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 김상옥

왜 그랬을까?

함백산방 2008. 1. 7. 12:46

  왜 그랬을까         ㅡ김상옥 시인의 편지에 대한 회신 -
                                                 고 동 주


 시장 재직시 만들어진 신문 보도 스크랩북을 넘기다가 시선을 붙드는 페이지에 머물렀다. 초정 김상옥 시인과 지상(紙上)으로 오고간 논쟁조의 편지였다.  그 당시 회답했던 내용을 다시 본다.

 “통영을 자랑할 때마다 걸출한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배출된 것을 첫손가락으로 꼽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선생님을 늘 선두에 내세우곤 했습니다.

 그렇게 존경했던 선생님께서 어느 단체 초청 강의시간에 시장(市長)을 겨냥한 욕설로 시간을 다 채우셨다기에, 어떤 일로 그처럼 격노하셨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황당했습니다.


  얼마 후, 지방주간신문에다 두 번째 성토하는 글을 올리면서, 조목조목 시민이 알 수 있도록, 해답을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런 요구를 저버릴 수 없어서 부득이 이렇게 지상을 통해서 회답을 드립니다만 마음이 무겁습니다.


1) 옛날부터 지방장관으로 부임하면 그 지방의 원로를 찾아 뵙고, 정사를 의논하는 법인데, 김상옥 이가 하잘 것 없는 존재로 보이느냐고 야단을 쳤습니다.

저는 초대 민선시장으로 부임한 후, 서울에 계신 출향 인사들을  호텔로 초청하여, 인사와 아울러 앞으로의 시정방향을 보고 드리고 만찬을 겸한 자리에서 좋은 덕담들을 마음에 담았다가 시정에 반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새해를 맞을 때마다 간담회를 열고 선생님을 초청하였으나,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댁에까지 직접 가서 찾아 뵙기를 바랬는지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수백 명의 재경인사를 만나려면 서울에서만 몇 달을 체류해야 하는 무리가 있어서 실행하지 못했음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2) 정성껏 쓴 편지를 깔아뭉개고 두 달이 넘도록 답장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지난해 지방주간 신문에 특별 기고하신 글을 편지로 혼돈하신 것 같습니다.  그 글은 편지라기보다 온 시민에게 공개되는 인신공격장이 아닙니까?

미륵산 정상을 깎아 조망대를 짓고, 철주를 세워 케이블카라는 괴물을 설치하여 미륵산을 파괴하려 하는가? 라고 하면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라 했습니다.

사업내용을 알아보지도 않고, 중간에서 잘못 전달하는 말만 들은 채 흥분부터 한 것 같습니다. 

미륵산 정상을 깎아 내는 일도 없고 철주를 세우는 일도 없습니다.  조망시설은 정상에서 130m아래의 큰 바위 뒤에다 통영 연(鳶)을 겹쳐놓은 형상의 종점 승강장 한 동을 설치합니다.  중간에는 철주나 철탑이 아닌 지주 한 주만 세울 예정입니다.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멀리서 보기에는 연줄을 타고 오르내리는 듯한 명물이 될 것입니다. 이 계획은 시장 독단으로 이루려는 것이 아니고, 시민 다수의 의견을 따랐으며, 의회의 승인까지 다 거쳤습니다.

특히 이 사업은 수산업의 어려움을 보완할 수 있는 경제와 맞물린 중요한 관광사업이며, 아울러 정부에서 추진하는 남해안 관광벨트화 사업중의 거점사업입니다.  한편 무분별하게 늘어가는 수많은 산책도로로 미륵산이 황폐되어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자연보호 차원의 사업이기도 합니다.


 3) 산복도로는 세병관의 등을 친 패륜의 횡포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도로는 과거 관선시대에 계획되어 거의 완료단계인 것을 인계 받아 최종 마무리를 한 것뿐입니다.  만약 이 도로가 없었다면 지금 쯤 통영시내 교통은 얼마나 숨막히는 현상에 이르렀을 것인지, 이곳에서 직접 생활하지 않는 분은 짐작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4) 역대 시장이 고층건물은 4층을 넘지 못하게 했는데, 민선시장이 표에 혈안이 되어 그 조문을 없애고 10층, 15층 아파트를 허가해 주어 시민들을 시멘트 감옥에 갇혀 살게 했다는 지적입니다. 이 문제는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 같습니다.

지금 시내 스카이라인을 무시한 고층 건물들은 대부분 관선시대에 지어졌고 민선시대 이후에는 철저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바닷가에는 5층 이상을 못 짓도록 고도제한조례를 만들어 의회에 상정했습니다.  그 결과, 남망산 주변에만 고도가 제한되고 다른 곳은 아직 보류된 상태입니다.  지금도 고층 건물 억제를 위하여 건축주들과 잦은 시비를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5) 통영같이 좁은 도시에서는 자가용 대수를 줄이고 보행을 권장하여 맑은 공기를 유지하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의 각별하신 애향심이 담긴 권유입니다만, 공산주의도 아닌 이 땅에 시장이 무슨 수로 자가용을 줄이고 시민 모두를 걸어다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특별한 해법이 있으면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통영은 통영에 사는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낭만적인 입장은 현실과 너무 거리가 멀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6) 고동주는 지성의 표가 아니라 일반대중의 표로 민선시장이 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라 했습니다.  결국 고동주를 시장으로 뽑은 시민까지 모욕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고동주를 폄박(貶薄)한 것은 당사자만 참으면 되지만, 다수 시민을 함부로 폄(貶)한 것은 그들로부터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망언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시(詩) 분야에 대가(大家)라 해서 인생 전부가 대가인양 착각하고 계시는 것은 지나친 교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저에게 거북한 오물을 함부로 끼얹었기 때문에 이것을 대충 떨어내기 위해서도 부득이 본인이 직접 말하기 곤란한 자랑(?)같은 해명을 하게 되는 점,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해방이후 이 땅에 국어를 배운 사람 치고 선생님이 쓴 시와 산문을 통하여 교육받지 않은 자가 없는데도 이렇게 무시하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런데 부족한 저의 수필도 전국의 대학 교재로 활용되고 있지만 자랑삼아 떠들어 본 적은 없습니다.  오랜 일선 행정 경험을 통한 경륜을 갖고, 행정대학원, 연수원, 유럽8개국의 해외연수 등 이수(履修)를 통해서 신 행정에 대한 소양을 나름대로 닦았기 때문에 시장 직을 수행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기초를 바탕으로 1999년도에는 우리 시가 전국 기초단체 중에서 종합행정 실적 최우수 시로 평가받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는 등 시민에게 더 없는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 주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의 잘못된 선입견을 이해시키느라 자신도 제 자랑이나 늘어놓는 영락없는 불출이 가 되고 말았습니다. 고매(高邁)하신 선생님께서는 이쯤에서 다소 이해가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지상을 통해서 답을 보낸 후, 일단 조용해 졌지만 무슨 억하심정(抑何心精)으로 그렇게까지 했는지 그 당시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참는데 힘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다른 원로 시인으로부터 그럴듯한 해명을 듣게 되었다.


초정 선생이 젊었던 시절, 무슨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청마를 심하게 미워했던 분위기를 그 당시 곁에 있던 친구들은 누구나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쩐지 청마에 관한 행사 때마다 초청해도 참석하지 않을 뿐 더러 시가지에 걸려있는 청마 관련 플래카드를 보고도 빈정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 청마 문학관을 만들고, 청마 문학상을 제정한 시장이 얼마나 미웠겠는가.  그래서 청마 에게 쏟아야 할 화풀이를 애꿎은 시장에게 쏟아낸 것이라 풀이해 주셨다.

이해가 되면서 초정 선생의 그 긴 세월 속에 감추어진 아픔을 오히려 위로해 드리고 싶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연로하시기 전에 심기를 불편하게 한데 대해서 용서를 빌어야겠고 다짐해 보았지만 곁에 가면 상처받을 것 같은 성격 때문에 망설이다가 실천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옹졸했던 자신을 원망하고 말았다.

언젠가 한 번  섬 마을 바닷가에 모시고 가서 세월 속에 파도와 더불어 모서리가 마모되고 둥글게 다듬어진 몽돌 밭으로 가보고 싶었던 희망까지 꺼지고 말았다.

거기서 둘이 손잡고 서서 몽돌들의 이야기도 듣고,  넓은 바다를 가슴에 한아름 안아 보고 싶었는데----.

초정 김상옥 시인은 독학으로 대성하신 천재에 가까운 분이시다.  


정서가 짙은 현대 시조로써 한국 시(詩) 문단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점한 입지전적이고 자랑스런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강한 개성이 빚어낸 그늘이 그 높은 봉우리를 살짝 가리운 것이 후배들의  불만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런 것까지도 시인다운 멋이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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