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예체험기>
心正書正을 되새기며
김 영 배
옛 사람들은 세월의 흐름을 물에 빗대어 유수流水와 같다고 하였다. 물은 말없이 쉬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하고 순응하면서 주야로 흘러가기에 송대의 주자는 공부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촌음을 흐르는 물같이 생각하면서 아껴서 사용하라”는 가르침을 남겼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시간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주어지고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로 시점으로 쏜살같이 이동하고 있다.
필자 또한 벌써 ‘불혹’의 나이가 되었기에 한 순간마다 세월의 흐름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실감하고 있다. 오늘의 이 순간이 있기까지 지나온 세월을 반추해 보면, 경북 문경 조그만 마을의 하늘만 보이는 시골에서 자라면서 붓을 처음 대하던 때가 주마등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특별활동시간에 붓을 처음 손에 쥐게 된 것이, 지금에 와서 내 삶의 모든 것이 되었으니, 참으로 사람마다 갈 길은 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30년 전 초등학교 시절의 고사리 같은 손으로 습자지 몇 장과 작은 붓으로 글씨를 연습한 것이 지금 서예를 연마하게 된 계기가 될 줄이야 나 자신도 몰랐다. 그 시절 글씨에 입문하도록 지도해 주신 선생님의 성함도 모르고 지금까지 지내왔으니 참으로 죄송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그때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글씨를 쓸 때는 ‘마음과 자세’를 바르게 하라고 지적하셨다. 그 분의 모습이나 성함은 생각나지 않아도 지금도 붓을 잡을 때마다 “서예를 하면 정신을 맑게 가다듬을 수 있고, 마음이 바르면 글씨도 바르게 된다”는 말씀을 한 순간도 잊어버린 적이 없다. 간혹 개구쟁이 시절 정신 차리지 않고 글씨를 쓰는 순간 선생님께서는 채찍으로 머리를 내리쳤는데 그 순간 아팠던 기억은 지금 뇌리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후 고교시절 갑자기 붓을 잡고 싶은 충동이 일순간 일어났다. 당시 김천에서 자취를 하면서 일중一中선생님의 『한글교본』을 책방에서 어렵게 구하여 학과시간 외의 여가시간을 이용하여 나름대로 임서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는 스승 없이도 붓을 잡으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고 혼자서 빠져들었고, 고교 3학년이 되자 입시공부는 등한시하고 하루에도 몇 시간씩 붓글씨 쓰기에 몰입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국립상주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서예동아리에 입회하였고, 정녕 나의 서예인생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서예반 김기탁 지도교수님께서 강조하시던 서예의 예술성에 대한 가르침은 지금껏 붓글씨에 재미를 느꼈던 차원에서 한 차원 높게 서예를 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 1학년 때 방학을 이용하여 서울 영등포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많은 자료와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운집해 있는 서울에서 서예공부를 해야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곧 현실적인 여건과 어려움보다 내가 좋아하는 서예공부를 할 수 있다는 갈망으로 바뀌고, 드디어 행동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래서 글씨공부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상경이라는 모험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1984년이 저물어 가는 12월에 상경하여 현재 성균관대에 계시는 전광진교수의 소개로 인사동 네거리에 있는 동일빌딩을 찾아 초정艸亭 권창륜權昌倫선생님을 처음으로 뵙게 되었다.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듯 그 순간 모든 것을 얻은 듯 기뻤다.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초정선생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고, 군복무를 무사히 마친 뒤에도 계속해서 공부를 하였는데 현실의 벽은 만만치 않았다. 우선 먹고사는 경제적 문제에 휩싸이게 되었다. 잠시 서예공부는 접어두고, 고향에 내려와 공무원시험 공부를 해서 공무원을 하면서 글씨를 쓰기로 하였으나 노력부족으로 시간만 흐르고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시 서울로 상경하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대학 때 서예를 지도해 주신 교수님 댁을 찾았다. 그 때 교수님께서는 일시적인 고생을 각오하고 상경하면 뜻대로 잘 풀려나갈 것이라고 격려해 주셨다. 이에 용기를 얻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서울에서 십 년 동안 공부하기로 혼자 다짐하고 경부선에 몸을 맡겼다.
1986년 12월에 상경하여 1월 3일 인사동에 계신 초정선생님을 다시 찾아뵙고 인사드리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러나 그토록 갈망하던 서예를 하게 되었다는 기쁨에 기분은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당장 그 날부터 숙식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하지만 기왕 시작하기로 결정하였으니 열심히 해 보자는 생각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만 하였다. 그 후 이모 집에 얹혀 살면서 한동안 경제에 대한 것은 잊고 공부만 하였으나, 매일 같이 눈치 보기란 정말 스스로를 힘들게 하였다.
그 후 직업소개소를 전전긍긍하면서 직업을 찾으며 나에게 기회가 오기를 고대했지만 끝내 기회는 오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 설날이 다가왔지만 고향을 찾을 형편이 못되어 바람이라도 쏘일 겸 인사동 거리의 필방가게를 기웃거리다 나의 어려운 형편을 이해하신 사장님을 만나 주경야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얻게 되었다. 누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고 하였던가. 서울생활 속에 가장 어려운 숙식문제가 우연히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그 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서예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 후 나의 서예공부가 점점 눈에 띄게 향상向上되고 있다는 스승의 격려에 일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의지할 곳 없는 시골청년에게 아낌없이 공부하도록 경제적 환경을 마련해 주고 격려해 주신 모든 분들의 후의는 지금도 가슴속 깊이 새겨두고 있다. 그 후 나의 인생에서 다시 또 한번 중요한 매듭이 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서울에 와서 공부한지 몇 년만인, 1989년 11월 16일, 여러 가지로 부족한 내가 우연히 서실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 동안 스승의 가르침만 받던 내가 이제는 선생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으니 참으로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남을 가르쳐 보니까 내가 가진 실력이 얕아서 점점 불안해 짐을 느꼈다. 그야말로 나는 그 때부터 나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 배우고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옛 어른의 말씀대로 “예술은 끝이 없는 공부”라고 했으니 내 인생의 서예 공부는 종점이 없는 마라톤이라고 자각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더욱 부지런히 공부를 하였다. 교학상장의 정신으로 다습多習, 다독多讀, 다견多見 하면서 남보다 나은 글씨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또한 배우러 오는 후학들의 좋은 스승이 되기 위해서 촌음寸陰을 아껴야만 하였다. 지금도 나의 부족한 천질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연습밖에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인생노정에서 가르침을 줄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후 나는 더 넓은 안목을 갖추기 위해서는 대학원에서 심도 있게 이론을 접해야 한다는 판단이 들어 경기대학교 전통예술대학원에 입학하였다. 석사과정을 통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되겠다는 좌표를 설정할 수 있었고, 이 시간들은 또 한번 나를 탈바꿈시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승 한 분만 모시고 공부해 오던 나는 대학원에서 여러분의 교수님, 동료 학생들과의 토론 속에서 지금까지 나 혼자만의 생각이 다시 바뀌고, 공부하는 방법도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나의 개인생각이지만, 다음세대가 지향해야할 서예인들의 공부방향은 도제식 교육과 학교교육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취해 서로 조화를 이루면 좀 더 이상에 근접한 길이 아닐까 한다. 거기에 각 자 나름대로의 내적공부內的工夫와 폭넓은 서예밖의 공부[外的工夫]를 병행해 나갈 때 좋은 창작품이 나온다고 확신한다.
돌이켜 보건대, 문경 두메 산골 출신인 나는 오늘이 있기까지 나의 길을 인도하고 앞길을 열어주시고 아낌없는 지도를 해주신 고마운 분들을 평생 잊을 수 없다. 생전 처음 서예의 길에 들어서게 해주신 김기탁교수님, 대한민국의 내로라 하는 학자로서 까막눈을 면하게 하기 위해 한문을 지도 해주신 전광진박사님, 한국서예의 발전에 한 매듭을 지어주실 초정 권창륜선생님, 그 외 많은 분들의 고마운 은혜에 항상 예를 갖춘 보답도 못하고 있으니 늘 송구한 마음뿐이다. 지금도 나의 글씨는 과욕만 앞서는지 제자리에 맴돌고 있는 것 같아서 여러 선생님들을 뵙기가 부끄럽고 불안한 마음으로 붓끝에 온 정신을 모을 뿐이다.
옛부터 글씨 공부는 넓고도 넓은 광활한 바다와 같아서 학해學海, 묵해墨海라고 일렀다. 이렇게 넓은 예술의 바다를 항해하려면 항상 법첩을 연구하고 임서하면서 붓끝에 온힘을 기울이는 것이 정도正道라 하겠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하고도 안되면 대를 이어서 하더라도 항상 서두르지 않고 초심初心을 단단히 하라”는 초정 선생님의 한결같은 말씀을 되새기며, 오늘도 묵향墨香속에서 먹을 갈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글쓴이 청운靑 耘 김영배金 榮 培씨는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동아미술대전 특선 및 입선 6회
*경기대 전통예술대학원 서예전공 석사 및 경기대 강사
*한국서예청년작가 초대작가
*경북, 경기, 경인미술대전 운영 및 초대작가이며,
현재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원미1동 54-25에서
청운서실(032-656-9636, 011-9751-9636)을 주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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