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이 등단 15년 정도 되었을 무렵 ‘간단한 詩的 前歷’이라는 에세이에서 초정 김상옥에게서 시 배운 이야기와 데뷔 무렵의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 그 내용을 추려 본다.
박재삼에게는 삼천포중학 시절 초정 김상옥 시인이 선생으로 있었다. 그런데 그 시골도시 중학 선생의 시가 교과서에 실려 있는 것이 아주 대단히 생각되었고, 또 선생이 퍽 우러러 보였다. 박재삼은 교과서에 실린 ‘봉선화’와 같은 훌륭한 시를 쓰고 싶었다.
가난한 집의 아들로 시집 한 권 사본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았다. 그래서 그는 김상옥의 시조집 ‘초적草笛’을 밤새워 베껴 쓰고 또 외우기까지 했다. 중학교 때 교내지에 동요도 발표하고 시조도 발표했다. 초정의 퇴고를 거쳐 발표된 ‘해인사’는 중학 2학년 때의 작품이었다.
“가야산 으늑한 계곡 가을빛이 타고 있고 /홍류동 흐르는 물굽이마다 어린 단풍/아직도 경판經板은 남아 길을 길이 밝히다//사명당 홍제존자 弘濟尊者 수도하신 홍제암은/기왓장 푸른 이끼 고색이 새로운데/깨뜨린 碑碣비갈을 보면 마음 다시 아파라”
이 무렵 서울에서 광복 후 처음으로 ‘중학생’이란 잡지가 나오고 있었다. 거기 박재삼이 ‘원두막’이란 시를 투고했는데 이형기, 송영택의 작품과 나란히 실렸다. 그 다음 진주에서 영남예술제가 열려 그 첫해 한글시 백일장에 이형기가 장원 박재삼이 차상을 하고, 두 번째 백일장에서는 송영택이 장원을 했다. 박재삼은 이 무렵의 세 사람, 곧 이형기, 송영택, 박재삼이 무슨 인연에 닿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다. 박재삼이 당시 알게 된 사람은 이형기, 송영택 말고 최계락, 김재섭, 김동일 등이었다. 박재삼은 이 중 김재섭, 김동일과는 동인지 ‘군상(群像)’으로 휩쓸리기도 했다.
앞 회에서 말했던 것처럼 박재삼은 고등학교를 나오자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못되었다. 중학때 학비를 마련해 주었던 교장 선생이 6.25직후의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국회의원으로 있었는데 박재삼은 처지가 어렵다는 말을 하고, 그 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 분은 정헌주 국회의원이었다. 제2공화국 장면 정부때 내각사무처장을 지낸 막강한 사람이었다. 주소는 부산시 동광동 2가 8번지였고 한 때는 월간 ‘문예’(모윤숙 조연현)의 발행 장소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그 집에서 박재삼은 처음으로 평론가 조연현을 만났다. 그 때 조연현은 그 곳으로 바둑을 두러 왔었다. 그런 연줄로 박재삼은 조연현에게 시를 네댓편 내놓고 평가를 부탁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편이 ‘문예’지에 첫 추천 작품으로 발표가 되었다. 추천된 소식을 미리 알려준 사람은 시인 민영이었다. 그날 밤 박재삼은 잠이 오지 않았다.
이 때의 작품이 시조 ‘강물에서’였다. 이종학, 김세익, 최해운의 시들과 나란히 실렸다. 그런데 이 시인들은 거의 약속이나 한 듯이 시에서 떠났거나 시쓰기를 쉬고 있는 것이었다.
박재삼은 그 무렵 “당신의 시는 좀 바뀌어야 하지 않느냐?”라는 말에 대해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려 보냈다. 대답은 늘 “글쎄”였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시의 세계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고 종잡을 수 없을 때 시작 태도는 주견이 없는 것이 된다. 비평의 눈이 A다 해서 A로 해보는 것, B다 해서 B의 경향도 띄어보려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안될 짓이다.”하고 다져나갔다.
박재삼은 때로 불만을 말하곤 했다. “내 시가 변모되지 않는 데 대해서 굳이 답변을 안하고 있는 것은, 남들이 흔히 A에서 아주 다른 B로 변모하는 것을 기계적으로 바라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런 변모의 경우 박재삼과 가장 가까운 시인인 이형기가 착착 실행에 옮기고 있지 않았던가. 이형기에게 시비를 걸 수도 없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