 <우리 글씨 쓰는 법>을 저술하여 한글 고체와 궁체 교육의 기준을 제시하는 등 작품 활동 뿐 아니라 49세 때인 1969년  ‘일중묵연(一中墨緣)’개설하여 한국현대서단을 이끌어가는 중추적인 작가를 수없이 배출함으로써 서예교육자로서 후진양성에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내가 처음 일중 선생의 알게 된 것은 교양지 신동아를 통해서 일 것이다 1970년대 초 <한국의 인물>이란 주제로 각 방면의 대표적 인물을 사계 전문 인사들의 추천을 받아 10명을 소개하는 잡지 앞의 화보 기사인데 그 때 계씨(季氏)인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1927~2007)선생과 함께 소개되어 처음 대한 것 같다. 일찍 한글서예에 관심을 갖고 배우고 싶어 관련책자를 살피던 중 선생의 저서인 <국한서예(國漢書藝)>를 구입하여 책장이 닳도록 들여다 본 것 같고 <우리 글씨 쓰는 법> 등 선생의 책자를 모두 구입하여 보았으며 1980년대 초에 나온 선생의 작품집인 <일중서집(一中書集)>을 구입하여 틈나는 대로 들여다 본 기억이 새롭다.

  또한 서예가 한창 붐을 이룰 때 종로의 여러 전시장을 돌며 <일중묵연전>과 <열상서단전>등 선생과 관련있는 전시회가 열리면 빠짐없이 다녀온 기억이 난다.



  어제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아천 김영철 선생이 주관하는 문인화 전문의 <아묵동인전(雅墨同人展)>을 감상하고 나오며 본 안내 포스터에 강남구 역삼1문화센터에서 일중 김충현 선생작품 전시회가 있다는 광고를 보고 오늘 시간이 나 전화를 걸어보니 내가 사는 도곡동에선 도보로 다녀올 수 있는 지근(至近)거리였다.

(개관기념 전시와 연극 안내 깃발)

 역삼1문화센터는 부자동네 강남의 위상을 말해주듯 완벽한 문화센터였다. 이 역삼1문화센터는 동사무소를 포함해 지하 3층, 지상 5층 연면적 1만 500㎡ 규모의 최첨단 현대식 건물로 지어졌다. 동사무소는 1층의 일부만 사용할 뿐 대부분은 주민들의 문화공간이었다. 2층에는 헬스센터와 생활체육교실, 주민대화실이, 3층에는 230석 규모의 문예회관과 소회의실, 다목적실이, 4층에는 취미교실, 정보화교실, 지도자실이, 5층에는 도서관과 독서실이 들어섰다. 이런 넓고도 쾌적한 공간에서 원스톱문화공간으로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문화마인드를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좋은 시설에 한국의 대표적 서예가를 조명하는 전시를 기획한다는 것이 앞으로 그 운용에 야심참을 엿볼 수 있었다. 1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니 넓은 전시장을 작품의 성격에 따라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일요일 오전이라선지 아니면 아직 덜 알려져서인지 전시장엔 아무도 없다. 동선을 따라 학서기(學書期)-한글 궁체와 고체-국한문 혼용체-전서(篆書)와 예서(隸書)-행초(行草)와 파체서(破體書)로 전시장을 나누어 한눈에 선생의 서예 일생을 살필 수 있게 전시하였다.

(시엽산방 팔영(枾葉山房 八詠 10곡병)

  진열된 작품은 이미 서집(書集)이나 전시장에서 대한 것이기에 눈에 익지만 학서기(學書期)의 초기 작품 몇 점은 처음대하는 작품이었다.



  누가 글을 썼는지 밝히지 않았지만 안내 팜플렛에서는 일중 선생의 서예생애를 크게 다섯시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기는 1921년 탄생에서부터 1945년(25세) 광복을 맞을 때 까지 입지(立志)와 한글에의 관심으로 <우리 글씨 쓰는 법> 저술 등 한글연구에 관심과 업적을 냈다는 점이다.

(정과정곡)

  2기는 1945년(25세)부터 1962년(42세)까지를 축적(蓄積)과 개발(開發)시기로 제1회 국전초대작가(1949)로 참가한 이래 한글과 한자서를 발표하면서 실력을 축적하고 교과서 저술과 첫개인전(1955), 동방연서회 창립(1958)과 영운 김용진 선생으로부터 서예고전에 대한 폭넓은 지도를 받는다.

(국경일 노래)

  3기는 1962(42세)년부터 1969년(49세)으로 일중묵연 설립(1969)과 새로운 조형세계를 모색한 시기로 작가뿐 아니라 서예교육자로 본격적인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고려가요 동동)

  4기는 1969(49세)년부터 1980년(60)까지는 예서(隸書)와 행초서(行草書)의 융합(融合) 시기로 서체에서 일중 예술이 만개한 절정기이다. 서예 고전을 각체 혼융을 통해 현대적 창신(創新)의 세계로 이끌어 낸 시기이다. 전통의 힘과 여유, 무게를 고루 갖춘 ‘일중체(一中體)’의 특징을 드러낸 시기이다.

(일중선생 저작)

  5기는 1981년(61)부터 2006년(86) 예술가로서 소요기(逍遙期)로 4기에 형성된 일중체가 더욱 심화된 과정으로 일생을 정리하고 소요한 시기이나 1998년 예술의 전당 개관10주년 기념전을 마지막으로 작고할 때까지 파킨스씨병으로 사실상 작품활동을 하지 못했다.

(초기작 예서 2첩 1950년대 작)

  일중 선생은 한글서예의 천착을 빼 놓을 수 없다. 기존의 궁체는 물론 한글 고체까지 영역을 넓혀 한글 서체를 독학으로 완성한 것이다. 궁체의 경우 정자에서는 해서, 흘림에서는  행서나 초서를 혼용하는 것이 당연한처럼 자연스럽고 고체의 경우 전서의 권량문(權量文)의 자체나 파책이 없는 고예(古隸) 자체를 혼용하면 좋을것 같다고 갈파하였다. 특히 고체에서 획의 중묘(衆妙)를 잡아넣음으로써 생명을 배태 시킨다는 주장은 선생의 탁견이라 생각된다. 이런 것으로 보아 일중 선생은 한자의 전예(篆隸)를 써야 고체(古體)를 쓸 수 있다고 한 점은 선각자적 입장에서 본 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서산만조(西山晩眺)

  서예교육에 있어서도 고전(古典)본위로 지도하였으며 국한혼용주의 작가정신을 강조하고 실천(實踐)하였다. 선생의 글씨를 모방하지 말라고 지도했으나 선생의 예서체(隸書體)가 워낙 출중하고 인기가 있어 많은 후진 서예가들이 방서(倣書)하기를 즐겨하기도 했다.


  한글은 물론 한자 각체를 혼융(混融)을 통한 파체서(破體書)에 독보적인 성취를 이룬 선생은 글 또한 은유나 수사학에 개의치 않고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을 표현해 나간다. 그러나 언어선택은 정교하면서도 소박하다. 선생의 한글작품이나 시조 작품을 보면 범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선생의 걸어온 길)

  일중의 서예미는 점획의 운필에 있어 한예(漢隸)의 날카로운 금석기운(金石氣韻)이 안진경체의 부드럽고 원만한 필획속에 그대로 녹아나와 한없이 편안함과 동시에 다이나믹한 힘, 그리고 장중함을 동시에 담고 있다. 특히 각체를 혼융해서 쓴 파체서(破體書)의 경우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아름다움이 있다.

(귀주(歸舟) 1987년 작 破體書)

  일중의 글씨는 추사파 이래 비첩혼융이 시대서풍이 된 20세기 근현대 서단에서 왕희지와 안진경 중심의 진당고법(晋唐古法)과 전예(篆隸)는 물론 한글 궁체와 고체까지 하나로 혼융해 냄으로써 가장 실험적이면서도 가장 전통적인 거장의 작가로 자리매김 될 수 있을 것이다.(完)

(정치민안, 1998)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茂林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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