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은 초등학교 졸업 후 동급생과 같이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신문 배달을 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하여 삼천포중학교 사환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어 야간중학에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박재삼이 야간 중학에 다니는 동안 너무 총명하여 선생들이 모두 아깝다는 생각을 하여 주간으로 편입하도록 해주었다.
그는 주간 삼천포중학에서 시조시인 감상옥을 만났다. 이로써 그는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시인의 운명을 신들린 듯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초정 김상옥의 첫 시집 ‘초적(草笛)’을 살 돈이 없어서 그 시집을 빌려다 밤새도록 노트에 베껴 적었다. 손가락이 아프고 팔목이 욱신거렸지만 행복했다.
“비오자 장독대 봉선화 반만 벌어/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김상옥의 ‘봉선화’) 이런 작품을 읽으면서 박재삼은 언어에 눈을 뜨게 되었다.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이 글 속에 들어오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는가 혼자 감탄을 하며 시라는 것이 어떤 물결이기도 하고 떨림 같기도 하고 깃발이기도 함을 밤새워 체감하게 되었다.
김상옥은 박재삼이 여린 마음으로 시에 깊이 빠져드는 것을 보고 “재삼아, 너는 집도 가난하고, 네가 집의 형편을 일으켜 세워야 하지 않느냐, 그러니 공부 쪽으로 더 열심히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 시 쓰는 일이 가시밭길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곤 했다. 그러나 박재삼은 “아닙니다 선생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저는 선생님이 가시는 길에 서서 그 눈부심에 젖겠습니다” 하고 당차게 말했다.
박재삼은 삼천포중학과 삼천포고등학교를 거치는 6년 동안 한 번도 일등을 놓친 일이 없었다. 학교 교사들도 “재삼아, 네 머리는 판검사가 될 수 있는 머리다. 아까운 머리 썩히지 말고 집안을 빛내고 삼천포를 빛내도록 해라” 하고 수시로 가난한 문학의 길로 들어서는 것에 대해 경계하는 말을 해주었다.
박재삼은 그런 충고들을 귓전에서 물리쳤다. 도래질을 하면서 물리치기도 했고 그런 말들을 수긍해 주면서 물리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부모님이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공직 어디라도 들어가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국어시간만 오면 “내가 참으로 잡되고 좀스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여기면서 마음을 굳건히 추스렸다.
피난 시절 박재삼은 전시 수도 부산에서 삼천포 출신 국회의원 정헌주의 비서가 되었다. 특히 그는 국회의원의 연설문이나 담화문 등 문장과 관계되는 일을 주로 맡아 보았다. 당시 국회의원 등은 부산에 피난 내려온 문인, 화가, 음악가, 배우, 연예인 등을 광범위하게 만났는데 박재삼은 남포동이나 광복동 다방이나 술집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부산 임시수도 시절이 끝나는 1953년 모윤숙, 조연현이 주재하던 월간‘문예’에 시 <강물에서>가 추천되어 시단의 샛별로 얼굴을 내밀게 되었다. 수복이 되면서 그 많던 문인, 화가, 연예인들이 다 봇짐을 싸들고 서울로 올라갔다. 박재삼도 정헌주 일행과 함께 서울로 가 서울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때 1955년에 월간 ‘현대문학’이 창간되고 조연현이 그 주간을 맡게 되었고, 박재삼은 정헌주와 김상옥의 천거에 의해 ‘현대문학’ 기자로 일하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조연현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자. 조연현은 대표 평론가로서 이후 1980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국 문학의 대부로써 문단의 실세로 있게 되었다. 조연현은 피난 시절 딱히 할 일이 없자 재미겸 소일겸하여 역술가 백운학의 관상보기를 곁눈질로 보고 실습을 해보곤 했다는데 피난 시절 문인들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대학시절 소설론 시간에 관상 이야기가 나와 필자가 조연현 교수에게 물었다. “제 관상 좀 보아주시겠습니까?” 했더니 “자네는 관직 운이 있네” 하고 스치는 말로 대답해 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