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세계 20 / 근원 김양동
세계인을 매료시킬 빛살조형의 미학
일찍이 어느 옛 사람은 바람 소리를 나누어 몇 십 가지로 열거하였다. 사실 바람소리가 그러한 세목(細目)으로만 끝난다면 세상의 사물이나 이치가 무엇에 필요하랴. 다시 말해 옛사람들이 이름짓고 가름하고 버리는 것이 완벽하다면 뒷사람의 할 일이 따로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세상의 사물이나 이치란 참으로 무궁하고 오묘하기에 예술가는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는 일체의 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일이 일반인과 다를 뿐이다.
근원 김양동 선생은 어제 본 바람이 오늘 본 바람과 다르고, 내일 보게 될 바람과 다르다는 것을 언제나 새롭게 깨달으며 늘 이러한 깨달음 속에서 살고 싶어한다.
그것은 우리 앞에 자연이 살아있음을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일이자 때로는 작가 스스로 자연의 하나로 변신하는 일이기도 하다. 숨쉬고 있는 자연의 숨소리를 듣고, 생각하고 있는 자연의 뜻을 헤아리고, 말하고 있는 자연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는 일, 이것이 바로 근원선생이 추구하는 작품세계의 한 모티브가 되고 있다.
따라서 선생의 작품은 그냥 놓아두어도 우리의 영혼속에 내재하는 토속적이고 자연적인 울림대로 흘러감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첫 작품집을 출간하기까지 거의 30년 가까이 적공의 시간을 보내면서 예측 가능한 기능적인 서예작품을 발표한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동원해 정체성찾기에 전력했고, 두 번째 작품집에서는 주거와 생활공간 속에서 사유하는 얼의 본질을 규명해 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번 뉴욕에서 열리는 세번째 작품전에서는 한국적이랄까, 자신이 살고 있는 이 땅에 살다간 것들과 동양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를 현대미술의 본거지인 미국에 펼쳐보이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선생의 작품세계가 형성된 그의 정신경계와 작품을 통해 작가에게 다가가 보려고 한다.
깎은 머리에는 관이 쓸 데 없다
선생의 작품세계에는 동양의 여러 사상체계 가운데 유가와 노장 및 불가의 선사상을 바탕으로 선생 자신의 명징한 심미의식이 녹아있고, 그 속에 여러 가지 형태의 화두로 풀어져 있다. 한문, 문자학, 역사, 국문학, 미술사, 문화재, 고고학, 고미술감정학, 서론, 서예사 등의 인문학과 서예학을 두루 섭렵한 선생의 학문체계는 한국학방면이나 미학방면에서도 주목할만한 논거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른바 머리빗는 빗살이 아닌 햇살인 빛살로 신석기 토기의 문양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과 “신(神)”의 문자학적 재해석 등 신선한 학설의 제기는 고정관념에 대한 끊임없는 반문의 결과인 셈이다. 이러한 인접학문을 바탕에 깔고 움터오른 작품세계는 단순히 기능적으로 숙련되게 문자를 서사하는 작가의 손길과는 다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
오래 전에 인사동 어느 식당에서 선생은 필자에게 장자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장자 소요유(逍遙遊)편에는 은대 송나라 사람들의 머리에 얹는 관 이야기가 나온다. 송나라 사람이 장보(章甫)라는 관을 가지고 돈벌러 월나라에 갔는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깎고 문신을 하였기 때문에 장보라는 관을 쓸 필요가 없었다. 즉 송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관을 사용한다는 보편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웃나라인 월나라 사람들의 시각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어느 한 쪽이 바라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한 쪽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는 우화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필자는 “예술을 하는 사람은 획일적일 수 없고, 획일적이어서는 안된다”는 선생의 소신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예를 바라보면 비록 명가들이 다듬어 놓은 법첩이라도 오늘의 시각으로 다시 바라보고 재해석이 가해질 때 새로운 고전이 될 것이다. 묵수적으로 고전의 재현에만 급급한다면 예술세계에서 새로운 지평은 열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생의 시각은 이른시기부터 이런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수용하였기에 늘 획일적으로 갇혀 있기를 거부하였다. 80년대 중반에 발표한 <한공겸알구(漢孔謙謁句)>(작품 1)에서 우리는 선생의 깨어있는 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방촌의 인면을 확대하여 석고에 새기고 그것을 다시 탁본하여 화면중앙에 얹히면서 녹색으로 장식한 탁월한 색감은 이 때부터 숨어있던 색감다루는 솜씨까지 드러낸 것이다. 즉 기존작가의 일반적인 작품과 차별화하려면 생각과 재료와 기법까지 바뀌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 작품을 보고 월전선생과 일중선생이 호평을 하였다는 후일담이 있을 정도로 당시에는 신선하였던 듯 하다. 이와 같이 80년대부터 작품을 제작할 때 부단한 실험과 늘푸른 열린 시각으로 새로운 미감에 도전하는 선생에게 있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의식은 필요없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한국적 색깔과 원시적 조형어법의 세계
90년대 접어들면서 선생의 미의식은 우리것에 대한 치열한 탐구로 구체화된다. 96년 열린 개인전평문에서 일본의 저명한 서예평론가(小野寺啓治)는 “각, 서, 화라고 하는 세 가지의 표현영역을 통해 한 장의 종이 위에 융합시켜서 공생(共生)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였다”라고 하면서 한자문화권의 테두리를 넘어서서 세계무대에서 다른 미술과 같이 이해되는 서예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왕룡교수는 선생에 대해 “전서, 예서, 행서, 해서 그리고 전각을 한 몸에 갖추고 있으며, 심오한 한학적 수련과 수양을 겸비한 비범한 실력을 지닌 전재형(全才型)의 예술가”라고 평가하면서 작품에 대해서는 “자연진솔(自然眞率)한 심미적 세계의 새로운 경지”를 추구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이와 같이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선생의 심미관은 한국적인 것을 바탕으로 세계 속에 우리 서예, 나아가 우리 미술에 녹아있는 정체성을 살펴서 발표하고 있다.
한국인이 한국인이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모국의 미감을 통해 서예미감을 어떻게 잘 구성해 내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여기서도 전통은 어린아이의 젖줄처럼 늘 이어져서 작용한다고 보여진다. 우리민족이면 누구나 감지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미감을 어떻게 작품으로 승화시켜 낼 것인가. 이런 화두를 선생은 우리의 설화와 고대 의식 그리고 고대문화의 상징체계속에서 찾아내고자 하였다.
95년 제작된 작품 <신도(神道)>(작품 2)에서 선생의 이러한 미의식을 엿볼 수 있다. 선생은 신석기시대 토기에 남아있는 새김질을 원시인들의 태양숭배가 빚어낸 햇살, 즉 빛살로 해석하고, 그 근거로 신(神) 자는 바로 태양의 광선이며, 순수고유어인 ‘살’이라고 유추해낸다. 그리고 그러한 논리적인 사상체계속에서 나온 작업임을 밝히고 있다. 빛살무늬를 시골집의 짚풀로 엮은 도구처럼 재구성한 이 작품은 토속성과 무기교가 빚어낸 넉넉한 큰맛을 풍기고 있다. 한자와 한글로 주석처럼 달아놓은 작품의 장법도 새로운 시도이다.
95년 작품 <청동시대>(그림 3)는 전각기법으로 획을 새기고 창틀 같은 공간 안에 사람을 새긴 추상적인 작품이다. 양각으로 돌출된 부분은 청동색을 칠하여 미래를 향해 무한한 꿈에 도전하는 작가의 심상을 표현한 듯 하다. 피카소의 청동시대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는 이 작품은 문자의 틀에 갇힌 고답한 서예이미지는 거의 사라지고 각의 기법을 살린 신선한 현대회화작품으로 기능한다.
93년 발표한 작품 <인영삼과(印影三顆)>(그림 4)는 인영 세 개를 중앙상단에 배치하고 그 아래는 농묵과 담묵으로 바탕을 칠하여 전각작품을 독립된 회화영역으로 끌어낸 시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이 발표된 이후로 국내에서 전각작품을 발표하는 사람들이 단순하게 인영만 찍어서 보여주는 것에서 다양한 오브제나 배면처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95년 발표한 작품 <무천(舞天)>(그림 5)은 우리 조상들의 신명을 작품으로 드러낸 것이다. 고구려의 동맹과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은 모두 솔개의 하늘소리를 따라서 긴소매와 여유있는 몸짓으로 흥을 발산한 것이라고 본 작가는 토채와 오래된 고지위에 세월의 흔적을 도판 위에 각을 하여 탁본으로 떠 낸 뒤 그 위에 발문을 써서 마무리 하고 있다. 이런 작품양식은 국내외에서 독창적인 방식이다. 우리문화에 대한 오랜 연구결과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상고취향이 물씬 담긴 내용과 호흡이 긴 여유있는 선, 토속적인 재료와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천연색감과 전각으로 수련된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각에 의한 마티에르는 선생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와 같이 90년대 선생의 작품에서는 우리의 고대문화원형에 대한 탐구를 작품으로 옮기는데 주력하였다. 재료와 기법면에서도 전각의 새김을 확장하고 도판(陶版)의 활용과 고지의 사용 등으로 오랜 세월의 이미지를 살려내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시도는 서단은 물론이고 화단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토속적 이미지로 세계인을 감동시킬 추상회화
2000년대 이후 선생의 작품은 다시 일변한다. 이미 선생의 작품속에는 서예적인 이미지가 거의 사라진다. 문자를 조형성있게 배치하고 결구와 용필의 재미를 느껴보는 고전적인 의미의 현대서예작품에서 성큼 나아가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현대회화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사물의 구체적인 물상을 재현하는 구상회화보다 우리 고대문화에서 유추된 이미지를 화면에 살려낸 오리엔탈 이미지가 담긴 추상회화에 가까운 작품이다. 이러한 선생의 작품양식을 필자는 현대추상서예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주지하듯이 현대미술은 본질적으로 개념적인 것이다. 미니멀 아트(Minimal Art)가 일어났다 소멸하면서, 여지껏 보편적으로 이해되어 왔던 예술품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까지 바뀌면서 이를 대용하는 개념들 그 자체로 귀착되고 있기까지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추상서예작품이란 개념도 그 시초부터 세계적, 의도적, 목적적이고 방향지워지고 계획된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2005년 발표한 최근 작품 몇 점에서는 이러한 선생의 의도가 선명하게 감지된다. 작품 <황금물고기>(그림 6)는 물고기 세 마리를 가운데 배치하고 다양한 기하학적인 문양을 주변에 부가하여 사찰의 오래된 문창살을 바라보는 느낌을 준다. 돌출된 선 위에 금물로 채색하여 고귀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반야심경>(그림 7)은 화면을 여럿으로 쪼개어 잇대고 윗부분에는 햇살문양을, 아랫부분에는 다양한 불상이미지를 넣고 윗부분 중앙에 두 개의 부처상을 배치하여 겅건한 느낌을 자아낸다. 무릇 종교화에서 주 경배대상을 중앙에 그려 주목과 존중과 집중이 되도록 한 원리를 한껏 살리고 고분벽화를 보듯 오랜 세월이 묵은듯한 색조로 채색하여 분위기를 돋구고 있다.
<한국의 미>(그림 8)는 아무것도 없는 듯하나 그 속에서 시골집 벽과 천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실제 작품에서도 볏짚이 섞여 있어서 흙벽의 이미지가 느껴진다. 좌측 상단에 천연염색된 천을 붙여 시각적으로 무미건조함을 덜어주고 있다.
<한 맥>(그림 9)은 어릴적 시골 골목 어귀에 있는 담벼락에 낙서하는 듯한 이미지가 강하게 발산된다. 은은하게 문자를 양각으로 탁출해 내고 오른쪽 위에 역시 꼴라쥬 하듯 처리하고 있다. 심원한 의경이 내달리게 하는 공간은 동양적 여백의 미가 두드러진다.
<무제>(그림 10)는 앞의 그림과 유사하나 좌측에는 은은하게 채색한 위에 낙서하듯 처리하고 우측 하단부에는 선비들의 간찰형태처럼 문자를 눕혀서 서사하였다. 전체적인 이미지에서 분청사기의 질박한 미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서예의 문맥에서 획득한 조형미감을 유감없이 작품에 투영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와 같이 선생은 2000년 이후 최근의 작품에서 고전적인 서예작품양식을 초월하여 다양한 형태의 현대추상서예양식을 발표하고 있다. 이제 선생은 서예가에 머물지 않고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세계인이 공감하는 미술가로 거듭나고 있다. 90년대 이전에 유가, 도가, 불가와 우리민족 고유의 제사상에 심취한 뒤 선생의 독창적인 사상체계를 구성하고 그것을 서예적인 미감으로 환치시켜왔다면, 2000년 이후는 나아가 세계인들을 향해 동양의 정신과 문화구조속에서 나온 미의식을 작품으로 구성하여 펼쳐보이고 있다. 선생의 오리엔탈리즘이 묻어있는 예술작품이 세계인의 가슴을 공명시키길 기원한다.
글쓴이 : 정태수(월간 서예문화 편집주간, 서예세상 카페지기)
*이 글은 월간 서예문화 2005년 10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그림1) <한공겸알구>, 60x76, 1984
(그림 2) <신도(神道)>, 40x48, 1996
(그림 3) <청동시대(靑銅時代)>, 50x36.5, 1996
(그림 4) <전각3과>, 63x58, 1993
(그림 6) <황금물고기>, 46x57, 2005
(그림 7) <반야심경>, 89x103, 2005
(그림 8) <한국미의 원형>, 115x152, 2005
근원 김양동 선생 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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