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 박물관과 출판부 측은 29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성균관대의 대표적 유물인 '근묵'을 마침내 완역했다"면서 "원첩을 그대로 촬영해 본래 필묵의 질감을 최대한 살렸으며, 난해한 초서를 알기 쉽게 우리말로 번역해 일반인들도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근묵'이란 근역(槿域), 즉 무궁화가 피는 우리나라의 묵적(墨蹟)이란 뜻으로 국왕과 왕후로부터 문무 관료와 재야 학자, 승려와 중인에 이르기까지 주로 조선시대 주요 인물들의 글씨를 모아 서첩으로 묶은 것이다. 고려 말 정몽주와 길재, 조선의 정도전, 성삼문, 이황, 이이, 정약용, 그리고 대한제국 말기의 민형식에 이르기까지 1136명의 서간과 시 등으로 이뤄졌다. 1인당 1점씩 총 1136점이 시대 순으로 나눠 담겼다. 연대로 보면 맨 처음의 정몽주가 1341년에 사망했고, 맨 뒤의 민형식이 1947년에 사망해 상하 600여 년에 걸친다. 위창이 거액의 사재를 들여 오랜 세월에 걸쳐 이들 선인의 글을 모아 1943년에 34권의 첩장본으로 완성했다. 그 뒤 위창 댁에 전해오다가 1964년 성균관대 박물관이 유족으로부터 양도받았다. 이 서첩은 조선시대 글씨의 흐름과 수준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로 꼽혀왔지만 일반인은 물론 서예 전공자들도 접근이 극히 어려웠다. 원본은 열람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고, 1981년과 1995년에 제작된 영인본도 열람이 매우 까다로웠다. 게다가 81년 영인본은 작은 판형에 흑백으로만 촬영된 데다 해상도도 떨어져 원본의 질감을 살리기는커녕 알아볼 수 없는 글씨들이 너무 많았다. 95년 본은 출판사 관계자의 잠적으로 1권만 나온 뒤 중단됐다. 이 두 가지 영인본은 청명 임창순(1914-1999)이 원본의 초서를 판독해 정자(正字)인 해서로 옮겨 적은 것('탈초' 또는 '성문'이라고 한다)이기는 하지만, 내용이 난해해 전공자들도 해석에 애를 먹었다. 이번에 한글로 번역된 '근묵'은 읽어서 바로 이해하기가 쉽다. 더욱이 첨단 기술로 원첩을 촬영한 덕분에 해상도가 매우 뛰어나 원첩을 직접 보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다. 성균관대 측은 "과거 영인본과 이번 완역본의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설명했다. 성균관대는 교육부특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지난 5년 간 6억 원 이상의 예산을 들여 영인과 번역이 겸비된 완역 작업을 벌여왔다. 하영휘 가회고문서연구소장이 번역을 완성했고, 김채식 성균관대 박물관 학예사가 교열을 봤다. 전체 글 가운데 서간이 3분의 2를 차지하는 한글 완역본은 당시 생활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출간 의미가 크다. 흥미로운 글들이 여럿 눈에 띄는데, 이를테면 정조(1752-1800)가 1792년 9월2일 친척에게 보낸 선물 목록을 보면 쌀과 밤, 게장에 특히 창덕궁에서 재배한 담배까지 등장한다. 정조는 "내원(內苑·궁궐 정원)의 담배 두 봉. 토양이 적합하고 맛이 좋아 삼등(三登·평안남도 삼등에서 나는 질 좋은 담배)에 못지않다"고 선물로 하사하는 담배 두 봉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한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아내를 잃은 지인에게 보낸 위로 편지에서 "(아내를 잃었을 때) 마음을 안정시키고 슬픔을 삭이는 데는, 종려나무 삿갓을 쓰고 오동나무 나막신을 신고 산색을 보고 강물 소리를 들으며 방랑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한번 시험해 보시지 않겠습니까"라고 권한다. 조선후기 문인 이용백(1859-?)의 편지는 개인적으로 매우 곤혹스럽고 은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풍습(風濕)으로 인해 하초의 병이 되어, 오른쪽 고환이 북처럼 커져서 겉 거죽이 감처럼 붉고 윤기가 난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한글 번역 이전에 '근묵'은 본래 걸출한 서예가들의 진작(眞作)을 집대성한 서첩으로서 '조선 서예사의 기준작'을 제시하는 교과서 역할을 해왔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간첩류(簡帖類)는 그 수가 수 천에 달하긴 하지만, 그 내용이 풍부하고 역대 주요 인물이 거의 빠짐없이 망라된 것으로는 오세창의 컬렉션에 비견할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 조선 전기의 명필로 특히 초서를 잘 써 초성(草聖)이라고까지 불렸던 황기로(1508-?)의 작품은 21세기 조형미술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살아 꿈틀거리는 듯 유려한 필세와 그윽한 깊이를 보여준다. 고향에 은거하며 여러 번 벼슬에 임명됐음에도 나아가지 않았던 황기로의 필적은 목판본 외에는 전해지는 것이 극히 드물다. '근묵'에 실린 황기로의 득의작 내용은 이렇다. "소매 속에 시권(詩券)을 넣고 형주로 올라가니/달빛과 갈대꽃이 한결같이 수심에 잠겼네./만약 광문(廣文·청빈하고 한가한 학자)을 만나면 나를 물을 것이니/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조각배에 가득하다 말하게." 이번 완역본은 모두 5권으로 구성됐다. 4권에 원첩 작품들을 그 순서 그대로 영인해 싣고 마지막 1권에 탈초와 번역문을 모았다. 총 1000질을 찍었다는데, 5권 한질 가격이 100만원이다. 성균관대 측은 "소중한 유물을 박물관 수장고에 잠재우기 보다는 국민들과 향유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판단에 따라 막대한 시간과 물력을 들여 원가 정도 수준에서 간행했다"라며 "원첩 실물과 동일한 크기 및 색감을 재현한 것이 이번 간행의 핵심이고, 번역과 주석까지 완비해 일반 대중의 요구도 만족시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근묵'을 엮은 위창 오세창은 1864년 7월15일 서울 시동(현 청계천 2가)에서 역관 오경석(1831-1879)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오경석은 중인 출신으로 역관이 돼 청나라를 왕래하며 신학문에 일찍 개명했고,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소장 정치인들을 지도해 개화파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글씨와 그림에 능했고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위창은 넉넉한 집한 형편과 고고한 학문적 분위기 속에 자라 1894년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이 됐으며, 이어 농상공부 참서관, 통신원 국장 등을 역임했다. 1906년 손병희와 함께 '만세보'를 창간해 사장에 취임했고,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을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3년간 옥고를 치렀다. 6·25 동란 중 피난지 대구에서 사망해 사회장이 거행됐다. 그는 일찍부터 서화골동의 가치를 인식해 국외로 유출되는 서화를 동분서주하며 수천 점 구입했다. 간송 전형필이 10만 석의 재산을 헐어 골동서화를 수집하는 데 위창이 감식안을 제공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위창 스스로가 막대한 사재를 투입해 민족문화의 유산을 지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는 사실은 간송의 업적에 가려져 있는 게 사실이다. 위창은 불세출의 감식안으로 한국미술사의 초석인 '근역서화징'(1928)을 저술했고, 이어 우리나라의 명화 251점을 모은 '근역화휘', 문인화가 830여 명의 도장 3930여 방을 모은 '근역인수' 등 여러 대작을 남겼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호경 기자 hkkim@kmib.co.kr |
600년 조선 서예사의 진수…‘근묵(槿墨)’ 마침내 완역
'서예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상대에 따른 낙관 방법 (0) | 2010.10.24 |
---|---|
[스크랩] 4대 명석 (0) | 2010.10.24 |
[스크랩] 서예박물관 건립 꿈키우는 석포 주계문선생 (0) | 2010.08.25 |
근묵완역-2 (0) | 2010.04.29 |
천부경 (0) | 2007.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