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 김상옥

초정 김상옥과 삼천포 중학교

함백산방 2008. 1. 6. 07:58


기자가 초정 김상옥의 문학 현장을 찾아 삼천포를 찾아간다고 하니, 어느 문인이 “초정은 통영사람이니 당연히 통영으로 가야지 왜 삼천포냐”고 의아해 했다. 초정은 통영사람이지만 해방후 삼천포에 잠시 머물면서 박재삼 시인을 가르치는 등 당시 진주 개천예술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이형기 시인을 장원으로 뽑는 등 우리 문단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삼천포로 가기로 했다.
초정이 삼천포를 찾은 것은 1940년대 초기였다. 일제의 내선일체라는 허울좋은 구호아래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을 송두리째 말살해 버렸고, 우리 전통문화는 한동안 고사상태에 빠지고 우리 문학도 상당기간 잠적해 버렸던 암흑같은 시기에 초정은 삼천포를 찾은 것이다. 1920년 통영에서 태어난 초정 김상옥은 1939년 당시 문예지인 ‘문장’에 시조 ‘봉선화 ’로 추천을 받았고, 이듬해 동아일보의 신춘문예에 ‘낙엽’이 추천되어 시조시인이 되었으며, 당시 사상범으로 수감되기도 했다.
초정이 삼천포를 찾은 것은, 사상범으로 일경에 쫓기는 급박한 상태에서 몸을 숨기기 위해 온 것이라고 전해진다. 초정은 삼천포에 숨어살면서 낮에는 도장방에서 도장파는 일을 하고, 밤에는 길거리에서 행상을 하는 등 철저히 신분을 위장하고 지내면서도 문학수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최송량 시인은 “초정이 당시 도장방을 경영하던 곳이 선구동 41번지 대도양품 자리입니다. 초정이 삼천포로 오기 전에는 우보 박남조라는 시인이 혼자서 삼천포 문학의 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뒷날 삼천포에서 박재삼을 키운 초정 역시 삼천포 문단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습니다”라며 초정이 도장방 경영하던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초정은 광복이 되자 삼천포 문화동지회를 결성하고 농어촌 계몽대를 조직해 문화운동의 일환인 한글보급운동과 농어민 계몽운동을 실시하면서 아동신문인 ‘참새’라는 타블로이드판 어린이 신문을 사재를 들여 만들어 배포하는 등 삼천포 지역의 한글보급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면서 문화운동을 펼쳤다.
초정이 삼천포에서 문학활동을 한 기간 중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가 1946년 11월 15일 삼천포중고등학교의 국어교사가 되어 후진을 양성할 때이다.
박재삼 시인과의 만남도 이때 이루어졌다. 박재삼 시인은 “1946년 삼천포초등학교 졸업 후, 3천 원이 없어 삼천포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삼천포여자중학교에 사환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삼천포여자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김상옥 선생을 만나 감화를 받고 시를 쓸 결심을 굳혔다”고 말했다.
최송량시인은 “삼천포중학교 교가를 초정 선생이 작사를 했습니다. 당시 대한통운에 윤이상이 재직하고 있었는데, 윤이상이 그 가사에 곡을 붙였습니다. 아마 같은 고향사람으로 두 분의 친분으로 인해 삼천포중학교 교가가 우리나라의 대표적 시조시인과 음악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해방후 약 10년간 삼천포에서 머문 초정 김상옥은 삼천포 문화에 많은 공헌을 했다. 삼천포가 자랑하는 서정시인 박재삼이 그의 제자라는 점만 들어도 초정은 삼천포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하지만‘출생 연고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나라 정서상 삼천포에서 초정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 것같다. 기자는 삼천포 중학교를 찾아 한 학생에게 초정 김상옥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학생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사진설명]초정 김상옥이 재직했으며 교가를 작사하기도 했던 삼천포중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