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박물관을 건립해 지난 40여년 동안 모아온 유물들을 전시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건이 주어진다면 고향 근처에 5천~1만평 정도의 임야를 구입해 전시관을 짓고 자연석을 이용한 비림박물관을 함께 만들어 ‘우리나라에도 이런 박물관이 있구나’ 하는 소리를 듣도록 해보고 싶습니다.”
광양출신의 서예가로 지난 40여년동안 벼루와 국내 대가들의 서예작품을 모아 온 석포 주계문(66) 선생의 말이다.
광양시 옥룡면 덕천 태생인 석포는 대한민국서예전람회(국전) 심사위원장과 운영위원장, 한국서가협회 이사장과 회장을 역임한 서단의 원로 서예가이다.
이런 그가 평생을 두고 모아 온 서예관련 문화재들을 일반에 공개할 수 있는 전시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석포 주계문 선생은 현재 한국격투기협회 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문무를 겸비한 서예인이다.
10대때부터 태권도를 익힌 석포는 군 입대후 수도경비사령부에서 근무하면서 청와대 경호실 직원들을 대상으로 태권도를 지도하기도 하고, 군 정보요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치인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고 한다.
군 복무 중 광양출신의 이현재 전 국회의원과 인연을 맺었던 석포는 한때 건설부와 한국도로공사, 광양군 농촌지도소, 옥룡단위농협 등에서 근무하기도 하다가 1975년 서울에 정착하게 된다.
이현재 국회의원의 현역 시절 이의원을 보좌하기도 했던 그는 이현재 의원의 재선을 위해 뛰다가 이 의원이 낙선하자 서울로 상경한 것.
서울에 정착한 그는 태권도 도장과 서예학원을 함께 운영하게 된다.
그가 서예와 인연을 맺은 것은 어린 시절부터 선친인 덕은 주수동 선생에게 서예를 배운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한학자였던 부친의 회초리가 무서워 붓을 들었던 것이 평생동안 붓과 함께 살아온 계기가 됐던 것이다.
서울에서 태권도장과 서예학원을 운영하던 그는 이현재 전의원의 재기를 위해 정치권 인사들과 지속적으로 인연을 유지해 왔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로 도래한 80년대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추진하던 정치단체의 결성을 위한 작업에도 참여하게 된다.
1980년, 전남 동부지역 조직책임을 부여받은 그는 조직결성을 마무리하고, 이를 동교동에 전달하기 직전에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체포되자 1년여동안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도피생활에 지쳐갈 즈음 그는 자신에 대한 당국의 태도를 알아보기 위해 여권을 신청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권과 비자가 정상적으로 발급되었다.
여권과 비자가 발급되자 그는 액자와 족자, 병풍 등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83년 10월 22일부터 29일까지 한일문화교류협회 초청으로 열린 그의 개인전은 일본 메이저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일본의 아사히, 마이니치, 요미우리, 산케이 등 일본 언론들은 그의 개인전에 대해 ‘한국이 낳은 서예의 대가’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에서의 그의 개인전이 이처럼 큰 관심을 끌게 된 것에 대해 석포는 “일본 유명작가의 서첩을 부친이 소장하고 있어 어려서부터 그 필법을 많이 써 보았는데, 이러한 필법이 일본인들의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 같았다”고 술회한다.
일본에서의 개인전 성공에 고무된 그는 귀국 후 서예학원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서예에 매진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서예를 하면서 그는 서예의 매력에 흠씬 젖어들었고, 서예에 전념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국전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국내 최고권위의 국전 심사위원장과 운영위원장을 역임하고, 각종 전람회의 심사 및 운영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석포는 명실상부한 한국 서단의 고목으로 성장해 갔다.
젊은 시절, 정치인들과 함께 생활해 왔던 그에게는 항상 정치권의 유혹이 있었다.
198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복권된 후 치러진 13대 총선을 앞두고 석포는 자신이 모시던 이현재 전의원의 공천을 위해 동교동과 관계를 맺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이돈만 전의원이 공천자로 결정이 되자 동교동을 찾아 항의를 하기도 했다.
이런 그의 모습에 대해 당시 동교동 측 인사들은 “의리 있는 친구”라며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이후 15대 총선에서 그는 한때 광양지역 출마설이 나돌기도 할 정도로 정치권과는 항상 지근거리에서 활동해 오기도 했다.
그런 그가 서예박물관을 염두에 둔 것은 자신이 서예에 전념하게 된 80년대 초반, 국내 한 원로작가의 집을 방문했을 때라고 한다.
이 원로작가는 그에게 오래 된 벼루 하나를 내보이며, “중국의 소동파가 사용하던 벼루”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서예인으로서 후학들에게 의미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석포는 이 일을 계기로 돈이 생기면 골동품점 등을 돌며 벼루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의 벼루 수집은 중국의 골동품점에까지 이어졌는데 30여년에 걸친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최고의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수 백점의 벼루를 수집할 수 있었다.
“중국의 박물관에 전시된 벼루보다도 더 상품의 벼루가 상당수 있습니다. 벼루 하나에 억대를 호가하는 벼루도 더러 있지요. 구입 당시 1천만원 이상을 투자한 벼루만도 5~60여점에 달합니다. 벼루와 함께 역대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서예작품과 주선 후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대가들의 서예작품도 수집했는데, 이러한 작품도 1천여점에 달합니다.”
석포는 자신의 소장품들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서예박물관 건립을 추진해 왔으나 아직까지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소문을 들은 강원도 평창군과 횡성군은 석포의 소장품들을 자기 지역에 유치하기 위해 치열하게 석포를 설득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횡성군의 경우 ‘강원도 박물관’ 부지 중 원하는 만큼 부지를 제공해 줄테니 자기 지역으로 오라고 제안하고 있는 실정이다.
“언젠가는 고향에 가져다 놓을 생각으로 모아놓은 것입니다.
지금 어렵다고 다른 지역의 지자체의 도움을 받아 일을 추진할 경우 그 물건들을 그 지역에서 다시 가져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돼요. 그래서 자치단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전시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경기 충청지역을 대상으로 7~8개월째 부지를 물색 중인데 아직 마땅한 부지가 없네요.”
석포는 여건이 주어진다면 자신의 고향마을이 있는 “동천 하천 섬 주변에 부지를 확보해 서예박물관과 비림박물관을 조성해 보고 싶다”고 말한다.
“비림박물관의 경우 국내 작가들 위주로 한다면 자치단체에서 자연석만 제공해 준다면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조성이 가능합니다.
충청도 보은에 한국비림도서관이 조성되어 있어 현지를 가 보았는데 형편없었어요. 제대로만 조성해 둔다면 전국적인 명소가 될 수 있고, 특히 서예는 우리의 정신문화와 맥이 닿아있기 때문에 광양에 이러한 박물관을 조성할 수 있다면 광양을 서예의 성지로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석포는 자신의 구상을 실천해 보려고 개인적으로 광양지역의 폐교 구입을 모색해 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구입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며, “광양에 거주하는 지인들을 통해 부지 구입을 계속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고향 광양에 대한 애정은 한이 없습니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이균영․정채봉 후배와 자주 만나 내가 땅을 마련할 테니 왔다 갔다 하면서 살면서 예술인촌을 조성해 보자는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는데 구상만으로 끝나고 말았네요.”
석포는 지난 90년대 사진작가인 고 이경모선생과 함께 광양군이 박물관을 건립하면 자신의 소장품을 내놓겠다는 제안을 한 바 있었다.
카메라박물관과 서예박물관을 함께 건립해 보겠다는 구상이었으나, 당시의 광양군은 지역이 배출한 특출한 문화예술인들을 배려할 만한 문화예술에 대한 마인드가 부족했다.
결국 이경모선생의 유품들은 대학 박물관에 기증되었으며, 석포의 소장품들은 그의 서실과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에 남는 문화재를 지역에 유치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 고향에 가져다 놓을 생각으로 수집을 했으니 자치단체의 지원이 없더라도 마땅한 부지만 있다면 고향에 서예박물관과 비림박물관을 조성할 생각입니다.”
한편, 최근에는 이화출판사와 법화정사가 천안의 독립기념관 인근에 서예비림박물관 기공식을 하면서 석포에게 전시공간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해오고 있다고 한다.
“언젠가는 고향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거절을 하고 있는데 여건이 여의치 않을 경우 대학 박물관에 기증하는 방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광양 출신의 원로 서예가가 일생을 두고 수집해 온 소중한 문화자원들이 광양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광양시와 의회의 관심을 기대해 본다.
(황망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