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

[스크랩] 서예가 雅石 蘇秉順(66) 선생을 찾아서

함백산방 2010. 12. 28. 19:44

 

 

 

평생을 서예와 그림과 함께 살아온 익산 출신 원로 서예가가 노익장을 과시하며 작품활동에 전념해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어릴 적 역경을 극복하고 서화로 명성을 날리게 됨은 물론 자식농사도 잘 지은 예술가로 정평이 나 관심을 끈다.

 

익산 왕궁면 출신으로 전주에서 활동하는 서예가 雅石 소병순(66) 선생이 주인공이다.

 

 

 

 

 

아석 선생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던 1941년 익산 왕궁면 왕궁리 호음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3남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가난한 집안사정으로 육성회비를 못내 집으로 쫓겨온 일과 점심을 거르는 배고픔 속에 초등학교를 보낸 기억 밖에 없다.

 

 

연습하느라 더욱 배가 고팠던 운동회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3~4km 초등학교를 오가다 남의 무우를 뽑아먹던 기억, 익지 않은 보리를 불에 익혀 먹던 일은 평생을 떠나지 않는다고.

 

 

익산중학을 졸업했으나 집안형편은 진학을 허락치 않았다.

 

 

부모님과 함께 농사일을 거들며 집안 할아버지 뻘인 소진우 선생에 한학을 공부한다.

 

 

 

 

 

 

 

 

 

 

22세까지 왕궁면 동면마을 서당에서 논어, 맹자까지 공부하며 주경야독하는 생활이 계속됐다.

 

 

화선지 대신 신문지를 구해다 새까맣게 구멍이 날 정도까지 쓰고 또 썼다.

 

 

훈장 선생은 서예 실력이 늘어가는 아석을 칭찬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라고.

 

 

23세에 결혼한 다음 1남4녀를 낳을 때까지 왕궁 본가에 계속 머무는 어려운 여건에도 서예를 향한 열정은 커져만 갔다.

 

 

아버님은 아석에게 "서예공부를 하려면 왕궁 골짜기가 아닌 나라를 흔들 정도 공부를 하라."는 평생 잊지 못할 말을 남긴다.

 

 

 

 

 

 

 

 

 

 

26세에 아석은 훗날 서예계 거목이 된 南丁 崔正均(1924~2001) 선생이 근무하는 원광고교에 찾아가 다짜고짜 서예를 가르쳐 달라고 읍소한다.

 

 

남정 선생은 여산보다 열 일곱살 많았는데 당시 원광고교 국어교사였다.

 

 

남정은 아석이 대견스러웠던지 "무슨 책이 있느냐?"고 물어왔고, 아석은 "'안진경 서첩'이 있다."고 하자 그것을 보고 무수히 연습시킨다.

 

 

자연 해서입문을 안진경체로 시작했고 아석 서체는 안진경체로 고착시키는 계기가 된다. 

 

 

아석의 글솜씨는 일취월장했고 3년 후 남정 선생이 서예에 전념하려 학교를 그만 두고 남중동으로 이사한 후 중앙동 '남정서실'에서 계속 공부한다.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운할 정도인 꼼꼼하고 대쪽 같은 성품의 남정 선생은 아석이 써 간 글의 잘못된 부분을 빨간 싸이펜으로 정정해 주며 글씨, 자세, 행동거지까지 엄격히 챙긴다.

 

 

 

 

 

 

1969년 아석은 '전북도미술전람회'에 최초로 도전했다 뜻을 못 이룬다.

 

 

절치부심 노력하던 아석은 이듬해 전북도미술전람회에 입선했고, 1971년에는 서예분야 최고상인 동상을 거머쥔다.

 

 

1971년부터 74년까지 연속 4회 특선을 해 '전북도전 추천작가'가 된다.

 

1972년 아석은 부인 전양애 님과 5남매를 거느리고 익산에서 전주 서신동으로 이사온다.

 

 

전주시청 부근 카톨릭센타에서 서예학원을 하며, 영생여상 서예강사, 영생대 미술교육과와 한문교육과 강사를 하며 7 식구 생계를 꾸려갔다.

 

 

도전에 입선하고 특선이 계속되자 아석을 보는 대우가 달라졌고, 인생에서 가장 행복감을 느끼던 때가 가난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는데 전주대 전신인 영생대 서예강사로 강단에 섰을 때라고.

 

 

중앙무대로 진출하러 1974년 가을 전국미술대전에 3점씩 출품했으나 3년을 거듭 낙선한다.

 

 

나름대로 자신이 붙었던 선생은 그 때마다 술로 울분을 달래며 투지를 불태웠다.

 

 

드디어 1977년 아석도 최초로 국전에 입선한다.

 

대학강단에 섰던 기억과 함께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남정 선생이 "앞으로 흑백 서예로만으로는 안되니 칼라 그림도 공부하라."는 조언에 따라 1978년경부터 아석은 사군자와 문인화도 독학으로 공부한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신념과 특정화가만 추종하면 그 화풍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고 여긴 아석은 각종 서화를 혼자서 공부한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포도, 연꽃, 사군자, 자목련, 나팔꽃 등에 대상에 구애받지 않고 두루 섭렵한다.

 

 

 

이후 1982년 하소기체로 국전 특선, 1983년 국전 추천작가를 거쳐 1988년 국전 초대작가 반열에 오른다.

 

 

국전초대작가가 됐으나 남정 선생은 제자의 글씨가 맘에 안들면 작품을 그냥 발로 밀어버리면서 "이것도 글씨냐?"면서 나름대로 중견 행세를 하던 제자들을 망신 주기 일쑤였다.

 

 

1993년과 1997년 국전 심사위원을 두 번 역임한 아석은 1980년 서울롯데호텔을 비롯 1984년 익산 영빈관, 1989년 전주 대성화랑, 1996년 서울 조선일보사 미술관 등에서 전시회를 갖는다.

 

 

선생의 명성이 전북을 넘어 전국에 알려진 '서화농사'보다 잘 된 것은 '자식농사'다.

 

조선일보에 근무하는 외아들은 물론 방사선과 전문의인 큰 딸과 전북의대 교수인 큰 사위, 목사인 남편과 카나다에 거주하는 둘째 딸, 약사인 셋째 딸, 치과의사인 막내딸과 현직판사인 막내 사위를 둔 아석 선생은 서예인들 가운데 자식농사를 잘 지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석 선생은 "서화를 잘한다."는 평보다 "자식농사를 잘 지었다."는 말을 들을 때 더욱 고생한 보람을 느낀다고. 

 

 

 

머리칼을 여러 가닥으로 쪼갤 정도로 섬세하고 정확하다는 평을 듣는 아석 선생의 서풍은 전서와 행서 및 초서에서 빛을 발한다.

 

 

덕암 이용엽(67) 전주문화원 동국전체연구소장은 "아석 선생은 타고난 소질과 끈질긴 독학으로 서예는 물론 문인화에 탁월하다."면서 "치밀하고 뛰어난 구도는 고희전을 준비하러 지금도 10만자를 목표로 글을 쓰는 것처럼 피와 땀과 눈물겨운 노력의 산물"이라고 평가했다.

 

 

아석의 대형작품 '용비어천가'가 장충동 국립극장에 있고, 전주 안기부에 전주팔경 하나인 '덕진채련'이, 지난해 도청에는 '천자문 절록'이 남겨졌다.

 

 

"야구의 꽃은 홈런이듯 서예의 꽃은 행초(행서와 초서)이다."고 말하는 선생은 다가교에서 2백m 가량 떨어진 전주시 중앙동 관통로변 4층에 접대실과 작업실 등 16평의 '아석서실'에서 작품활동에 전념한다.

 

 

부부가 집 근처인 화산공원을 1시간 30분 동안 6km 가량 걸은 후 점심을 먹고 택시로 서실에 도착한다.

 

 

오후 내내 작업에 몰두하다 저녁때 쯤 '술시'가 되면 지인들과 좋아하는 약주를 들면서 세월을 희롱한다.

 

 

온갖 역경을 극복한 선생은 불교 용어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자세로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살면 반드시 뜻을 이룬다."고 밝힌다.

 

 

법첩을 위주로 공부해야하나 이를 소홀히 하는 후진들에 "옛것을 토대로 두되 이를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변화시킨다."는 法古創新의 자세를 견지하라고 당부한다.

 

 

국가발전의 초석인 문화예술을 홀대하는 경향을 안타깝게 여긴다는 선생은 고희전에 서화집과 인생을 담은 책을 내고 싶은 것이 희망이라고.

 

 

이를 위해 용비어천가, 호태왕비, 채근담, 금강경 예.행서, 노자 도덕경, 천자문 전.초서, 귀거래사 등 무려 10만자 서예작품과 그림 등을 준비하는데 현재 6만자 가량 썼다고./고재홍 기자>

 

 

 

서예가 雅石 蘇秉順(66) 선생을 찾아서

평생을 서예와 그림과 함께 살아온 익산 출신 원로 서예가가 노익장을 과시하며 작품활동에 전념해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어릴 적 역경을 극복하고 서화로 명성을 날리게 됨은 물론 자식농사도 잘 지은 예술가로 정평이 나 관심을 끈다.

익산 왕궁면 출신으로 전주에서 활동하는 서예가 아석 소병순(66) 선생이 주인공이다.

아석 선생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던 1941년 익산 왕궁면 왕궁리 호음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3남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가난한 집안사정으로 육성회비를 못내 집으로 쫓겨온 일과 점심을 거르는 배고픔 속에 초등학교를 보낸 기억 밖에 없다.

연습하느라 더욱 배가 고팠던 운동회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초등학교를 오가다 남의 무우를 뽑아먹던 기억, 익지 않은 보리를 불에 익혀 먹던 일은 평생을 떠나지 않는다고.

익산중학을 졸업했으나 집안형편은 진학을 허락치 않아 부모님 농사일을 거들며 집안 할아버지 뻘인 소진우 선생에 한학을 공부한다.

22세까지 왕궁면 동면마을 서당에서 논어, 맹자까지 공부하며 주경야독하는 생활이 계속됐다.

화선지 대신 신문지를 구해다 새까맣게 구멍이 날 정도까지 쓰고 또 썼다.

훈장 선생은 서예 실력이 늘어가는 아석을 칭찬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라고.

23세에 결혼한 다음 1남4녀를 낳을 때까지 왕궁 본가에 계속 머무는 어려운 여건에도 서예를 향한 열정은 커져만 갔다.

아버님은 아석에게 "서예공부를 하려면 왕궁 골짜기가 아닌 나라를 흔들 정도 공부를 하라."는 평생 잊지 못할 말을 남긴다.

26세에 아석은 훗날 서예계 거목이 된 南丁 崔正均(1924~2001) 선생이 근무하는 원광고교에 찾아가 다짜고짜 서예를 가르쳐 달라고 읍소한다.

당시 원광고교 국어교사였던 남정 선생은 아석이 대견스러웠던지 "무슨 책이 있느냐?"고 물어왔고, 아석은 "'안진경 서첩'이 있다."고 하자 그것을 보고 무수히 연습시킨다.

자연 해서입문을 안진경체로 시작했고 아석 서체는 안진경체로 고착시키는 계기가 된다. 

아석의 글솜씨는 일취월장했고 3년 후 남정 선생이 서예에 전념하려 학교를 그만 두고 남중동으로 이사한 후 중앙동 '남정서실'에서 계속 공부한다.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운할 정도인 꼼꼼하고 대쪽 같은 성품의 남정 선생은 아석이 써 간 글의 잘못된 부분을 빨간 싸이펜으로 정정해 주며 글씨, 자세, 행동거지까지 엄격히 챙긴다.

1969년 아석은 '전북도미술전람회'에 최초 도전했다 뜻을 못 이뤄 절치부심 노력해 이듬해 입선했고, 1971년에는 서예분야 최고상인 동상을 거머쥔다.

1971년부터 74년까지 연속 4회 특선을 해 '전북도전 추천작가'가 된다.

1972년 아석은 부인 전양애 님과 5남매를 거느리고 익산에서 전주 서신동으로 이사온다.

전주시청 부근 카톨릭센타에서 서예학원을 하며, 영생여상 서예강사, 영생대 미술교육과와 한문교육과 강사를 하며 7 식구 생계를 꾸려갔다.

도전에 입선하고 특선이 계속되자 아석을 보는 대우가 달라졌고, 인생에서 가장 행복감을 느끼던 때가 가난으로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전주대 전신인 영생대 서예강사로 강단에 섰을 때라고.

중앙무대로 진출하러 1974년 가을 전국미술대전에 3점씩 출품했으나 3년을 거듭 낙선한다.

나름대로 자신이 붙었던 아석은 그 때마다 술로 울분을 달래며 투지를 불태웠고, 드디어 1977년 최초로 국전에 입선한다. 대학강단에 섰던 기억과 함께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남정 선생이 "앞으로 흑백 서예로만으로는 안되니 칼라 그림도 공부하라."는 조언에 따라 1978년경부터 아석은 사군자와 문인화도 독학으로 공부한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신념과 특정화가만 추종하면 그 화풍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고 여긴 아석은 각종 서화를 혼자서 공부한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포도, 연꽃, 사군자, 자목련, 나팔꽃 등에 대상에 구애받지 않고 두루 섭렵한다.

이후 1982년 하소기체로 국전 특선, 1983년 국전 추천작가를 거쳐 1988년 국전 초대작가 반열에 오른다.

국전초대작가가 됐으나 남정 선생은 제자의 글씨가 맘에 안들면 작품을 그냥 발로 밀어버리면서 "이것도 글씨냐?"면서 나름대로 중견 행세를 하던 제자들을 망신 주기 일쑤였다.

1993년과 1997년 국전 심사위원을 두 번 역임한 아석은 1980년 서울롯데호텔을 비롯 1984년 익산 영빈관, 1989년 전주 대성화랑, 1996년 서울 조선일보사 미술관 등에서 전시회를 갖는다.

선생의 명성이 전북을 넘어 전국에 알려진 '서화농사'보다 잘 된 것은 '자식농사'다.

조선일보에 근무하는 외아들은 물론 방사선과 전문의인 큰 딸과 전북의대 교수인 큰 사위, 목사인 남편과 카나다에 거주하는 둘째 딸, 약사인 셋째 딸, 치과의사인 막내딸과 현직판사인 막내 사위를 둔 아석 선생은 서예인들 가운데 자식농사를 잘 지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석 선생은 "서화를 잘한다."는 평보다 "자식농사를 잘 지었다."는 말을 들을 때 더욱 고생한 보람을 느낀다고. 

머리칼을 여러 가닥으로 쪼갤 정도로 섬세하고 정확하다는 평을 듣는 아석 선생의 서풍은 전서와 행서 및 초서에서 빛을 발한다.

덕암 이용엽(67) 전주문화원 동국전체연구소장은 "아석 선생은 타고난 소질과 끈질긴 독학으로 서예는 물론 문인화에 탁월하다."면서 "치밀하고 뛰어난 구도는 고희전을 준비하러 지금도 10만자를 목표로 글을 쓰는 것처럼 피와 땀과 눈물겨운 노력의 산물"이라고 평가했다.

아석의 대형작품 '용비어천가'가 장충동 국립극장에 있고, 전주 안기부에 전주팔경 하나인 '덕진채련'이, 지난해 도청에는 '천자문 절록'이 남겨졌다.

"야구의 꽃은 홈런이듯 서예의 꽃은 행초(행서와 초서)이다."고 말하는 선생은 다가교에서 2백m 가량 떨어진 전주시 중앙동 관통로변 4층에 접대실과 작업실 등 16평의 '아석서실'에서 작품활동에 전념한다.

부부가 집 근처인 화산공원을 1시간 30분 동안 6km 가량 걸은 후 점심을 먹고 택시로 서실에 도착한다.

오후 내내 작업에 몰두하다 저녁때 쯤 '술시'가 되면 지인들과 좋아하는 약주를 들면서 세월을 희롱한다.

온갖 역경을 극복한 선생은 불교 용어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자세로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살면 반드시 뜻을 이룬다."고 밝힌다.

법첩을 위주로 공부해야하나 이를 소홀히 하는 후진들에 "옛것을 토대로 두되 이를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변화시킨다."는 法古創新의 자세를 견지하라고 당부한다.

국가발전의 초석인 문화예술을 홀대하는 경향을 안타깝게 여긴다는 선생은 고희전에 서화집과 인생을 담은 책을 내고 싶은 것이 희망이라고.

이를 위해 용비어천가, 호태왕비, 채근담, 금강경 예.행서, 노자 도덕경, 천자문 전.초서, 귀거래사 등 무려 10만자 서예작품과 그림 등을 준비하는데 현재 6만자 가량 썼다고.

 

<고재홍 기자글 '우리문화' 경복궁 옮김>

출처 : 우리문화
글쓴이 : 경복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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