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 김상옥

시인 김상옥과 통영

함백산방 2008. 1. 7. 09:51
시인 김상옥과 통영

詩 '석류꽃' 그 집엔 석류나무만 남아...

옥적(玉笛)

지그시 눈을 감고 입술을 축이시며.
뚫린 구멍마다 임의 손이 움직일 때.
그 소리 은하(銀河) 흐르듯 서라벌에 퍼지다.

끝없이 맑은 소리 천 년을 머금은 채.
따스히 서린 입김 상기도 남았거니.
차라리 외로울망정 뜻을 달리 하리요!

-김상옥 시인의 대표시

초정의 가슴에는 언제나 고향 통영과 충무공 사랑, 그리고 뜨거운 민족혼이 가득차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절제된 시어로 민족고유의 예술미와 전통적 서정을 노래한 시조시인 艸丁 金相沃(1920∼2004)에 대해 오랜 교류를 해온 부산의 김재승(해양대 겸임교수)씨는 이같이 말한다.
실제로 충무공사랑이나 민족애는 초정이 천부적인 `언어의 마술사'로 남긴 600여편의 시(시조·시·동시 등)와 서화·전각 등에서 보여준 뛰어난 작품의 밑바탕에 녹아있는 그의 정신적 원천이기도 하다.
충무공의 얼이 서려 있는 통제영과 문학적 소양을 키워준 통영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 당시 주변의 뛰어난 많은 사람들…. 그가 태어나 자라면서 자연스레 영향을 받은 것이다. 
초정이 지난 2004년 10월31일 향년 85세로 타계할 때까지 그의 삶을 관통하는 중심에는 통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초정과 통영= “완전 상전벽해네요.” 지난 6일 시인 김보한씨의 안내로 그의 생가가 있던 항남동 64에 도착했을 때 저절로 쏟아져 나온 말이다. 초정이 아버지 기호 김덕홍과 어머니 진수아의 1남6녀 중 막내로 태어나 22세 때인 1943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삼천포로 탈출하기 전까지 살았다는 이곳의 모습을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당시 바닷가 근처의 조그마한 집이라던 그의 생가는 온데간데 없고 항남동 일대는 오래전 매립과 함께 옷·화장품·식당 등 각종 가게들이 줄지어 영업을 하는 통영의 번화가로 변해 있었다. 그가 살았던 집터에는 10평 남짓한 옷가게가 서 있었다.

당시 초정은 이 집에서 살면서 바다를 벗삼아 놀곤했다고 한다. 6세 때부터는 서당을 다니면서 천자문, 소학을 배웠는데 배운 것은 거의 다 암기할 정도의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초정이 유일하게 정규교육을 받았다는 통영보통학교의 자리는 생가로부터 10분 거리에 있었다. 여황산 기슭인 문화동에 있던 통영보통학교는 현재 딴 곳으로 옮기고 건물들도 철거된 상태였다. 통제영 영지사업에 따라 한창 공사가 진행되면서 교문만이 학교의 흔적을 알려줄 뿐이었다.

김보한 시인은 “초청은 7살에 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시기 그는 평생친구로 지낸 음악가 윤이상은 한 학년 위, 시인 김춘수는 두 학년 아래로 같은 학교를 다녔다”면서 “이 때부터 그의 천부적인 재능이 표출된다”고 말했다.

초정은 보통학교에 다니면서 시와 그림에 두각을 나타내지만 그림은 3학년 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포기하고 시에만 전력한다. 특히 4학년 무렵 이 학교에서는 교지가 발행됐는데 이 교지의 가장 우수한 작품을 싣는 난에는 으레 그의 동요가 실리는 등 시인으로서 자질을 보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1933년(14세)부터 1935년까지 향리의 약방에서, 인쇄소에서 노동으로 혹은 문선공 등으로 보내면서 인생, 예술, 문학 등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식견을 쌓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동인지 `참새'의 창간동인이었던 진산 이찬근(시·서예), 완산 김지옥(그림 글씨 전각), 노제 장춘식(연극 영화 등) 등과의 교류 덕택이었다.

광복 후 초정이 통영에서 살았던 문화동 260번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초정이 살았던 집은 다른 사람이 신축해 오래 전부터 살고 있는데 그의 동시집 `석류꽃'에 나오는 크게 자란 석류나무만이 그의 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줬다.

“초청의 가족이 49년부터 57년 부산으로 가기 전까지 이곳에 살았습니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까지는 복잡한 시대적 상황이 작용했습니다.”

초정은 17세 때(1936년)에 `芽(아)'라는 동인지에 `무궁화'라는 시를 발표하는데 이 작품으로 일본경찰과의 악연이 시작된다. 이 작품으로 감시대상이 돼 1937년(18세)에 첫 체포됐다가 풀려난 후 일경을 피해 넷째누나가 있던 함북을 전전하다가 40년(21세)에 통영으로 귀향, 서점을 경영하다가 우국시로 인해 두 번째로 체포된다. 다시 43년에 세번째 체포된 후 가족들이 모두 삼천포로 이사갔다가 49년 통영중 교사가 되면서 다시 오게 된다. 당시 여황산 기슭에 있던 그의 집 주변에는 박경리, 김춘수, 전혁림, 윤이상 등이 살고 있었다. 또 52∼53년에는 화가 이중섭이 자주 드나들면서 교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정과 충무공= 통영 남망산 정상에 세워진 충무공 시비를 찾아 갔다. 지난 54년 초정이 이 시비를 건립했기 때문이다 . 애초에 이 시비는 어느 독지가가 건립비용을 희사하기로 약속하고 초청이 주관해서 시작한 사업이었는데, 그 독지가가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결국 초정이 책임을 져야만 했다고 한다. 이 시비의 전면 비문, 충무공 시(한산섬 달 밝은 밤에)는 초정이 글씨를 쓴 것이며 후면의 취지문은 초정이 지은 것이다.  특히 건립 취지문은 명문으로 노산 이은상은 “한 민족의 윤리를 일컬어 진실로 한 종교의 교리와 다를 바 없다면 충무공은 곧 진리를 창조하신 교주일 것이다”라는 구절을 두고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도 없는 말이라고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이 비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초정의 이순신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원한 강사= 광복 후 그림도 그려서 팔고 길가에 앉아 도장도 새겨서 파는 등 생계를 위해 온갖 일을 하다가 그에게 찾아온 것이 학교선생. 당시 국어선생이 부족해 교사자격증이 없었지만 시인으로 잘 알려져 초빙됐다. 물론 자격증을 취득하려고 했으면 가능했지만 이미 `봉선화' `백자부' 등 그의 시들이 교과서에 실리는 등 자신의 능력이 입증됐다는 자부심 때문에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게 주변인들의 증언이다.

교사자격증이 없는 강사로서 46∼49년 삼천포를 시작으로 49∼54년 통영, 54∼56년 마산, 57∼62년 부산 등지로 돌다가 63년 서울로 올라가 골동품상인 아자방을 운영하면서 이 지역과는 멀어지게 된다.

삼천포중 재직 당시 만난 제자 박재삼, 마산고 시절의 김병총, 이제하, 윤재근 등은 그로부터 수업을 들으면서 문학인으로 성장하는데 큰 영향을 받았다.

초정의 삶.문학= 이호우와 함께 1950년대의 한국 현대시조계를 대표하는 시조시인. 전통시조에 현대적 감각을 도입해 시조의 차원을 한단계 끌어올림으로써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39년 ‘문장’에 시조 ‘봉선화’가 이병기의 추천으로 실리고. 이어 194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엽’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한다. 처음 시조로 출발했지만 광복 후에는 시조뿐만아니라 자유시도 많이 발표했는데 남긴 작품은 모두 600여 편. ‘백자부’나 ‘청자부’ 같은 초기작품에선 문화재 등을 소재로 민족 고유의 예술미와 전통적 서정를 노래했지만 점차 생명의식을 포착하여 영롱하고 섬세한 언어감각으로 표현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시집으로 ‘초적’ ‘고원의 곡’ ‘이단의 시’ ‘의상’ ‘목석의 노래’ ‘묵을 갈다가’ ‘느티나무의 말’ ‘향기 남은 가을’. 동시집으로 ‘석류꽃’ ‘꽃 속에 묻힌 집’ 등이 있으며. 제1회 중앙시조대상. 제1회 노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글=이명용기자 mylee@knnews.co.kr 사진=성민건인턴기자


• 입력 : 2006년 9월 18일 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