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세계

[스크랩] 기운과 여백이 살아있는 문인화(남천 정연교)

함백산방 2010. 12. 28. 19:34
 

작가의 세계 / 남천 정연교


             기운과 여백이 살아있는 문인화


남천 정연교선생은 1945년 군산 옥구에서 정복연씨와 조정례여사의 5남 1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동양화가이면서 중학교 미술교사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미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의 부친은 김우범선생과 황용하선생의 문하에서 그림공부를 한 동양화가로서 팔도에 병풍을 팔 정도로 이름있는 작가였다. 유아기부터 집에서 가학으로 시작한 그림공부는 스케치와 사군자를 넘나들며 꾸준히 계속되었다. 선생의 여동생도 현직 중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있고 선생의 아들 역시 원광대학교 서예과에 재학하고 있으니 3대째 가학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중학교에 입학하자 하루에 글씨 1점과 사군자 1점, 풍경스케치 1점을 숙제로 제출해야 저녁식사 때 부친으로부터 혼나지 않을 정도로 부친의 엄격한 미술교육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과제부과는 군산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방학을 이용해 이당 김은호선생을 찾아 화조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다 전문적인 서화공부는 30대 후반에 이르러 남정 최정균선생의 문하에 입문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서예와 문인화를 동시에 익혀나가면서 체본에 의지하기 보다 공부한 내용을 점검받고 교정해 나가면서 선생의 예술혼과 실기능력을 전수 받았다. 또 전문적인 작가로서 깊은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미술에 대한 상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전주대학교에서 미술교육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만학으로 마치기도 하였다. 


 80년대 초반에 미술대전에서 여러번 입상하였는데 88년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공모전을 마쳤고, 80년대 초반부터 군산에서 남천사군자연구실을 개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동안 작가활동을 하면서 사군자 위주의 작품을 발표해왔는데 그 이유는 문인화의 본령이 여기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이미 화조와 인물까지 공부하였으나 공필의 정물화보다 일기가성으로 이루어지는 문인화의 매력만큼 선생의 마음을 끌지 못하였고, 어설픈 작품으로 이것저것 잘 할 수 있다는 만용을 보여주는 것은 자신과 감상자들을 미혹시키지 않겠다는 프로작가로서의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사군자에서 문인화의 핵심을 가다듬고


 선생의 문인화를 표현기법면에서 보면, 그는 사군자 가운데 대나무와 난초를 특히 즐겨 그리는데 대나무의 속성과 난의 고귀한 자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대나무를 생장과정에서부터 자세히 관찰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사의화를 그리지만 대나무의 식물적 생태를 훤히 알고 있어야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어릴적 외갓댁에 가면 주변에 죽림이 무성해서 늘 죽순과 댓잎이 자라는 모습을 스케치하면서 살펴보곤 하였는데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선생의 대그림은 이러한 노력덕분이다. 각종 화집에 나오는 대그림과 오창석과 이응로선생의 자유분방한 대그림을 즐겨 임화하면서 선생만의 독자적인 대그림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90년대의 작품 <죽림도>(그림1)는 무성한 실제적인 댓잎의 형상을 어느 정도 담고 있다. 99년의 작품 <죽석도>(그림2)에서는 돌과 댓잎이 조응하는 듯 강한 묵맛이 시선을 끈다. 2003년에 제작된 대작 <세한도>(그림 3)에서는 용솟음치듯 댓잎이 휘날리고 있다. 대나무 그림에서 잎의 처리가 제일 어려운 법인데 선생의 화면에서 잎의 처리는 한 순간에 마음을 풀어놓고 속사해낸 분위기가 느껴진다. 2005년의 근작<묵죽>(그림 4)에서는 잎이 훨씬 자유스럽고 사의적이며 잔가지는 생략되어 있다. 기운미와 여백과 일회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가의 의식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으로 보여진다. 역시 선생의 작품에서는 대그림이 두드러져 보인다. 


 난초는 추사와 대원군 및 민영익의 난을 참고하면서 역시 독자적인 난을 그려내고 있다. 매화와 국화도 부친으로부터 가학으로 전수를 받았지만 부친은 자신의 그림을 배우면 안된다면서 체본을 해준적이 거의 없었다. 90년대의 매화작품인 <설매>(그림 5)에서는 파묵으로 처리된 묵은 둥치에서 뻗어나온 가지에 매화가 소복히 피어있다. 화면의 오른쪽에 만들어진 여백은 그리지는 않았지만 그려진 공간으로 기능하는 공간이다. 견고한 서예수련을 통해 나온 힘찬 붓질은 매화가지에서 강하게 발산된다. 2005년의 매화작품 <매조>(그림 6) 에서는 대각선 구도로 좌우가 시원한 의경미를 조성하고 있다. 대담한 생략과 일회성을 강조한 담백한 그림에서 선생의 탁월한 여백경영이 드러난다. 국화 그림도 <능상>(그림 7)에서 시원시원한 획질로 강한 기운미를 전한다. 일반적으로 국화 그림은 기운이 약해 보이는데 선생의 작품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약하게 보이기 쉬운 국화잎에서도 빠르면서도 맑고 고운 선질이 돋보인다. 우측상단을 과감하게 비운 구도도 심원한 의경미를 느끼게 한다. 2005년의 <만절>(그림 8)은 단순미를 보인다. 그러면서도 잎에서 농담의 운치가 있기 때문에 풍성함을 잃지 않고 있다.


 사군자 외에도 90년대 제작된 <물새>(그림 9)처럼 근작에서는 새그림이 많다. 이 그림에서는 몇 번의 붓터치로 힘찬 기운을 담은 물새와 깔깔한 나뭇가지를 그려내고 아래의 여백으로 분위기를 맞추어 낸다. 닭을 그린 2003년도의 <그대 벗삼아>(그림 10)도 이런 분위기와 여백미가 강조된다. 2002년의 <부귀도>(그림 11)는 목단의 부드러움과 화사한 맛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사군자 외에도 여러 소재들은 곧잘 선생의 화면위에 등장한다. 사군자에서 시작된 소재들은 이제 점점 다양한 대상으로 폭이 확대되어 가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무위의 기운과 여백으로 이루어진 세계


 선생의 작품세계를 미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는 특정종교는 없지만 작업과정에서 도가사상으로부터 많은 사상적 기반을 제공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가에서 인위(人爲)의 위(爲)는 조작으로 보고 부정하지만 무위(無爲)의 위는 자연의 조화이므로 긍정적으로 본다. 인위성을 배제한 뒤 한 붓으로 이루어지는 작업과정에서는 철저한 무위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 작가가 의식적으로 무엇을 그린다든가 그려내고자 하는 생각조차 잊어버리고 작품에 몰두해야 만족할 만한 무위의 작품이 나오는 법이다.


 또한 선생은 작업에서 기운생동이 제일 중요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한다. 동양의 서화에서 기운은 미적인 형식에 있어서 정신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다. 기운은 바로 생명이 강하고 깊어서 화면에서 역동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기운은 서화에서 예술가의 생명력과 창조력, 예술작품의 생명, 나아가서 예술의 본질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인화가가 기운미를 중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백은 문인화에서 그냥 무의미하게 비워둔 공간이 아니다. 여백은 비워둔 공간 또는 표현된 형체 이외의 요소로 간주되는 부분으로서의 공간을 말한다. 그러나 단순하게 빈자리가 아니라 형태와 똑같은 가치로 여겨지고 있다. 여백은 공간적 깊이를 제공해 주는가 하면, 심원한 의경을 제공하기도 하고 함축미를 자아내기도 한다. <<주역>>에 보면, “말로써는 그 뜻을 다할 수 없으나 상(象)은 다할 수 있다(立象以畵意)”는 말이 있다. 선생의 문인화에서도 여백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문맥에서 선생의 작품을 바라보면, 감필법과 함축미는 여백의 본질과 상통하며, 비워놓은 여백은 그리지는 않았지만 그린 공간 이상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태점 하나로 화면을 가득 채워야


 선생은 서실을 개원한 뒤 20년 동안 서울과 군산을 왕래하면서 하늘과 자연을 바라보면서 사철의 변화와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아 왔다. 공부에 대한 열정도 40이 되어야 비로소 자신이 가야할 예술노정에 대한 분명한 지침이 설정된다고 생각하는 선생은 그 이전엔 기초공부를 하는 시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작품은 해가 있는 낮시간에만 한다고 한다. 저녁이 되어 땅거미가 내리면 양의 상태에서 음의 상태로 들어가니 좋은작품이 나오기는 어렵다는 생각에서 깨어있는 낮시간에 충실하게 그린다고 말한다. 문인화를 공부할 때 초학자가 견지해야 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필자의 질문에 선생은 “첫째는 필력을 길러야 하고, 둘째는 필세를 알아야 하고, 셋째는 먹과 붓의 성질을 알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기초가 갖춰진 이후에는 사군자를 능숙하게 할 수 있도록 각고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서예의 연마는 필수적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제자들에게 평소 들려주고 있는 말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자기의 정신과 작품이 일치되어야 하고,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담긴 작품을 제작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신의 모습이란 바로 남의 그림을 흉내낸 그림이 아닌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이라야 된다는 의미이다.


 24년전에 화실을 개원한 뒤 선생이 걸어온 길을 제자들에게 똑 같은 방법으로 교육을 시키고 있다. 스스로 눈을 키우고 손을 단련하고 생각을 키워야 작가로서 홀로서기를 할 수 있다는 소신 때문이다. 쉽게 배우면 귀중한 것도 모르고 자기것으로 만들지 못하기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생전에 그의 부친이 했던 말 가운데 “붓으로 그리는 그림 중 문인화가 최고이니 일회성과 정신성을 살려 자기세계를 가꾸라”는 격려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젊은 시절 한 때는 먹그림이 싫어서 잠시 붓을 놓으려고도 하였지만 연어가 회귀하듯이 어릴때부터 가까이 해 온 지필묵의 세계로 다시 복귀하였다. 담백하고 유현한 먹맛과 활기차고 거짓없는 붓맛을 40이 넘어서면서 알게 되자 평생 동안 문인화가로의 외길을 걷기로 다짐하였고, 문인화를 그리고 있으면 세상잡사를 모두 잊어버리는 열락의 시간이 된다고 하니 타고난 작가인 듯 하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 선생은 일요일 오전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서 혼자서 먹을 두 시간 동안 갈고 있었다. 진한 먹향이 코끝에 전해오는 작업실에서 문인화를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태점 하나를 찍어도 화면에 허점이 없어 보여야 하고, 수많은 죽간을 그려도 복잡해 보이지 않아야 문인화가 아닌가?”라고 되묻는다. 사군자로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자연물과 살아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그려나가고 있는 선생의 작품세계는 일회성을 중시하되 지나치게 현대성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칫 현대성을 따라가다 전통성을 놓쳐 버리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현대성을 추구하더라도 선생 자신은 전통성을 굳게 지켜나갈 것이라고 한다. 가장 전통적인 것이 가장 현대적이라는 것을 선생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또한 세계인을 공명시킬 것으로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팔공산 삼도헌에서 정태수

 


남천 정연교 선생

<세한도>


<만절>



전시장에서 서예가들과(오른쪽이 작가)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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