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오세창의 제발 모음집 『타여』의 일부. 왼쪽 맨왼쪽에 ‘제이용문소집전황당인보(題李容汶所輯田黃堂印譜)’라는 제발의 제목이 보인다. 1930년대 인장애호가였던 이용문은 소장한 도장 370개를 일일이 찍어 도장책 『전황당인보』를 만들었다. 이 제발은 오세창이 그에 붙인 것이다. ② 『타여』의 표지. [박종근 기자]
근대 서화에 관한 한 최고의 감식안으로 꼽혔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 그가 편찬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은 근대 미술사 연구의 초석을 다졌다. 신라의 솔거부터 조선 후기까지 이 땅의 서화가 1117명을 집대성했다. 우리 미술문화의 보고인 간송미술관의 컬렉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1920년대 20대 초반이던 간송(澗松) 전형필은 서양화가 고희동의 소개로 40세 이상 손위인 위창을 만났다. 당시 위창은 『근역서화징』을 집필 중이었다. 간송은 위창의 열정에 감화해 곁에 불어 살다시피 하며 서화에 대한 안목을 길렀다고 한다. 그게 간송 컬렉션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이다. 일찍이 한용운은 위창에 대해 “장차 조선인의 기념비를 세울 일이 있으면 위창 선생도 일석(一石)을 점할 만하다 하노라”고 평했었다.
관련 유물들 중 관심을 끄는 건 역시 제발이다. 위창은 3·1 운동 직후 일제에 몸으로 항거하는 독립운동에서 고서화를 연구하는 문화운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제발만 수백 점을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제발은 제사(題詞)와 발문(跋文)을 줄인 말로 서화의 이력, 감상평 등을 적은 글이다.
③ 『타여』에는 오세창의 증조부가 중국 화가 여죽계로부터 선물받았다가 잃어버렸던 붓글씨를 오세창이 되찾고 기뻐하며 쓴 제발이 있다. 그 제발이 붙은 여죽계의 붓글씨 작품. [박종근 기자]
『타여』의 제작 연대는 1940년대로 추정된다. 가로·세로 13.5ⅹ18㎝ 크기다. 빛 바랜 200자 원고지 위에 붓으로 쓴 필사본이다. 위창은 왜 제발을 모아 다시 책으로 묶은 것일까. 성격이 꼼꼼했던 위창은 제발을 써주기 전에 문장을 따로 써두었다고 한다. 김 대표는 “위창이 훗날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제발을 따로 모아둔 것으로 보인다. 그가 대표작으로 여기는 제발을 별도로 추린 것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위창은 단순한 서화 연구자가 아니었다. 조선 조정의 관료이자 언론인·독립운동가였다. 3·1 운동 33인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3년간 옥고를 치렀고, 서울신문 초대 사장을 지냈다. 1946년 8·15 기념식에서 일제에 뺏겼던 대한제국 황제의 옥새를 민족대표 자격으로 미 군정으로부터 돌려받은 이도 그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역관(譯官)에 종사한 중인 계층이다. 이번에 공개된 제발 중에는 위창의 증조부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화가 여죽계(余竹溪)로부터 받은 붓글씨 대련(對聯·서로 마주보는 시문)에 쓴 것이 있다.
여죽계는 ‘한가해야만 물과 대나무, 구름과 산의 주인이 될 수 있고(閑爲水竹雲山主)/고요해야만 바람과 꽃, 눈과 달을 누릴 수 있다(靜得風華雪月權)’고 썼는데 위창 집안은 이를 잘 간직하지 못하고 한때 잃어버렸던 모양이다.
친구의 도움으로 결국 가보를 되찾은 위창은 ‘여죽계가 선조에게 써 준 대련 붓글씨에 쓴다(題新獲余竹溪觀先曾祖子銜聯側)’는 제목의 글에서 ‘칠십 노인이 우연히 집안 보물을 얻었으니 애지중지하며 어찌 감회가 없겠는가(七十殘喘偶獲靑氈舊物而摩<6332>之能無感歟)’라며 기뻐한다. 평생 예술의 가치를 옹호했던 위창의 면모가 확인된다.
이밖에 소설가 정한숙의 단편 ‘전황당인보기’의 모델이 된 책자 『전황당인보(田黃堂印譜)』에 대해 쓴 제발도 눈에 띈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중앙일보] 입력 2014.01.20 00:27 / 수정 2014.01.20 0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