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아리랑

정선아리랑 가락에서 고려의 충신 전오륜 자취를 만나다

함백산방 2012. 10. 26. 19:02

정선아리랑 가락에서 고려의 충신 전오륜 자취를 만나다

 [역사속의 강원인물, 그들이 꿈꾼 삶]

◇채미헌 전오륜의 유고와 그의 행적에 관한 자료를 모아놓은 책.

시대의 격변기, 절의(節義)를 위해 세상과 연을 끊다

- 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장이 말하는 채미헌 전오륜



■고려 멸망과 두문동 72현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자신의 영달을 위해 항상 변신하여 고개를 내미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에 반해 드문 일이기는 하나 절의(節義)를 위해 세상과 연을 끊는 사람들도 있다.


1392년 7월,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신하들의 운명은 갈렸다. 새 나라 조선의 개국을 찬미하며 공신이 된 이들이 있었지만 온갖 모함 속에서도 고려 왕조를 사모하던 충신도 꽤 많았다. 시대의 격변기, 이들은 서로 다른 곳을 지향했고, 다른 길을 갔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곧은 신념 하나를 목숨보다 더 높이 받들었던 선비들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갖은 회유와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 둘씩 개성을 떠났다. 그러곤 개성 동남쪽 고갯마루에 올라 과거 임금을 조회할 때 착용하던 의관(衣冠)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평복과 삿갓으로 바꿔 썼다. 이들이 함께 죽기를 맹서하고 들어간 곳은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광덕면(光德面) 서쪽 산기슭에 위치한 두문동(杜門洞). 이때부터 두문동 괘관현(掛冠峴)이라는 말과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당시 두문동에 들어간 고려 유신에 대한 기록은 `영조실록(英祖實錄)'을 비롯해 `두문동선생실기(杜門洞先生實記)', `두문록(杜門錄)', `두문동 72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 등 많은 문헌에 전하고 있다. 고려 왕조를 위해 절개를 지킨 이는 400여 명에 이른다고 하지만 `두문동 72현'은 문헌마다 정확하지는 않다. 우현보(禹玄寶), 조의생(趙義生), 고천상(高天祥), 전귀생(田貴生), 이숭인(李崇仁), 원천석(元天錫) 등 당대 정상의 지식인들인 `두문동 72현'에 대한 구체적인 행적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훗날 영조와 정조에 의해 두문동 충신들이 `충절열사'로 복원되고, 개성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복원하는 과정에서 그만 `72현'으로 굳어졌다는 게 일반적인 학설이다.


태조 이성계는 두문동에 은거한 신하들을 회유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개성에 과거 시험장을 열어 개성의 학자들을 새 왕조 체제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러나 시험 날 과장에는 개성의 대족(大族) 50여 가문 가운데 한 사람의 유생조차도 나타나지 않았다. 조선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의미인 `부조현(不朝峴)'이라는 말도 이때 생겨났다. 그 후 조선시대 내내 개성에서는 향시와 같은 초급 시험을 제외하고 어떠한 과거 시험도 열리지 않았다.


두문동에 들어가 두문불출한 72명의 충신 대부분은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여생을 보냈다. 그들 가운데는 아예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두메산골로 숨어든 이들이 있었다.


■전오륜, 정선 서운산에 은거


전오륜(全五倫)이 정선에 은거한 때도 이 무렵이다. 전오륜은 정선(旌善)이 본관으로 자는 중지(仲至)이고 대제학 분(賁)의 아들이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우화(遇和)의 손자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그는 공민왕(恭愍王) 때에 문과에 급제해 고려의 마지막 공양왕(恭讓王) 때 정삼품인 우상시(右常侍),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형부상서(形部尙書),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등과 교분을 맺으며 학문적 깊이를 더하기도 했다.


국정이 혼미할 때 전오륜은 포은과 더불어 연명으로 탄핵하고 상소하여 정사를 바로잡고자 했다. 법이 문란하고 혼란할 때 이러한 그를 가리켜 목은은 “도(道)에 뜻함이 있다”고 극찬했다. 간성왕(析城王, 공민왕의 시호) 말에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 조준, 남은 등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충신들을 결당모란죄(結黨謀亂罪)로 몰아 파직 유배시켰는데 그 속에는 목은 이색과 전오륜도 있었다. 고려의 운이 다한 것을 안 전오륜은 만수산 두문동에 들어 망복지신(罔僕之臣)으로 절의를 지키리라 다짐했다.


얼마 후 전오륜은 정선으로 갔다. `두문동실기'에는 `全五倫隱瑞雲山'이라고 해 전오륜이 서운산에 은거했음을 말해준다. 서운산(瑞雲山)에 든 전오륜은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굶어 죽은 백이숙제(伯夷叔齊)를 흠모해 호를 채미헌(採薇軒)이라고 했다. 나무로 엮은 움막에 살면서 곧은 절의를 마음에 새겼다. 외출할 때는 항상 패랭이를 눌러쓰고 다녔다. 나라를 잃은 죄인이 어찌 해를 보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매월 삭망일이면 조복을 입고 산 정상으로 올라가서 송도 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시를 읊었다. 전오륜이 지었다고 하는 한시는 시대를 통탄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는 심정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글로 `전고대방(典故大方)'과 `경현사지(景賢祠誌)'에 전해 내려온다.


東來朝服在臣身


遙望松京淚滿巾


唐虞世遠吾安適


矯首西山繼絶塵


정선으로 가져온 관복 몸에 걸치고


송도를 바라보니 구슬프기만 하네


당나라 우나라 세상 멀어지니 내 어디 가 리요


서산을 향해 머리 들어 세상과 인연 끊었 네


■거칠현동과 정선아리랑


그가 절개를 지킨 골짜기는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居七賢洞)이다. 정선읍에서 40여 리쯤 남쪽 쇄재 너머 백이산(白夷山)과 서운산(瑞雲山) 아래에 있다. 마을에는 칠현사(七賢祠)가 있고 전오륜과 함께 이곳에서 은거했다는 김충한(沖漢) 고천우(高天祐) 이수생(李遂生) 신안(申晏) 변귀수(邊貴壽) 김위(瑋)의 이름이 새겨진 칠현비(七賢碑)가 있다. 두문동에서 피해온 일곱 명의 고려 유신을 기리기 위해 1985년 6월 정선 조양회에서 세운 비석이다.


칠현사 뒤쪽의 고려유신비에는 칠현이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이들의 시는 기울어진 천지에 남은 한 가닥 빛과 같았다. 쓸쓸한 삶 속에서 나라 잃은 슬픔과 삶의 무상함을 읊은 한시는 훗날 마을 사람들의 애조 띤 가락에 실려 어우러졌고, 사람들의 정서에 자리 잡았다. 한 맺힌 가락이 풀어지면서 주변 사람들은 다시 거기에 저항과 망향, 한탄과 체념, 사랑과 애증을 소리로 담아냈을지도 모른다.


마을 입구에 선 표석이 말해주듯 거칠현동은 어느새 `정선아리랑의 발상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구비문학의 특성상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정선아리랑 가락은 그렇게 민중 속에서 싹터왔으리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요 믿음이다. 이 때문에 거칠현동은 정선아리랑이 태동한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오늘 다시 정선아리랑이라는 이름으로 세월을 넘나들고 있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 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굴절하지 않은 시대정신 투영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는 3,000여수가 넘는 정선아리랑 노랫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가사라고 할 수 있다. `만수산'은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에 있는 산이요, `먹구름'은 왕조의 위기를 뜻한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정선아리랑이 바로 거칠현동에 머물던 채미헌과 무관하지 않음을 드러내주는 가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정선아리랑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전오륜을 비롯한 7현이 정선아리랑을 처음 불렀을 것이라는 설을 낳게 되었고, 세월이 흐르며 거칠현동은 `정선아리랑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1971년 정선아리랑이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이후에도 이따금씩 발상지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으나 칠현이 자신들의 심정을 한시로 지어 정선아리랑을 처음 불렀으리라는 두터운 믿음과 애정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정선아리랑에서는 전오륜의 자취를 만날 수 있다. 6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도도한 시대정신의 흐름 앞에서 굴절하지 않은 참모습의 정표가 노랫말에 올올이 맺혀 있다. 난세를 개탄하고 고통과 서글픔 속에 한 많은 세상을 노래한 전오륜, 게다가 거칠현동이 있어 정선아리랑의 가치가 오늘 더욱 빛난다.


/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장 프로필/


■1963년 정선군 신동읍 출생


■인하대, 인하대 대학원 졸업(비교언어학 전공)


■정선아리랑연구소장, 강원도문화재전문위원


■시문학 추천(1985), 심상 신인상(1985), 국민포장 기록관리부문(2009년)


■1985년 시 `라지브 마을의 새벽'으로 등단. `정선아리랑', `중국 조선족 아리랑 연구', `러시아 고려인 아리랑 연구', `일본 한인 아리랑 연구' 등 아리랑 연구서와 지명, 민속 등 47권의 저서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