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상옥과 통영 | |
詩 '석류꽃' 그 집엔 석류나무만 남아... 옥적(玉笛) -김상옥 시인의 대표시 “초정의 가슴에는 언제나 고향 통영과 충무공 사랑, 그리고 뜨거운 민족혼이 가득차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초정과 통영= “완전 상전벽해네요.” 지난 6일 시인 김보한씨의 안내로 그의 생가가 있던 항남동 64에 도착했을 때 저절로 쏟아져 나온 말이다. 초정이 아버지 기호 김덕홍과 어머니 진수아의 1남6녀 중 막내로 태어나 22세 때인 1943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삼천포로 탈출하기 전까지 살았다는 이곳의 모습을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당시 바닷가 근처의 조그마한 집이라던 그의 생가는 온데간데 없고 항남동 일대는 오래전 매립과 함께 옷·화장품·식당 등 각종 가게들이 줄지어 영업을 하는 통영의 번화가로 변해 있었다. 그가 살았던 집터에는 10평 남짓한 옷가게가 서 있었다. 당시 초정은 이 집에서 살면서 바다를 벗삼아 놀곤했다고 한다. 6세 때부터는 서당을 다니면서 천자문, 소학을 배웠는데 배운 것은 거의 다 암기할 정도의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초정이 유일하게 정규교육을 받았다는 통영보통학교의 자리는 생가로부터 10분 거리에 있었다. 여황산 기슭인 문화동에 있던 통영보통학교는 현재 딴 곳으로 옮기고 건물들도 철거된 상태였다. 통제영 영지사업에 따라 한창 공사가 진행되면서 교문만이 학교의 흔적을 알려줄 뿐이었다. 김보한 시인은 “초청은 7살에 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시기 그는 평생친구로 지낸 음악가 윤이상은 한 학년 위, 시인 김춘수는 두 학년 아래로 같은 학교를 다녔다”면서 “이 때부터 그의 천부적인 재능이 표출된다”고 말했다. 초정은 보통학교에 다니면서 시와 그림에 두각을 나타내지만 그림은 3학년 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포기하고 시에만 전력한다. 특히 4학년 무렵 이 학교에서는 교지가 발행됐는데 이 교지의 가장 우수한 작품을 싣는 난에는 으레 그의 동요가 실리는 등 시인으로서 자질을 보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1933년(14세)부터 1935년까지 향리의 약방에서, 인쇄소에서 노동으로 혹은 문선공 등으로 보내면서 인생, 예술, 문학 등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식견을 쌓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동인지 `참새'의 창간동인이었던 진산 이찬근(시·서예), 완산 김지옥(그림 글씨 전각), 노제 장춘식(연극 영화 등) 등과의 교류 덕택이었다. 광복 후 초정이 통영에서 살았던 문화동 260번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초정이 살았던 집은 다른 사람이 신축해 오래 전부터 살고 있는데 그의 동시집 `석류꽃'에 나오는 크게 자란 석류나무만이 그의 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줬다. “초청의 가족이 49년부터 57년 부산으로 가기 전까지 이곳에 살았습니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까지는 복잡한 시대적 상황이 작용했습니다.” 초정은 17세 때(1936년)에 `芽(아)'라는 동인지에 `무궁화'라는 시를 발표하는데 이 작품으로 일본경찰과의 악연이 시작된다. 이 작품으로 감시대상이 돼 1937년(18세)에 첫 체포됐다가 풀려난 후 일경을 피해 넷째누나가 있던 함북을 전전하다가 40년(21세)에 통영으로 귀향, 서점을 경영하다가 우국시로 인해 두 번째로 체포된다. 다시 43년에 세번째 체포된 후 가족들이 모두 삼천포로 이사갔다가 49년 통영중 교사가 되면서 다시 오게 된다. 당시 여황산 기슭에 있던 그의 집 주변에는 박경리, 김춘수, 전혁림, 윤이상 등이 살고 있었다. 또 52∼53년에는 화가 이중섭이 자주 드나들면서 교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정과 충무공= 통영 남망산 정상에 세워진 충무공 시비를 찾아 갔다. 지난 54년 초정이 이 시비를 건립했기 때문이다 . 애초에 이 시비는 어느 독지가가 건립비용을 희사하기로 약속하고 초청이 주관해서 시작한 사업이었는데, 그 독지가가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결국 초정이 책임을 져야만 했다고 한다. 이 시비의 전면 비문, 충무공 시(한산섬 달 밝은 밤에)는 초정이 글씨를 쓴 것이며 후면의 취지문은 초정이 지은 것이다. 특히 건립 취지문은 명문으로 노산 이은상은 “한 민족의 윤리를 일컬어 진실로 한 종교의 교리와 다를 바 없다면 충무공은 곧 진리를 창조하신 교주일 것이다”라는 구절을 두고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도 없는 말이라고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이 비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초정의 이순신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원한 강사= 광복 후 그림도 그려서 팔고 길가에 앉아 도장도 새겨서 파는 등 생계를 위해 온갖 일을 하다가 그에게 찾아온 것이 학교선생. 당시 국어선생이 부족해 교사자격증이 없었지만 시인으로 잘 알려져 초빙됐다. 물론 자격증을 취득하려고 했으면 가능했지만 이미 `봉선화' `백자부' 등 그의 시들이 교과서에 실리는 등 자신의 능력이 입증됐다는 자부심 때문에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게 주변인들의 증언이다. 교사자격증이 없는 강사로서 46∼49년 삼천포를 시작으로 49∼54년 통영, 54∼56년 마산, 57∼62년 부산 등지로 돌다가 63년 서울로 올라가 골동품상인 아자방을 운영하면서 이 지역과는 멀어지게 된다. 삼천포중 재직 당시 만난 제자 박재삼, 마산고 시절의 김병총, 이제하, 윤재근 등은 그로부터 수업을 들으면서 문학인으로 성장하는데 큰 영향을 받았다. ◆초정의 삶.문학= 이호우와 함께 1950년대의 한국 현대시조계를 대표하는 시조시인. 전통시조에 현대적 감각을 도입해 시조의 차원을 한단계 끌어올림으로써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입력 : 2006년 9월 18일 월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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