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 김상옥

김상옥 선생의 백자부 비화

함백산방 2008. 1. 10. 12:37
金相沃 선생의「白瓷賦」秘話
 
왜 둘째 聯은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빠졌을까?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위원·조갑제닷컴 대표 (mongol@chosun.com
 白瓷賦(백자부)
 
  찬 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附椽) 끝에 풍경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 틈에 불로초(不老草) 돋아나고
  채운(彩雲)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드노다.
 
  불 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하도다.
 
  우리 문학사에 남을 이 시조는 수년 전에 他界(타계)한 艸丁 金相沃(초정 김상옥) 선생의 작품이다. 오늘 아침 金선생의 딸, 사위 되는 金薰庭(김훈정), 金聲翊(김성익)씨가 부쳐 온 책을 읽다가 「白瓷賦」와 만났다.
 
  「불과 얼음의 시혼―초정 김상옥의 문학세계」(태학사 刊)는 장경렬(서울大 인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씨가 편집한 평론집이다. 22명의 시인·교수들이 썼다.
 
  장경렬 교수의 머리말에서 「白瓷賦」가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릴 때 둘째 聯(연)이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생들은 이 名作(명작)을 온전히 읽지 못한 셈이다.
 
  <드높은 부연(附椽) 끝에 풍경소리 들리던 날/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국정 교과서 편수관들이 「꽃 아래 빚은 그 술」이 미성년자인 고등학생들에게 술을 권하는 것처럼 이해될까 하여 빼버렸다는 것이다. 위선적 도덕론의 극치라 할까, 여하튼 기막힌 검열인데, 이 뛰어난 작품을 난도질한 셈이 되어 버렸다.
 
  生前에 金相沃 선생은 아마 자신의 영혼을 부어 만든 白瓷 같은 이 완벽한 작품이 토막 난 채 실린 것을 보고는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간 것처럼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이 둘째 聯에 대해서 장경렬 교수는 이렇게 해설한다.
 
  <「꽃 아래 빚은 그 술」은 아마도 귀하고도 귀한 술일 것입니다. 시인은 마음 속으로 이 술이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그에게 권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상상합니다. 그것도 「불 속에 구워」냈지만 「얼음같이 하얀 살결」을 지닌 순결하면서도 「순박」한 「백자」에 담아서 말입니다. (中略)
 
  바로 이런 느낌을 아무리 나이 어린 고등학교 학생일지라도 그때의 저에게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둘째 首(수)를 뺀 채 이 시를 교과서에 수록했던 것은 크나큰 잘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장경렬 교수는 『그에게 詩는 곧 도자기였고 도자기는 곧 詩였다』면서, 『詩는 언어로 빚은 도자기요, 도자기는 흙으로 빚은 詩일 수 있다』는 金相沃 선생의 말을 인용했다. 장경렬 교수는 이어서 『불같이 뜨겁고 열정적인 마음과, 얼음같이 맑고 정갈한 눈길이 함께 조화를 이뤄 창조해 낸 세계가 바로 艸丁의 詩 세계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책 제목을 「불과 얼음의 시혼」이라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金相沃 선생의 詩와 산문을 읽으면 이 분이 한국어를 白瓷처럼 다듬어 간 분이란 느낌이 온다. 한국어(漢字語와 한글語)가 한글의 공용화에 의해 온전하게 기능한 지는 100년 남짓하다. 金相沃 선생은 한자어의 깊은 뜻과 한글의 감수성을 아우르고 주무르고 이리저리 휘저으면서 아름답고도 品格(품격) 높은 언어를 빚어 냈다. 우리가 「白瓷賦」와 같은 위대한 한국어 문학작품을 갖게 된 것은 金선생과 같은 소수의 천재가 밤낮 없이 말을 갈고 닦은 덕분이다.
 
  언어의 품격이 인간과 나라의 품격이고, 예술언어로 빚어 낸 정신이 국가와 민족의 魂(혼)이다. 요사이 난무하는 저질 언어의 홍수 속에서 金선생의 말과 글은 등대처럼 빛난다. 金선생이 이룩한 한국어의 발전이 그 뒤 중단 또는 후퇴 상태인 것은 한글전용에 의해 한국어가 반신불수 상태로 암호화된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
 
  국가의 품격을 지켜 가는 것은 민족혼일 터인데 言(말)이 미쳐 날뛰는 세상에서 어떻게 제 정신을 차릴 것인가? 한 가지 처방은 艸丁 金相沃 선생의 詩를 많이 읽음으로써 머릿속과 마음을 淨化(정화)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