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금자탑
또한 조지훈은 1947년의 문단을 총평하면서 “작년에 나온 모든 책 중에서 두 권을 고르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양주동의 ‘고가연구’와 김상옥의 ‘초적’을 꼽겠다”고 했다. 1947년은 서정주의 ‘귀촉도’, 유치환의 ‘생명의 서’, 이태준의 ‘복덕방’, 김동리의 ‘무녀도’ 등 우리 문학사를 장식한 휘황한 명작이 쏟아져 나온 해였는데 조지훈의 안목에는 창작물로는 오직 ‘초적’만이 들어설 뿐이었다.
뒤이어 발표한 ‘고원(故園)의 곡(曲)’(1949), ‘이단(異端)의 시’(1949), ‘석류꽃’(1953)으로 초정은 시조의 현대시적 재구성에 벼루를 뚫고 붓을 무지르며 질풍노도로 한 시대를 갈랐다.
‘초적’ 이후 한걸음도 쉬지 않고 자유시의 거센 홍수에 맞서 민족시가의 본류, 그 흐름을 혼자 감당하면서 2004년 10월 그믐, 붓을 내려놓기까지 초정이 이룩한 시조의 산맥, 시조의 거대한 강물이 그의 1주기를 맞아 ‘김상옥 시전집’으로 상재된 것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만나기 어려울, 시조의 금자탑이며 한국문학의 보고가 아닐 수 없다.
보면 깨끔하고 만지면 매촐하고
神거러운 손아귀에 한 줌 흙이 주물러져
천 년 전 봄은 그대로 가시지도 않았네
-‘청자부(靑磁賦)’ 5수 중 첫수
불 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하도다
-‘백자부(白磁賦)’ 4수 중 끝수
요즘 국보1호를 숭례문으로 그대로 두느냐 바꾸느냐로 논란이 일고 있다. 우리 5000년 역사가 낳은 최고의 예술은 청자, 백자가 아닐까. 저 이름 없는 도공들이 빚은, 세계에 내놓을 절정의 예술혼(魂)을 이 나라의 어느 시인이 함부로 시로 집어낼 수 있을 것인가. 첫 시조집 ‘초적’에 들어 있는 ‘청자부’ ‘백자부’에 김동리, 서정주, 조지훈이 탄성을 지르고도 남을 일이다.
바로 우리네 삶과 정신의 가장 오래고 가장 깊은 뿌리를 모국어로 캐고 시조로 물레질한 시인이 초정이다. 개화기의 물결은 서구에서 밀려오는 새로운 것, 남다른 것에 쏠리고 정작 우리의 것은 외면하고 있었다.
不易摩天詩樓主人
초정이 모두들 달려가는 자유시를 거부하고 고유의 민족시인 시조를 고집해 시단에 나온 것은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를 굽던 도공의 그 솜씨를 잇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과연 초정은 우리 시의 청자며 백자를 재현했다.
그는 스스로 많은 아호(雅號)를 지었는데 그중에도 불역마천시루주인(不易摩天詩樓主人)이 하나의 상징을 갖는다.
도대체 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보다 높은 시인의 집은 어디 있으며 그 주인은 누구인가. 초정은 1970년대 초 인사동에서 조선 초기 청화백자 한 점을 행상 노인에게서 구입한다.
15세기의 그 항아리에는 철사(鐵砂)로 그린, 사람이 용을 타고 있는 형상이 담겨 있는데, 마치 동자의 붓끝에서 나온 듯한 신필(神筆)의 것이라 우리나라 도자기 그림의 역사를 통틀어도 다시는 없는 것이어서 일본의 어느 소장가가 조선백자를 두고 동경의 큰 빌딩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는 일화에 빗대어 “그렇다면 나는 이 도자기를 마천루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천명하면서 작호(作號)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희귀한 도자기보다는 ‘김상옥 시전집’이 있기에 불역마천시루라 하겠으며 그 주인이 초정이라 해서 한치도 어긋남이 없으리라고 말한다.
을사늑약이 있은 지 100년. 그로부터 현대시조의 혈죽(血竹)이 솟아올랐으니 이제 시조 100년의 총결산을 해야 할 때다. 여기에 때를 맞춘 것은 아닐 터이나 지난 시조 100년사에 이 ‘김상옥 시전집’이 아니었다면 무엇으로 이 겨레의 정신과 정서, 그리고 모국어의 가장 빛나는 가락을 시조만이 내뿜을 수 있다고 강변하겠는가.
‘김상옥 시전집’은 초정 한 사람의 위업을 담아낸 것이 아니요, 시조가 한국인이 한국어에 의한 한국을 위한 진정한 시 형식임을 작품으로 증거하는 위대한 한국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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