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과 기억을 건드려주는 서재
작업실이 여러 군데 있어서, 서재라고 해서 작정하고 책을 읽는다든가 글을 쓴다든가 하는 공간은 아니고…이 공간에 있다가, 몇 권 있지도 않은 책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 권을 빼서 몇 페이지를 보고, 다시 집어넣는데, 순간순간 어떤 영감이라든지 기억이라든지 살짝 건드려주기에는 이 공간이 제일 좋아요. 그리고 아이가 있는 집은 아마 그럴 거에요. 여기서 책장을 넘기고 있으면 아내도, 아이도 슬쩍 보다 가는 것 같아요. 대단히 좋은 피난처이기도 해요.
시간의 흐름을 타는 책장
이 책장보다 더 많아지면 그때는 책을 정리하거든요. 어떤 규칙은 없고, 옛날 책인데도 가끔가다 꺼내보는 책들 몇 권을 제외하고는 다른 누구를 준다든지 하고, 신간 위주로 꽂혀 있겠죠? 그래서 항상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이 정도였어요. 네, 그렇죠. 옛날부터 모아놓은 책들이 계속 쌓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타고 변하는 책장이에요. 개중에서 안 없어지는 책들은 유일하게 제가 쓴 작품이에요. 제가 쓴 희곡, 작품, 시나리오가 서툴게 제본된, 이거는 안 변하고 세월과 함께 갈 책들이에요.
형과 함께 책을
열독을 하게 된 것은 군대에서부터였던 것 같고. 보니까 저희 부모님이 독서에 관한 교육을 잘 해줬던 것 같아요. 교육을 위해 어디를 간다거나 장난감에 관련된 것은 특별히 인상 깊은 게 없는데, 어렸을 적부터 늘 책을 사다 주시면서 책을 보는 시간을 즐겁게 해주셨어요. 그리고 두 살 터울의 형님이 계셨는데, 어렸을 적 자기 전에 같은 책을 펴놓고 둘이 같이 보는 거에요. “형, 다 읽었어?”, “응, 다 읽었어.”, “너, 다 읽었어?”, “잠깐만, 나 좀 남았어.” 둘 다 그 페이지를 다 읽어야지 같이 넘기면서, 책 한 권을 같이 보는 .. 그랬던 시간이 꽤 길게 있었던 기억이 나요.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글을 쓰는데 뭔가 참고하느라, 리서치를 위해 읽는 책은 사실 재미가 없고, 그냥 정서와 무형의 아우라를 받기 위해서는 독서가 아주 좋죠. 사람 다음 책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사진이니 어떤 음악을 들으면서 영감을 얻고 그런다고 하시는데, 저 같은 경우는 사람을 만나 대화하거나, 아니면 책에서 받는 느낌이지요. 영화나 연극은 오히려 안 보고요.
나와 맞닿아있는 작가는..
작품을 쓸 때 책에서 직접적인 소재나 영감, 이미지를 받았던 기억은 특별히 나지 않아요. 작품도 때에 따라 다르니까. 그런데 제 대사라든지 글의 뉘앙스는 적지 않게 성석제의 언어하고 맞닿아 있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자주 사용하는 언어나 느낌을 이 작가도 사용하고, 이 작가의 글을 보고 너무 즐거워해요. 그리고 나는 그냥 작은 대사나 그 뉘앙스인데 이 사람은 그걸로 하나의 이야기, 소설을 만들어놓잖아.
그러다 보니까 제가 성석제 작가의 글을 너무 좋아하고 자주 읽었던 것 같아요. 책장을 보면 지금도 성석제의 소설은 일고여덟 권 있을 거에요.
이야기꾼으로서, 앞으로의 장진
얼마 전 골프 오픈에서 톰 왓슨이 보여준 것이 있어요. 나이 예순이 된 노장 골퍼가 마지막 우승 펏을 하기 위해 그린으로 좍 걸어가는데 그 모습이, 그가 1977년에 그 대회에서 우승할 때 걸어가던 모습과 교차로 보여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30년 전에 그와 지금의 그, 둘의 모습이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똑같이 되풀이된 거죠. 결국에는 마지막에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해서 우승을 못했지만, 그래도 그의 표정은 너무 행복했고. 그 표정을 보고 ‘나도 내가 청춘을 보냈던 영역에서, 저 나이가 되어 저 표정, 인자하고 편한 표정으로 저곳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 굉장히 행복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야기꾼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창작자 영역을 얘기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나는 순수하게 예술을 대하고 이야기를 만드는데, 결국 시장에 나가는 순간 상업적 결과로 판정을 많이 받거든요. 그럴 때 상업적 결과를 내지 못하면, 그 영역에서 점점 사라질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창작자의 고유한 정신이란 것을 지켜내면서 끝까지 살아남기가 너무 힘든 판이에요. 그래서 적당한 때 그냥 알아서 그만둬야지,라는 생각이 많았는데, 저 표정을 보고 요즘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고 있어요.
얼른 새 희곡도 써야죠. 지금 가장 속상한 게 일정 때문이기도 하고, 새 희곡을 못 쓰고 있는데… 그런데 곧 나올 것 같아요. 머릿속에 희곡이며 소설이며 지금 폭발 직전까지 쌓여있어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