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 김상옥

백자부의 시인 초정 김상옥 8

함백산방 2008. 1. 6. 08:08
'백자부'의 시인 초정 김상옥(8)


2007-08-27 09:30:00
 제5회 신인예술상 심사에서 시를 제외한 모든 장르의 심사위원들은 심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유독 시부문에서만 아직 결선에서 당선작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조부문 심사를 마치고 나오던 초정은 "여기는 뭐하는거요? 결정을 못하면 내가 하죠"하고 R의 작품과 필자의 작품을 한 눈으로 읽어내렸다. 초정은 "작품의 수준이 격차가 있네. 강희근의 '연기 및 일기'가 뛰어나요. 나 이것 안 뽑으면 나가서 소문낸다. 알았어요?"하고는 휑하니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미당은 그제서야 "R이 K군의 선배라서…"하고 얼버무렸지만 R의 작품을 뽑아 든 이유는 또 그 뒤에 밝혀졌다. R은 그해 서울의 모 신문의 신춘문예에서 ‘밀림의……’라는 작품으로 당선되었고, 그것이 표절 시비에 휩싸였는데 그런 전력과 관련이 있었다. 어쨌든 필자의 작품은 당당히 시부문 수석상이 되었고 R의 작품은 차석상이 되었다. 5개 장르의 통합 특상을 뽑는 종합 심사위원회가 그날 오후에 있었는데 만장일치로 필자의 ‘연기 및 일기’가 뽑혔다. 조연현이 필자를 밀고 김현승이 설명하고 서정주가 거들고 초정이 보장했다. 소설 심사위원이었던 김동리는 별 말이 없고, 다만 최정희가 "이게 무슨 소리요, 도통 알 수 없어요. 조금 더 설명을 해 주세요"하고 말하자, 김현승이 시가 갖고 있는 감각과 전위성에 대해 말해 주었다는 것이다.

 1966년 6월 11일 명동에 있는 국립극장에서 신인예술상 시상식이 있었는데 홍종철 문공부장관이 자리한 가운데 8개 분야 최고 수상자들에게 시상하는 시상식이 있었다. 필자가 받은 상장에는 오자(誤字)가 하나 있었다. 수상작 제목이 ‘연기 및 일기’인데 ‘연기와 일기’로 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문공부가 이렇게 허무한가, 투덜거리며 시상식 다음 연이어 있었던 최고 수상작 발표때 낭송을 하면서 분명히 '연기, 및, 일기' 이렇게 읽어나갔다.
 
 부드런 내의(內衣) 속에
 꿰맨 내의의 벌룸한 구멍 속에
 갖다 놓을 기쁨의
 내 힘대로의 기쁨의
 내음새
 
 풀어놓은 물감에 떠밀린 발치의 소리
 소리의 서너겹 언저리
 스콜이라도 남국의,
 일년수(一年樹) 겨드랑이에 부딪는 스콜의
 촉수(觸手)
 
 전체 6장 가운데 1장 대목이다.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나 자유분방한 '의식'같은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도 다른 사람이 전혀 쓰지 않았던 것이고 발상도 동서남북, 예고 없이 치닫는다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수상자 발표를 하고 나와서는 국립극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후배들과 시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명동의 한 술집으로 안내했다. 그 근처에서 필자를 기다리고 있던 시인 홍신선, 박제천 등이 저쪽 카페에 서정주, 김동리, 조연현, 최정희 선생 등이 계시므로 인사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가서 인사를 드렸는데 초정은 보이지 않았다. 김현승 시인도 보이지 않았다.

초정이 불참한 것은 그 무렵 인사동에서 경영하던 골동품점인 '아자방(亞字房)'일이 바빴던 것이라고 이근배 시인이 귀띔해 주었다. 필자는 심사위원들이 앉아 있는 카페 카운터에 가서 상금 뭉치에서 뽑아낸 돈으로 일행의 찻값을 일괄 지불하고 나왔다. 신인이 문단의 대선배들을 위해 찻값을 내는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초정 선생에게는 좋은 기회가 올 것이야, 속으로 말하면서 후배들과 이근배, 이상범, 하덕조, 정해춘, 문영오, 정대훈, 박제천, 홍신선, 문정희, 정의홍, 송유하, 선원빈, 안양자, 정지하, 홍희표, 신상성,이국자 등이 기다리는 명동의 한 돌아앉은 술집으로 향했다. 이때 문효치(펜 이사장)는 ROTC 하사(연좌제로 장교 탈락한 계급)로, 조정래, 임웅수, 유근택은 졸병으로 전방 입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